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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효재마리아(수풀)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다니엘 9,4ㄴ-10 루카 6,36-38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시기에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유배의 생활로 이어졌다고 한탄하며 고백합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엘 예언서 9장 5절-6절)
그것은 이미 다른 예언자들도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며 왕과 지도자들의 잘못된 이런 죄를
지적했는데 다니엘은 하느님께 그들의 잘못을 용서 청하며 자비를 구합니다.
또한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유배지의 동포를 포함한 이들의 죄까지도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1)
그리고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대로 심판받고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어질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은 남을 비판하기보다 먼저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 또한 사랑에서 나오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착하고 어질며,
남의 단점을 인내할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이어서 주님의 기도에서도 용서를 청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듯이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라고 하십니다.2)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의도를 갖거나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웃의 무례나 한 마디 말에도 쉽게 상처도 받고 또 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용과 겸손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웃을 용서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6장 38절)
주님의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사는 비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베풀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읽고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참 신앙인이라 하겠습니다.
넉넉한 삶의 모습은 어떤 처지에서든 이웃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가까운 예로 행복한 부부는 서로 받기보다는 서로 베풀려고 노력하는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부에게서 진정한 행복은 혼자의 노력보다는 함께 실천할 때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좁은 집에 살 수는 있어도 속이 좁아터진 사람과 사는 것은 어렵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아무래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과는 충돌하고 함께 오랜 관계를 지속하기는 힘들지요.
신앙에서 그래도 중요한 것은 속이 넓고 자비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게 큰 그릇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 사람이 참다운 신앙인이냐?’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 하나가
‘편한 사람’. 아니면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요?
물론 여기다가 ‘진실한 사람’도 포함하면 더 좋겠지만, ‘베푸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불편하거나 차가운 사람’은 아무래도 베푸는 것은 없고 자기 가치관에 묶여
인색하거나 부자유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사 전례에서 세 번이나 가슴을 칠 정도로 우리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대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는 보며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겸손을 청하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잘못도
살피고 우리의 죄에 대한 회개를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접고 대신 그 손으로 우리 자신의 가슴을 세 번 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을 읽다가3)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은 진실한 말, 따뜻한 말, 필요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쓴 저자도 이 말의 출처가 생각나지는 않는데 20여년을 간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이 말이 하느님의 사랑이 바탕이 될 때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말로 표현하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인이라도 베풀지 않고 받는 것만을 바라는 사람도 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도‘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남깁니다.4)
그리스도교가 ‘은총’이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선행’도 신앙인의 삶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역사에서 베푸는 ‘선행’에도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부족한 가운데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베풀고 나누는 삶을 또한 가르치십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사랑의 삶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고
이웃에게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과 함께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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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오잌티르몬 에스틴(οἰκτίρμων ἐστίν)’처럼.”에서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자비와 측은한 마음이 나오신다.
유학(儒學) 사단(四端)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롭지 못함과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오지심(羞惡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다. 이것은 인간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중에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은 어진 마음(仁)과 연결되는데, 복음은
‘사랑’을 가리키고 동양의 가르침은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2)
주님께서 ‘심판하지 마라(크리네테 κρίνετε)’. ‘단죄하지 마라(카타디카제테 καταδικάζετε)’. ‘
용서하라(아포뤼케헤스테 ἀπολύετε)’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다.
그래야 그 결과로 ‘심판받지 않고.’ ‘단죄 받지 않으며’.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하신다.
부족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범할 빠져들 들 수 있는 잘못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의 참다운 단계에 우리가 이르러야 가능할 것이다.
3) ‘좋은 생각’1월호(2015,48-49): 1992년 8월에 창간된 에세이 전문 월간지.
4) 사도 바오로가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전에(사도행전 20장 22절)
에페소 원로들과 작별하기 전에 했던 말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20장 35절)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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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다니엘 9,4ㄴ-10 루카 6,36-38
남는 장사
다니엘의 삶이 돋보이는 것은 이방인의 땅에 끌려간 포로의 신세로 살았던 그의 처지에서는
하느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일이 여의치도 수월하지도 않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늘 성경을 펴 놓고, 주님의 말씀을 곰곰 마음에 새겼다고 하니(9,1-3 참조)
다니엘의 올곧은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기준하여 살려고 했던 그의 뚜렷한 심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싶어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다니엘이 바친 기도를 들으시고 서둘러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어 응답을 들려주셨던
하느님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햇수가
일흔 해라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던 것이니까요.
