심심하여 몇가지 기록을 더 찾아보았습니다.
1107년 고려사절요 7권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윤관ㆍ오연총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여 보냈다. 을유일에 윤관ㆍ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고 군사의 수가 대강 17만인데 호왈 20만이라 하였다.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ㆍ황군상(黃君裳)을 정(定 함남 정평(定平))ㆍ장(長 함남 정평(定平)) 2주에 나눠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 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와서 명을 들으라." 하였다. 추장이 이를 믿고 고라(古羅) 등 4백여 명이 이르니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출동시켜 이를 섬멸하였다. 그 가운데 용감하고 약삭 빠른 자 50, 60명이 의심을 품고 관문에 이르러 들어오려 하지 않으므로 병마판관 김부필(金富弼), 녹사(錄事) 척준경을 시켜 길을 나누어 복병하게 하고, 최홍정을 시켜 매우 날랜 기병으로 이에 호응하게 하여 거의 다 사로잡고 죽였다.
을미일에 윤관은 스스로 5만 3천 명을 이끌고 정주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 김한충(金漢忠)은 3만 6천 7백 명을 이끌고 안륙수(安陸戍 함남 정평(定平))로 나가고, 좌군병마사 문관은 3만 3천 9백 명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고,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3천 8백 명을 이끌고 선덕진(宣德鎭 함남 함주(咸州)) 안해(安海)로 나가 양수(兩戍) 사이에서 막고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陶) 등은 선병(船兵) 2천 6백 명을 이끌고 도린포(道麟浦)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 함남 함주(咸州))을 지나서 한나절을 가니 여진은 군사의 위엄이 매우 장대함을 보고 모두 도망쳐 달아나니 가축들만 들에 널렸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이 들어와 동음성(冬音城)을 확보하자 윤관이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과 홍정을 보내어,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여 깨뜨려서 달아나게 하였다.
병신일에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이르러 여진이 모여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통역 대언(戴彦)을 보내어 항복하도록 권하였더니, 여진이 말하기를, “우리가 일전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항복을 말하느냐." 하고 드디어 석성으로 들어가 항거하여 싸우는데, 화살과 돌이 빗발 같아서 군사가 나아갈 수 없었다. 윤관이 척준경에게 말하기를, “해는 기울고 사태는 급하니, 너는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이 성을 공격하라." 하니, 준경이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에 종사(從事)로 있을 때에 죄를 범했는데, 공이 나를 장사라고 여겨 조정에 청해서 용서받게 하였으니, 오늘이야말로 준경이 목숨을 버려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하고, 드디어 석성 아래에 이르러 갑옷을 입고 방패를 가지고서 적중에 돌입하여 추장 두서너 명을 쳐 죽이자, 이에 윤관의 휘하 군사는 좌군과 더불어 공격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준경에게 능라(綾羅) 30필을 상주었다.
1108년 마찬가지로 고려사절요
을축일에 윤관ㆍ오연총이 정병 8천을 거느리고 가한촌(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나가니, 적이 군사를 풀숲 사이에 매복하고 있다가 윤관의 군사가 이르는 것을 기다려서 이를 급히 공격하여, 우리 군졸이 모두 무너지고 다만 10여 명이 남았다. 적이 윤관 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연총은 화살에 맞아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척준경이 용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이를 구하려 하자, 그 아우 낭장(郞將) 준신(俊臣)이 이를 말리며 말하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으니, 헛되이 죽음은 무익합니다." 하였다. 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라. 나는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의리상 가만있을 수 없다." 하고 곧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적진을 뚫고 들어가 10여 명을 격살하니 최홍정ㆍ이관진(李冠珍) 등이 산골짜기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구하였다. 이때에 적이 포위를 풀고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36급을 베었고 윤관 등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와 영주성으로 들어갔다. 윤관이 눈물을 흘리고 울며 준경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 너를 마땅히 아들과 같이 보고, 너는 마땅히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 하였다. 제를 받들어 준경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하였다.
