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흥보 베드로 신부
사순 제2주일
창세기 15,5-12.17-18 필리피 3,17―4,1 루카 9,28ㄴ-36
제가 처음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동료 중의 한 분이 저를 데리고 신학교 뒷산인 낙산을 돌며
이 나무가 느티나무고 저 나무가 무슨 나무고…… 나무 이름에서부터 자연의 섭리까지
도시에서 자라난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비단 저에게만 친절하게 해준 것이 아니라, 그 신부님은 청소에서부터 모든 동기 신학생의
각종 행사와 일의 뒤처리를 도맡아 해주었습니다. 똑같이 주어진 빠듯한 신학원 생활 속에서도
그 신부님은 남몰래 그리고 남들이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타나는 데 반해,
그분은 미리 나가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 준비해 주었고, 맨 마지막까지 남아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기들끼리 무슨 회합을 해도 그 신부님이 한 마디를 하면 그것이 그 모임과
그 주제의 결론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부님이 책임지고 마무리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님은 남보다 잘난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물론 훤칠한 키에 잘 생기고 노래도 잘하지만, 그보다는 변하지 않고 확실하게 끝마무리를
해주는 것이 동료들의 신임을 얻은 탓이었습니다.
가끔 살펴보면, 너도나도 좋은 안을 내세울 수는 있지만, 꼭 그 안대로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요,
그 안들이 모두 다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그 안을 제시한 사람조차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기면 자기가 제안한 안 대로
실현하지 않는 경우조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신부님은 말없이 꾸준히 끝까지 마무리 지어주었기에, 동료 중에 그 누구도
더 이상의 말을 할 필요도 없었고, 딴소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분을 먼저 데려가신다고, 그분은 참으로 아쉽게도
일찍이 주님께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는 하늘에서 선택한 아들임과 동시에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31절)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하실 것이고, 또 스스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더욱 환하게 빛나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나서 한 생을 살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여러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가고, 어떤 이는 여러 사람의 미움을 받고 돌아갑니다.
여러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가려면 여러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함께 해줄 때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변한 모습을 본 제자 베드로는 엉겹결에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33절)
이렇게 자신의 이득과 편함을 위해 자기 일생과 일생에서 자기에게 닥쳐온 기회를 사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존경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시샘과 원망마저 받게 됩니다.
사람들을 눌러 이기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쥐어짜며 자기 것을 늘리는 사람은 도망자가 되고, 스스로도 추하게 인생을 마감합니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한탄하면서,
심지어는 남들을 원망하면서까지 불만족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보다 낫고 좋은 미래를 위해 너도나도 노력합니다.
그런데 서로가 그 좋은 미래에 자신이 얻을 혜택만 생각하고, 그 좋은 미래를 이루기 위해
오늘 함께 참여하여 양보하고 희생하지 않는 한, 좋은 미래는 다가오기 힘들어 보입니다.
혹자는 모두 다 귀한 인생인데, 어느 누구 하나의 희생을 요구하지 말고, 다 같이 상생의 길을
걷자고도 합니다. 좋은 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같이 어느 한 사람의 희생이 요구되는
시대와 처지가 다시 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 부류나 어느 한 세대에게만 좋은 열매가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열매,
곧 공동선을 얻을 수 있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관련자들의 이해관계 속의
야합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의 공감대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안과 기획이 마련되고,
다 함께 자신들이 추구하는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실현 의지와 헌신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좋은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힘을 가지고 있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자기를 따르라고 하거나
자신의 생각만이 좋은 결정이라고 여기지 말고, 동시대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공감대와 동의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위한 미래를 함께 건설해 나갈 수 있도록 참여케 하며,
우리 스스로 그 일을 위하여 개인적인 친분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인류 사회의 공동선인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 변화되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려는
예수님의 주윗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
사도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립 3,21)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길을 밝혀주고 인도해 주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의 생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로 합시다. 그래서 마지막 날 웃으면서 주님께 돌아가기로 합시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
2025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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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
사순 제2주일
창세기 15,5-12.17-18 필리피 3,17―4,1 루카 9,28ㄴ-36
"회개"
오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변모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목격합니다. 또한,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함께 목격하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룩하실 일을 듣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룩하실 일은 '구원을 위해 세상을 떠나심'이었습니다.
