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 다 갈 때 쯤이면 이탈리아 밀라노는 비오고 흐린날이 많아지고 겨우내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역시나 이틀동안 계속 비가오고 흐렸다. 저녁을 먹던 영감이 느닷없이 비 내리는 꼬모 como 호수가 멋있을 것 같단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왠 낭만을?
비젠띠노 Vigentino 뜨람 종점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을 보면 차가 방금 떠난 것 같다. 안내 판에는 배차시간표가 없고 온통 낙서만 되어 있어서 둘이는 궁시렁 거리면서 이탈리아 사람들의 공중도덕과 위정자의 게으름을 흉보았다.
아침 안개로 몸이 으스스 해올 때까지 기다렸는데도 뜨람은 소식이 없다. 일요일이라 배차 시간이 늦는 것을 감안해도 너무 않오는 것이다. 서성이다가 선로 주변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와 휴지들속에 배차시간표가 함께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의 일등 시민 할아범은 ‘이런, 못된 놈들…!’하며 그것을 주워 물기와 흙을 닦아내고 안내판에 정성껏 다시 끼워 넣었다. 다행히 그 시간표는 비닐 코팅이 되어 있어서 비를 맞았어도 망가지지는 않았다. (1주일 후에 보니까 그 시간표도 물론 없고 창 3면이 모두 박살이 나 있었다.)
시간표 대로라면 그동안 뜨람이 두대는 왔어야 했다. 나는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났다. ‘배차시간대로 차가 오지 않으니 성질 급한 사람이 화가 나서 뽑아버렸나봐요.’ 조급해진 영감 왈, ‘그런가 본데….. 나도 도로 뽑아버리고 싶으네, 왜 이렇게 않오지?’
꼬모 라고
Como Largo 행 기차는 서울의 청량리 역쯤되는 북 밀라노 까도르나 Cadorna 역에서 출발한다. 발랄한 중학생들 한 무리가 몰려와 기차역은 활기에 찼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탔다가는 내릴 때 쯤이면 귀에 이상이 생길지도 모를 테니까 우리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객차를 골랐다.
떠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영감이 기차표에 사용 일자를 찍지 않았다며 뛰어내린다. 이탈리아에서는 버스나 기차표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간이나 날자를 기계에서 펀치하지 않으면 5유로 = 약 6000원의 벌금을 물게된다. 미처 찍지 못하면 펜으로라도 적어넣어야 한다. 지정좌석이 없는 기차표는 49일간 유효하니까 사용 시작 날자를 찍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표는 75분간 유효한데 전철과 뜨람에도 연계되니까 교통 이용이 아주 편리하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해서 배차시간을 어긴 뜨람 때문에 열 받았던 영감을 위로해 주었다. 드넓은 농촌 풍경과 멀리 우거진 숲을 보며 달리다가 높은 산이 나타나기시작했다. 이제 스위스와 접해 있는 이탈리아 북쪽의 꼬모호수에 다 온 것이다.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꼬모호수는 언제 봐도 아름답고 고요하다. 이탈리아에서 제일 큰 3개의 호수중 하나인 꼬모호수가엔 알프스를 배경으로 중세시대 귀족들의 고급 빌라들과 화려한 정원, 그리고 아기자기한 마을들이 산 기슭에 줄지어 있다. 철따라 변하는 자연에 따라 올 때마다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이번에는 벨라지오 Bellagio 에 가볼 계획이었다.
기차역 바로 앞에 있는 부두에는 여러척의 유람선과 워터택시가 일렁인다. 마침 곧 출발하는 배가 있다기에 급한 마음에 표를 얼른 사서 오르고 보니 쾌속정이었다. 요금이 일인당 11유로 =약 13000원 나 된다고 일반 배를 탈 걸 그랬다며 남편은 아쉬워한다. 서두르면 항상 실수가 있다. 사실 쾌속정을 타니까 요금도 비싸지만 갑판으로 나가지 못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30km 떨어진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비내리는 호수를 기대했지만 흐린날의 꼬모 호수도 운치가 있다. 벨라지오 선착장을 따라 우거지 숲과 푸른 호수경치와 어우러진 울긋불긋한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거닌다. 아름다운 유리그릇이며 소품 액세서리, 목각, 도자기 인형, 가죽제품, 씰크 마후라, 보석상들이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다. 진열장 가득이 진열된 우아한 아게이드 머리핀과 머리빗은 어떤 사랑스런 남자의 시계를 풀게 할까.