ㄷㄷ
임진일에 여진의 군사 수만 명이 웅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최홍정이 사졸을 타이르고 격려하니, 여러 군사가 전의를 가지게 되었다. 곧 4문을 열고 일제히 나가서 분발ㆍ공격하여 크게 이겼는데, 사로잡고 벤 것이 80급, 병거(兵車) 50여 량, 중거(中車) 2백 량, 말 40필을 노획하였고, 그 외에도 노획한 무기는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이때 척준경은 성 안에 있었는데, 주수(州守)가 말하기를, “성을 지킨 지 날이 오래되어 군량이 다 되어가고, 밖으로부터의 구원병은 이르지 않았으니, 공이 만약 성을 나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구하지 않는다면 성 안의 군사는 살아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준경이 군사의 해진 옷을 입고 밤에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가, 정주로 돌아가서 군사를 정돈하고 통태진(通泰鎭)을 통과하여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에 이르러 적을 맞아 싸워 크게 부수니, 성 안의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
행영병마판관 왕자지ㆍ척준경이 여진과 함주ㆍ영주 두 주에서 싸워 33급을 베었다.
왕자지ㆍ척준경이 또 여진을 사지령(沙至嶺)에서 쳐 27급을 베고, 3명을 사로잡았다.
- 여기부터는 동사강목 자료입니다.
1104년
임간이 여진과 정주(定州)에서 싸우다가 패적(敗績)하였다.
처음에 내시(內侍) 임언(林彦)이 출병할 의견을 주장하니, 직사관(直史館) 이영(李永)이 아뢰기를,
“병기(兵器)는 흉기이고 전쟁은 위태하니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임언이 무사한 때에 전쟁을 하여 흔단(釁端)을 만들려고 하니 옳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임간이 또 공 세우기를 부당하게 구하여 훈련되지 않은 백성을 거느리고 갑자기 나가 여진과 싸우자, 추장 연개(延盖)가 지훈(之訓) 등에게 맞아 치게 하니, 우리 군사가 패적(敗績)하여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다만 추밀원 별가(樞密院別駕)
척준경(
拓俊京)이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 적의 장수를 목 베어 돌아왔으니, 준경이 이 일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1107
11월 24일(을해)에 왕이 서경에 이르러 위봉루(威鳳樓)에 나아가서 윤관 등에게 부월(鈇鉞)을 친히 주어서 보내었다.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東界)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 옛날의 장주(長州)에 있었는데 지금의 정평(定平)이다 에 둔병(屯兵)하였는데 군사는 대략 17만 명이었으나 20만 명이라 선전하였다.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崔弘正)과 황군상(黃君裳)을 나누어 보내어 정주(定州)ㆍ장주(長州)의 두 주(州)에 들어가서 여진의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전일에 구류한 번추(蕃酋 여진의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장차 놓아 돌려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이 와서 명령을 들어라.”
하고는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추장(酋長) 고라(古羅) 등 4백여 명이 이 말을 믿고 왔는데,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는 복병이 나와서 이를 모조리 죽였다. 그 중에 장건하고 교활한 자 50~60명은 의심을 하면서 관문에 들어오지 않으니, 판관(判官) 김부필(金富弼)과 녹사(錄事)
척준경(
拓俊京)을 보내어 길을 나누어 거의 다 사로잡아 죽였다.
12월 윤관 등이 여진을 쳐서 대파(大破)하고 영주(英州)ㆍ웅주(雄州)ㆍ복주(福州)ㆍ길주(吉州)의 4주(州)를 설치하였다.
14일(을미)에 윤관이 길을 나누어 군대를 내보내는데, 자신은 5만 3천 명을 거느리고 정주의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 김한충(金漢忠)은 3만 6천 7백 명을 거느리고 안륙수(安陸戍)로 나가고,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 문관(文冠)은 3만 3천 9백 명을 거느리고 정주(定州)의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고,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김덕진(金德珍)은 4만 3천 8백 명을 거느리고 선덕진(宣德鎭)옛터는 지금의 함흥부(咸興府) 45리에 있다 으로 나가고,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등은 선병(船兵) 2천 6백 명을 거느리고 도린포(道鱗浦)일명 도련포(道連浦)라고도 하는데 함흥(咸興) 남쪽 35리에 있다 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가니, 여진이 우리 군대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보고는 모두 도망하여 가축(家畜)이 들판을 덮고 있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賊)이 동음성(冬音城)에 들어가 지키므로 윤관이 병마금할(兵馬鈐轄) 임언(林彦)과 최 홍정(崔弘正)을 보내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15일(병신)에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도착하여 통역을 보내어 여진을 타일러 항복하도록 하니, 여진이 말하기를,
“우리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항복하라고 하는가?”