영광에 싸여 모 습을 드러내신 그리스도께서는 고통과 수난을 동반한 새 파스카를
언급하십니다. '세상을 떠나실'에서 '떠나다'는 탈출을 의미하는 희랍어
'엑소도스'이 사용되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탈출 시키시어 자유를 선사하신 하느님은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고통과 고난
에 참여하시어 새 파스카를 세우셨고 인류와 새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 시기에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을 듣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격했고 새롭게 맺어질 새 계약과 새 파스카를 듣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인간과 유대하시고, 그로인해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심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실 고통 뒤에 찾아올 영광을 미리 목격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훗날 그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영광은 목격에 그쳤지만 신약에서는 참여로 확장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 8,17).
하지만 누가 선뜻 고통이 있는 길을 선택하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할 수 있을까요?
"성장통이다."라는 생각으로 고통을 참기만 하고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그저 미련하게 고통을 참고 견디어내는 것을 바라실까요?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참고 견디어내라, 고통을 받으라', 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받고 견뎌라.'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라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죄와 고통이 시작된 이유는 첫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그 죄를 씻어내고자 고통을 짊어지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부활하시어 다시 나타나셨고 영광을 모든 이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하얗게 번쩍였다."고 합니다. 흰옷은 더러워지기 쉬워 자주 입기 꺼려집니다.
혹시라도 때가 타지 않을까 조마조마합니다. 하지만 더러워진 옷은 다시 세탁해서 입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란 없습니다.
고통을 마주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주님을 찾을 수 있는
회개의 용기입니다.
수원교구 윤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
2025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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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하 베드로 신부
사순 제2주일
창세기 15,5-12.17-18 필리피 3,17―4,1 루카 9,28ㄴ-36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봄이 다가오면 성당 근처에는 아침마다 울며 떼를 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성모 유치원에 이제 막 들어온 유치원생들이 부모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큰 소리로 우는 소리입니다.
익숙한 집을 떠나 생소한 곳에 떠밀려가야만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동시에 언젠가 우리들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날이 오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유치원 친구들에게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성모님은 지금 어디 있어요?"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중에는 가족이나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경험한 아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 너무 어리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습니다. 고민하던 가운데 문득 장례미사의 복음환호송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질문을 했던 아이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하늘나라에 살고 있
었어. 지금은 잠시 이곳 지구에 내려왔지만, 언젠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해.
익숙한 집에 있다가 유치원에 잠시 왔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언젠가
다시 예수님, 성모님이 있는 하늘나라로 돌아갈 거야."
오늘 복음은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신 예수님과 3명의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산에 오르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제자들은 예고하신 수난과 십자가보다 영광으로 가득 찬
지금 눈앞의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저 머무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가시기 전에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죄의 용서와 참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합니다. 이는 익숙한 나의 환경, 내가 바라는 곳, 그저 머무는 자리를 떠나
십자가를 향한 여정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하느님께 생명을 받아
지금은 잠시 이 세상에서 때론 바쁘게, 때론 아늑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모두 다시 하늘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부디 그날에 울며 떼를 쓰는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한 걸음씩 십자가를 향해 떠나는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베드로처럼 막연하고 생소한 떠남보다
지금 이 순간의 영광에 더 머무르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먼저 이 길을 앞장서 가셨고, 몸소 이 십자가의 여정 끝에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희망을 품고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을 출발합시다.
하늘나라에서 별처럼 많은 분이 우리의 순례를 응원하고계심을 기억합시다.
제주교구 서원하 베드로 신부
2025년 3월 16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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