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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
(1)
1년 7개월 뒤.
일찍 저녁을 먹고 난 최반장은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사무실에 앉
아 서류철을 뒤적이고 있었다. 방배동 K빌라의 방화사건에 대한 감
식기록이었다. 그는 서류를 몇 분 동안에 걸쳐 대충 훑어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어둠이 천천히 깔리기 시작
하는 온 도시가 뿌옇게 보였다. 황사현상이었다.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몇 시부터 잠복을 나가랍니까?"
저녁을 먹고 들어오던 조형사였다. 그는 약 1년 전 최반장이 A경
찰서에서 S경찰서로 전근을 올 때 유일하게 같이 발령이 났던 사람
이었다.
"9시가 좀 넘으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자구."
"젠장, 사제폭탄테러에 불특정다수에 대한 동시다발성 방화라
니... 이러다 남아나는 놈 하나도 없겠네."
조형사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대상을 알 수 없는 불만을 토로
했다. 그것은 방화범이나 테러범에게 하는 불만이 아니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과다한 업무를 지시하는 상부에 대한 불만 같았다. 그
러나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는 어쩔 수 없는 형사였다. 그는 자리
에 앉기도 전에 다시 업무에 대한 질문을 했다.
"동일범일까요?"
"아니, 아닐 거야. 하나는 무작정 일을 저지르는 불특정다수에
대한 방화범이고 하나는 목표를 정해서 테러를 가한 지능범이야.
단순히 범행방법만 봐도 동일범의 소행 같지는 않아."
범행은 방배동을 중심으로 해서 그 일대의 고급주택가를 배경으
로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어떤 종류의 쇠붙이를 이
용해, 길가나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량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 놓
는다든지 바퀴를 펑크 내는 정도였었다. 그러나 곧 범죄가 대담해
져 길가에 주차해 놓은 차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거나 심지어는 주
택가에 화염병을 던지고 달아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날마다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경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
키면 그 동네는 한동안 잠잠해지고, 대신 다른 곳에서 사건이 일어
나곤 했다. 그렇다고 경찰들이 사시사철 거리에서 살 수만은 없었
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능력과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때
방화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다시 범행이 저질러질 때까지 기다리며
날마다 잠복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거리가
조용해지면 자동으로 경계를 풀게 되고, 그러면 다시 사건이 벌어
지곤 했다.
모방범죄인지, 조직적인 계획범죄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둘이
혼합된 복합적인 범죄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범인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매복을 하고 있던 경찰들이 A동네에 불을 지른 한 놈을
잡고 나면 그 시각에도 B동네에서 다른 방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B
동네에 불을 지르고 있는 놈을 검거하고 나면 이번엔 그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G동네에서 다시 방화가 시작되었다. 게다가 잡히는 놈
들을 보면,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는 애송이 모방범죄자들 뿐이어
서 사건을 예방한다든지 해결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되었다.
날이 갈수록 이 범죄는 전국적인 범죄로 번져 가고 있었다. 연예
인 연쇄살인사건의 여파인지, 그 사건이 연일 방송을 탄 이후 방배
동 일대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범죄는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이어지
며 서서히 서울의 전 지역으로 번지더니, 드디어는 전국의 대도시
여기저기서까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었다.
방화를 유도하는 세력은 방배동 일대를 무대로 하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전국 경찰에 수사비상배치가 하달되어 거리에 경찰들이 깔리면
범죄는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경찰에 잡혀 중형을 선고받을 것을
두려워해 모두가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경찰의 경계가 느
슨해지면,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방배동 일대에서 다시 처음으로
방화가 일어났다. 그러면 그것이 매스컴과 소문을 타고서 전국적으
로 번져 갔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그때부터 사회에 대한 불
만세력들이 다시 방화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그 심리는, 앞장
을 설 용기는 없지만 남이 하면 그 분위기에 편승해 따라 할 수는
있다는 그런 군중심리로 보였다. 말하자면, 방배동을 무대로 하는
방화범들은 고의적이며 전문적인 조직이고 그 나머지는 분위기에
편승해 범죄를 저지르는 모방범죄자들이었다.
S경찰서는 이 전문방화범들을 잡기에도 허리가 휘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며칠 전에 하나의 강력사건이 더 일
어난 것이었다.