인간은 모두 예배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만 예배 대상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믿는 대신 세상에 보이는 것을 숭배하고 믿도록 하는 사탄의 계략은
곧잘 먹혀들어서 세상이 온통 죄로 물들게 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에 유혹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탄의 말에 혹한 까닭입니다.
참 하느님이신 그 분을 예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우상을 예배할 때 끝은 허망하고 악합니다.
인생이 덧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헛된 우상을 향했던 결과를 토로한 것이라 싶습니다.
값비싼 것으로 치장하면 달라질 것이라 여기고 명예가 높아지면 다른 사람으로
변화될 줄로 착각하고 권력을 누리게 되면 전혀 다른 삶이 보장될 줄로 생각하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니까요.
우리의 약점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오늘, 매우 간단하게 죄를 피하고 또 이길 수 있는
비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이를 행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힘도 시간도 혹은 물질도 그 무엇도 필요한 것이 없다 하시니까요.
다만 생각 하나를 버리고 마음하나 바꾸면 족한 일이라 일깨우십니다.
허다한 조상의 죄를 아뢰고 모든 세상의 죄들을 고백했던 다니엘은
그 누구를 원망하지도 탓하지도 않았던 까닭이리라 싶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하려고 죄에 빠진 인간을 위해서 대신 인간이 되셨던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보답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나 쯤, 마음 한 번쯤 바꿔보기를 강권해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삶이 다니엘처럼 남을 원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다만 그분을 닮아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할 때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품에 담아 주실 것이라니, 정말 크게 남는 장사입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겠습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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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야고보 신부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다니엘 9,4ㄴ-10 루카 6,36-38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마태오 복음에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들었고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들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완전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다.
이분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이다.
자녀는 부모의 품성을 이어받는다. 즉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
따라서 내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면 나에게 완전하신 아버지, 자비로운 아버지의 품성이 있고
그 영이 나에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하느님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녀이니까.
그럼 자비로운 아버지란 어떤 분이신가?
"자비로운 아버지"란 부성과 모성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의 품성은 부성과 모성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래서 완전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전달해주시어 우리와의 부자관계를 맺게 해주신 아버지이시다.
즉 당신 생명의 씨앗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를 양육시켜 주시고 우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신다.
한편 하느님은 우리를 낳아 주시는 어머니이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낳아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귀염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부성과 모성을 겸비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것이다.
이 사랑은 오직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신 사랑이시고 자비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를 낳아주셨고 길러주시는 아버지요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은
자비의 근원이 "너희가"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이시다." 이라는 뜻이다.
즉 자비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의 근원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나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고
반드시 자비의 원천이신 아버지와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즉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비의 원천이신 아버지로부터 자비의 선물을 받아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원칙에서 그 다음 구절을 보면 하느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라는 말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주지 못한다."
왜 그런가? 자비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처럼 부성과 모성애가 없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심만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며 그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고자 한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왜 그런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느 자식이라도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고, 어느 자식도 미워하지 않는다.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고 모두가 서로 화목하게 사랑하며 지내기를 바라고
어떤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용서해주신다.
자신들은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해도 땀흘려 지은 농사를 자식들에게 보내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런 행위를 하지 못한다.
그것은 부모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요, 사랑이다.
이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부모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식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은혜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부모의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사람의 마음에선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도 비록 당신을 배반하는 제자일지라도
그리고 당신을 향하여 욕하고 침뱉고 창으로 찔러대는 병사들도
그리고 당신을 사형에 처하는 빌라도도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단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라고 끝까지 용서하시고 마침내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의 마음에는 부성과 모성애의 한없는 자비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은 자비로움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하나의 원칙이 세워졌다면 이 원칙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이 나와야 한다.
그 다음 말씀은 바로 이런 원칙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제시해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남을 심판하는 일과 단죄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자비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남을 제대로 심판할 수 없다.
우리가 남을 심판할 때 그 심판의 기준은 자비가 아니라 자기 이익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심판하고 단죄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심판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심판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 단죄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심판에는 한계가 있다.
심판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심판은 완전하신 아버지만이 올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베푸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잘못 심판하고 단죄함으로써
내가 받는 고통과 억울함이 많이 있듯이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을
잘못 심판하고 단죄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아야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베푸는 일이다.
그것이 곧 나의 잘못을 끊임없이 용서해주시고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는 것이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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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효재마리아(수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