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훈 토마스 신부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미야 17,5-10 루카 16,19-31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며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자신의 관심사에 집중하느라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하며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어떤 가치로,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집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서 언제나 먹을 것을 구걸하며 너무나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라자로를 보았지만, 그런 라자로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뿐입니다.
부자는 죽어서도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마름과 고통,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의 집 앞을 지나가셨다면 무엇을 보셨을까요? 당연히 라자로를 보시며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주셨거나,
그것도 아니면 함께 이야기라도 나누셨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을 하실 수는 없으셨더라도
그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려면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것만을 채우고자 하는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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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미야 17,5-10 루카 16,19-31
복음서에서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사람 전부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복음서가 언급하는 이름은 그 이름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는 흔히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로 불립니다.
라자로는 엘아자르의 축약형으로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을 지닙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라자로와 ‘어떤 부자’입니다. 비유에서 아브라함과 어떤 부자가
직접 대화하지만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라자로만이 언급됩니다.
이미 ‘라자로’라는 이름에서부터 비유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드러납니다.
비유 안에서 화려한 차림의 부자와 온몸이 종기투성이인 라자로에 대한 묘사는 현세에서
드러나는 부와 가난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상황은 다릅니다.
라자로는 복된 모습이지만 부자는 고통을 겪는 듯합니다. 비유가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현세의 상황과 반대로 된다는 것을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라자로는 오직 이 한 가지
희망을 가졌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자의 잘못은 라자로로 대표되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처럼 보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아니라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바른길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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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미야 17,5-10 루카 16,19-31
천국에는 이름이 없는
오늘 복음의 얘기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서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 무조건 갈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진복 팔단의
가르침대로 살아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천국에서도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끝부분을 보면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말하지요. 자기처럼 자기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하는데 죽은 라자로가 가야 회개할 거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이 회개할 죄는 아니지요.
회개는 죄에서 회개하는 것이지 행복에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지요.
회개해야 할 죄는 이 세상 행복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도 갈망하지도 않은 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지도 갈망하지도 않은 이유는 오늘 예레미야의 말처럼
하느님보다 사람에게 의지하고 자기 힘과 돈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지옥에 있을 때처럼 이 세상에서 천국의 물 한 방울을 갈망했다면
지옥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사는 동안은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았고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은 이유는 이 세상사는 동안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며
만족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점이 회개해야 할 행복이고 죄스러운 행복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회개해야 할 그의 죄라면 다음으로 부자가 회개해야 할 죄는
라자로와의 관계입니다.
갈망하지 않은 죄가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 단절의 죄라면 사랑하지 않은 죄는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 단절의 죄입니다.
복음의 부자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부자 이기주의의 전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모두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만 부자들의 이기주의는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 아는
뻔뻔스러운 이기주의입니다.
그가 지상에서 살 때는 라자로와는 전혀 아는체하지 않았고
그의 고통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완전한 단절의 삶을 살았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봤지만 보고도 못 본 체했을 것입니다.
보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못 본 체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마음 밖으로 라자로를 밀어냈을 겁니다.
그런 그가 지옥에 있을 때는 너무도 뻔뻔스럽게 라자로를 끌어들입니다.
그를 시켜 물 한 방울이라도 축이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애원합니다.
그리고 라자로의 고통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눈이
여전히 사랑치 않은 자기 죄는 보지 못하고 자기 고통만 보고 봅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의도적으로 라자로에겐 이름을 붙여주고
부자에게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고 그저 부자라고만 합니다.
천국 명부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는 뜻일 텐데
나 김찬선이는 천국 명부에 이름이 있을 건가?!
나 김찬선은 오늘 복음의 그 부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