하면서 성(城)에 올라 막아 싸우니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므로 우리 군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윤관이
척준경에게 이르기를,
“해는 기울고 사태는 급하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더불어 공격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제가 일찍이 죄를 범했는데도 공(公)은 나를 장사(壯士)로 인정하여 조정에 청하여 용서하였으니, 오늘은 준경이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기 위하여 힘을 다할 때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석성에 도착하여 갑옷을 입고 방패를 쥐고 적진에 갑자기 뛰어 들어가서 추장 두서너 사람을 쳐서 죽였다. 이에 윤관의 군사는 좌군(左軍)과 합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적을 크게 쳐부수니, 적병이 혹은 스스로 바위에 몸을 던져서 죽고, 노유(老幼)와 남녀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홍정(弘正) 등이 나아가 이위동(伊位洞)을 쳐서 이겼는데 4군(軍)이 적의 머리를 4천 8백여 개를 베었고, 포로로 잡은 자 또한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촌락을 부순 것이 1백 30여 소나 되었다. 사자를 보내어 승전을 알리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려 원수(元帥) 이하의 장수에게 유고(諭告)로 권장하고 물품을 차등이 있게 내려 주었다. 윤관은 또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어 땅의 경계를 획정(畫定)하였으니 동쪽으로는 화관령(火串嶺)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 이르렀다.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에게 지형을 살피게 하여, 몽라골령의 아래에는 영주성(英州城) 지금의 길주(吉州)에 있다 을 축조하고, 화관령의 아래에는 웅주성(雄州城)지금의 길주(吉州)에 있다 을 축조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는 복주성(福州城) 지금의 단천(端川)에 있다 을 축조하고, 궁한이촌에는 길주성(吉州城) 웅주(雄州)의 북쪽에 있다 을 축조하였다. 여진의 요을내(裊乙乃) 등 3천여 명이 와서 붙 쫓았다.
1108
여진이 윤관과 오연총을 병목[甁項]에서 포위하니, 병마녹사(兵馬錄事)
척준경이 구원하여 여진을 물리쳤다.
윤관과 오연총이 날랜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병목의 좁은 길을 나오는데, 초목이 우거진 숲 사이에 적이 복병을 설치해 두었다가 윤관 등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공격하니, 우리 군사가 무너지고 다만 10여 명만이 남았을 뿐이다. 윤관을 몇 겹으로 포위했는데, 오연총은 빗나간 화살에 맞아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척준경이 용감한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이들을 구원하려고 하니 그 아우 척준신이 말랐으나, 준경은 말하기를,
“너는 집에 돌아가서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라. 나는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했으니 의리상 그대로 있을 수 없다.”
하고는, 고함을 치면서 적진에 갑자기 뛰어 들어가 적병 10여 명을 죽였다. 때마침 최홍정(崔弘正)ㆍ이관진(李冠珍) 등이 산골짜기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니 적병이 포위를 풀고 달아나므로 뒤따라 쳐서 이를 패퇴(敗退)시켰다. 해가 저물자 윤관등이 영주성(英州城)에 들어와서 윤관이 눈물을 흘리며
척준경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지금부터 나는 너를 자식처럼 볼 것이니 너는 나를 아비처럼 보아라.”
하고는 조서를 받들어 합문지후(闔門祗候)에 임명하였다. 조금 후에 적의 보병과 기병 2만 명이 성(城) 남쪽에 와서 둔치고는 큰 소리를 치면서 싸움을 걸어오니, 윤관이 임언(林彦)에게 이르기를,
“저들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므로 형세가 대적할 수가 없으니 다만 굳게 지킬 뿐이다.”