사제폭탄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부상만을 입은 가정부의
증언에 의하면, 그것은 한 남자가 K빌라의 모 사장 집에 모 기업의
전무가 보낸 선물이라며 외제의 고급전화기와 양주병들을 가지고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집에 들어온 사장은 선물의 포장지를 풀어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에 드는지 콧노래까
지 불러 가며 직접 새 전화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나서 양주병 중
하나를 들고 상표를 확인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는 가
정부가 받았다. 집주인의 이름을 대는 상대편의 목소리에 가정부는
전화기를 그 사장에게 넘겨주고 평상시처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집주인은 전화를 받을 때 누가 옆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가정부로서는 그런 집주인의 버릇이 무척이나 다
행스런 일이었다. 곧바로 엄청난 소리를 내며 전화기가 폭발했던
것이다.
"놈은 김사장이 직접 전화를 받도록 하고 나서 전화기에 설치되
어 있던 사제폭탄을 터뜨렸어. 감식결과를 보면 놈은 삐삐를 이용
했던 것 같아.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만든 사제폭탄을 삐삐와 함
께 전화기 속에 설치해 놓아, 삐삐에 신호가 가면 그 진동으로 전
원이 이어지고 뇌관이 폭발하도록 만들어 놓았던 거겠지."
"전화를 걸어서 김사장을 바꿔 달라고 한 뒤, 김사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삐삐를 쳐서 폭탄을 터뜨린 것이군요. 그렇다면 발화는 어
떻게 된 것이지요. 폭발의 위력이 가스관까지 미치지는 못한 것으
로 보이던데..."
폭발에 이어 연속으로 발생한 방화에 대한 질문이었다.
"다이너마이트만을 폭발시키면 그 폭발이 순간적이고 너무 강해
웬만한 인화물질엔 불이 옮겨 붙을 수 없지. 오히려 일어났던 불도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으로 진화가 되곤 하니까. 외국에서는 한때
산불을 다이너마이트로 끄기도 했다더군. 그래서 범인은 인화의 매
개물질로 독한 양주를 같이 보냈던 거야. 폭발에 의해 반기체상태
가 되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양주에 불이 옮겨 붙도록... 어쩌면
양주병에 술이 아닌 순수 알코올이나 휘발유, 또는 그 외의 강한
휘발성 물질이 들어 있었을 지도 모르고..."
"아르헨티나의 유태인회관 폭파사건, 뉴욕의 지하철 폭탄테러,
일본의 오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테러, 그리고 오클라호마 연방건
물 폭탄테러, 파리의 지하철 폭탄테러 등 그런 일들은 우리와 먼
나라의 얘긴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그와 유사한 테러들이 우리 나
라에까지 밀려오고 있는 건가요?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참."
조형사가 혀를 차며 최반장의 책상으로 와 감식보고서를 받아 들
고 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반장님, 전환대요."
전화를 받았던 조형사가 최반장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강력1반 반장 최순석입니다."
"여보세요. 저, 김세준입니다. 생각나십니까?"
김세준이라는 말에 최반장은 잠시 생각을 했다.
"아-, 김세준 박사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런데 어쩐 일
로?"
"한국에 왔다가 뵙고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여기, 경찰서 근
처인데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물론, 그래야죠."
약속장소가 정해지자 최반장은 벗어 놨던 외투를 걸치며 시계를
봤다. 야간근무를 나가기까지는 한두 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다.
*
경찰서 앞의 다방에 들어서자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몇 명
의 낯익은 동료직원들이 최반장에게 인사를 해댔다. 최반장은 인사
말대신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실내를 둘러봤다. 정장을 한 채
로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않아 담배를 피고 있는, 다방 분위기에 전
혀 어울리지 않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준이었다. 그런
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최반장이 세준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
가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여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뜻
밖에도 그녀는 가은이었다.
"어서 오세요!"
세준과 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최반장을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는 세준과 가은을 최반장은 번갈아 가며 쳐
다봤다.
"결혼을 했습니다."
세준은 대답을 하며 가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예에-, 결혼요?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요. 남녀가 만났으니 결혼을 할 수도 있는
거죠."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그런데 언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최반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가은이 참고 있던 웃음을 드디어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세준이 장난을 치고 있는 거예요."