한 주방용품 가게에는 용도에 따라 도자기로 손잡이의 모양을 끼워논 것이 어찌나 예쁜지 갖고 싶었다. 아이스크림 주걱엔 아이스크림 콘을, 사과씨 빼내는 칼에는 사과씨방 모양을, 멜론을 동그랗게 파먹는 칼은 멜론조각을, 피자 칼엔 피자조각 모양을……이렇게 예쁜 주방 기구로 요리를 하면 요리 하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소꼽장난하듯 마음이 예뻐지고 즐거울 것이다.
자갈 깔은 층계를 따라 좁다란 길을 올라가면서 고급 상점들을 기웃거려본다. 포도주 가게의 디스플레이도 정성스럽고, 외벽에 달아논 옷가게의 조그만 진열장도 특이하다. 소품 수공예품도 만져보고 싶을정도로 예쁘다.
어떤 중년 부부가 골목 어귀에서 옥신각신한다. 부인은 층계위 높은 곳에 있는 아룰렛으로 가겠다고 하고 뚱뚱한 남편은 거기에는 무엇이 볼게 있다고 가느냐고 불평하는 것이다. 아마도 나만큼이나 층계 오르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여자가 뿌리치고 올라가 버리자 한숨지며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어떤 옷 가게에선 샴 고양이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지나는 사람마다 예쁘다고 쓰다듬어 주면 발톱을 세우며 앙탈을 부린다. 꼭 새침떼기 여자 아이가 낯선사람이 만지는 것이 싫어서 톡톡 터는 것 같다. 그리고 보니 벨라지오에는 이골목 저골목에 고양이가 야옹거리며 많이 돌아다닌다. 개들도 눈에 띄었는데 어떤 까만 복실이는 주인을 잃었는지 당황한 눈빛으로 허둥지둥 헤매고 있었다. 요즘엔 나라마다 유기견도 많다는데 그 복실이 주인은 이왕이면 경치좋은 마을에서 살라고 두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벨라지오 마을은 호수를 굽어보는 가파른 절벽 위에 있어서 어느 골목이나 계단으로 이어진다. 마을 꼭데기에 중세시대의 고풍스런 빌라가 있다기에 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멋진 정원을 기대하면서 입구를 찾아 아주 오래된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보았다. 그런데 정원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입구는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 표시된 화살표도 다시 돌아가란 뜻인 듯 우리가 오던길로 향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화살표외에는 아무런 안내문도 없었다.
이끼낀 긴긴 돌담과 빨간 담장이가 유혹을 한다. 호수로 내려가면 평지로해서 선착장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 갔았다. 자갈 깔은 층계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뒤뚱거리며 호수에 거의 다 내려 갔는데 젊은 남녀가 올라오면서 길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다시 산을 넘어야 한다니 기가막혔지만 겁먹었던 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돌담 틈을 뚫고나와 피어난 앙증스런 작은꽃이 힘내라고 한다.
첫댓글 원본을 복사해서 올리니까 글 폭이 마음대로 늘어나는군요. 수정을 시도해도 잘 않되서 그대로 올립니다.
스위티누님 꼬모호수의 여행기가 생생하게 전해옵니다. 뜨람의 설명이 아쉽네요.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 롬바르디 평원으로 올때 꼬모호수에서 병사들을 쉬게 했다네요. 항상 이국의 풍경을 실감있게 보내주시는 유럽 특파원(?) ^^* 스위티 누님에게 달콤한 사랑의 응원과 격려를 보내드립니다. 감사해요
아, '뜨람'은 전차에요. 옛날에 서울에서 보던 것과 똑 같은 것도 있고 요즘 나온 최신 전차등 서너가지가 돌아다닙니다. 밀라노에서는 버스 전차 전철을 차표 한장 1유로 = 1200원에 75분동안 아무 것으로나 갈아타고 다닐 수 있어서 아주 편리합니다.
꼬모 호수도 좋치만 골목길이랑 진열장의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보여줘서 고마워요,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이 보여서 좋습니다. 고양이도 우리나라 것과 틀린 것 같아요, 눈초리가 매섭네요..뚱뚱한 저 남편 계단 오르자면 욕좀 보겠어요,ㅎㅎㅎ
ㅎㅎㅎ, 한숨을 푹 쉬더라구요.
스위티님! 사진도 아기자기 좋지만 자상한 해설이 더 좋습니다 ㅎㅎ
마음에 드세요? 좀 더 잘 해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