하니, 준경이 말하기를,
“우리가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날로 증가되고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는데, 외부의 구원이 이르지 않으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은 죽을힘을 내어 싸우겠으니 원컨대 제공(諸公)은 성에 올라가 구경이나 하십시오.”
하고는 결사대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서 적과 싸우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준경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개선하고 돌아오니, 윤관 등이 누(樓)에서 내려가 맞이하여 손을 이끌고 서로 절하였다. 윤관이 좌군판관(左軍判官) 김준(金晙) 군사의 패전에 노하여 군졸을 묶어 장차 죽이려고 하니, 준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오늘의 패전은 임언이 군율을 어긴 때문인데, 임언은 용서하고 묻지 않으면서도 이 무리들만 죽이려 합니까?”
하니, 윤관이 몹시 놀라면서 이를 풀어 주었다. 이때 윤관이 여러 장수들을 중성(中城)의 대도독부(大都督府)에 모았는데, 승선(承宣) 왕자지(王字之)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도독부(都督府)로 오다가 갑자기 오랑캐의 군사를 만나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준경이 또 구원하여 적을 패퇴시켰다.
2월 여진이 웅주(雄州)을 포위하니, 병마판관 최홍정이 이를 쳐서 패퇴시켰다.
여진의 군사 수만 명이 나와서 웅주성(雄州城)을 포위하므로 최홍정이 사졸(士卒)들을 훈려(訓勵)하니, 군사들의 사기가 드높았다. 곧 사방의 성문을 열고 일제히 나가서 힘을 내어 쳐서 크게 패퇴시키고 적의 목 80여 급을 베었으며, 병거(兵車)ㆍ마축(馬畜)ㆍ기장(器仗) 등의 물건을 얻은 것이 셀 수도 없었다. 이때
척준경이 성중에 있었는데 주수(州守)가 이르기를,
“성(城)을 수비한 것이 시일이 오래되매 군대의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는데 외부의 구원은 도착되지 않으니, 공이 만약 성을 나가서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서 구원하지 않는다면 성중에는 아마 백성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준경이 사졸의 해진 옷을 입고 성벽에 줄을 매달고 밤에 나가서 정주(定州)에 돌아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을 지나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 싸워서 크게 패퇴시키니, 성중 사람이 감격하여 울었다.
8월 9도(道)에 점군사(點軍使)를 나누어 보내었다.
○ 여진이 길주(吉州)를 침구하니, 병마판관 유익(庾翼) 등이 패전하여 죽었다.
여진이 그 토지를 잃자 쳐들어와서 소란을 일으키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오연총과 윤관이 교대로 왕명(王命)을 받아 왕래하면서 경략(經略)하였으며, 병마판관 신현(申顯)은 여진을 영인진(寧仁鎭)
지금의 영흥(永興) 에서 패퇴시켰고, 왕자지와
척준경도 또한 함주(咸州)ㆍ영주(英州)의 두 주(州)에서 패퇴시켰다. 적병(賊兵)이 비록 여러 번 패전했지마는 관군(官軍)도 또한 때때로 이기지 못하여 장수와 군사가 죽은 사람이 이루 셀 수 없었다. 유익과 장군 송충(宋忠)ㆍ박 회절(朴懷節) 등이 모두 패전하여 죽으니, 왕이 재보(宰輔)를 불러 변방의 일을 의논하면서 말이 유익 등에게 미치자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아마도 본문 내용은 1107년 12월 15일에 있었던 전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려사절요와 동사강목을 보니까, 본문의 전투 내용과는 조금 다르네요.
윤관과 척준경의 사이가 각별했던 것을 알 수 있겠네요. 윤관의 목숨을 척준경이 구한 기록도 보이구요.(1108)
첫댓글 중간에 왕자지...???????????????????????????????
ㅋ척준경이 사극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ㅋㅋ
이름을 좀 달리해보면 어떨까요?
왕성기나 왕지로 사극으로 출연진과 pd만 제대로 갖추어지면 대박 사극하나 나올텐데..
왕좌진
왕지가 적당해 보이네요 ㅎㅎㅎㅎㅎ
한국사 유일한 신검합일급 웨폰마스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