세준이라니? 최반장은 또 한번 놀랐다.
"어떻게 된 거죠?"
"역시, 제 생각대로 였습니다. 유전자 감식결과 강진숙, 즉 누나
와 내가 쌍둥이였다는 것이 밝혀진 거지요. 그래서 여기 있는 가은
과는 사촌이 되었구요. 참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
로 돌아간 뒤 제가 그 논문을 발표하자 FBI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일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같이 일해 볼 생각 없냐고... 그렇게 돼서
저는 FBI의 행동과학팀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몇 달 전 어느 날은
어떤 일 때문에 생물학연구소에 제 유전자검사를 의뢰해야 할 일이
있었죠. 그 유전자검사의 결과가 나왔을 때 불쑥 그 사건이 떠오른
겁니다. 이모와 이모부, 가은은 이 김세준이 절대 강거북일 리 없
다고 했지만, 그래도 제 마음의 한 구석에는 석연치 못한 점이 남
아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내친 김에 FBI의 컴퓨터를 연결해 그
때의 자료들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지 찾아봤죠. 당시, 한국 경찰
이 각국에 수사협조를 요청하며 수사자료들을 각국의 수사기관에
배포했다는 점에 착안해서 말입니다. 생각대로 였죠. 필요한 모든
자료들이 아직도 고스란히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일
종의 지문과도 같은 유전자를 비교해 본 결과 누나와 내가 쌍둥이
로 밝혀진 것이죠."
"그렇게 된 것이군요."
세준은 고개를 끄떡이다 힐끔 가은을 쳐다봤다. 그리고 나서 어
려운 질문을 세준에게 했다.
"결과는, 감식결과는 이란성이었습니까? 아니면..."
그 질문에 세준도 가은을 돌아봤다.
"질문을 하는데 그렇게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가은
도 다 알고 있으니까요."
수줍은 소년처럼 세준은 한번 빙그레 웃고 나서 말을 이어나갔
다.
"일란성이었습니다. 둘이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죠."
"일란성이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
최반장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일란성 쌍둥
이가 어떻게 이성(異性)일 수가 있으며, 또 어떻게 그렇게 다른 모
습을 하고 있을 수 있는지... 제가 누군지를 알고 난 뒤, 그것 때
문에 저도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각국의 수많은 의학
자료를 찾아보고 또 수많은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조언도 구했지요.
그러나 모두 헛수고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방법으로, 결국 저는 뿌
리를 찾아 나섰죠. 그리고 거기서 해답을 얻었습니다. 저와 누나가
성장한 고향에서 말입니다. 그 산파가 아직도 살아 있었기 망정이
지..."
세준은 고향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들은 자신의 집안 내력과 당시
의 분위기, 사건, 그리고 자신을 받아 냈던 이제 팔순이 된 산파에
게서 들었던 얘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최반장에게 들려줬다.
"결국은 대를 있기 위해, 미신을 믿고 그랬던 거군요."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아들 아들 하던 이유도
결국은 그 대를 잇는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듯..."
"그럼 강진숙 씨의 그 외모는요?"
"그건 아마도 자기암시와 최면, 클리네펠터 증후군, 성적정체감
으로 인한 성전환수술과 성형수술, 또 장기적인 여성호르몬 주사에
서 비롯되었던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 최반장은 다시 세준과 가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세준이 침묵을 지킨 채 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할말
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그를 누나라고 부르죠? 남자였다면..."
"외형적으로 타고난 성징이 아닌, 더 근본적인, 유전적인 것을
보면 꼭 남자라고 하기도 어렵죠. 차라리 중성이라고 하는 편이 옳
을 겁니다. 그런데다 스스로 여자이길 원했고, 또 후천적이긴 하지
만 성전환수술까지 했으니 이제는 정신과 육체 어디를 봐도 여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죠."
"한날 한시에, 똑같은 유전자, 똑같은 세포에서 똑같이 시작했는
데 어쩌다 한 명은 범인들을 좇는 FBI의 수사연구원이 되고 다른
한 명은 그런 킬러가 되었을까요? "
최반장의 목소리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하나의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수도 없는 원인
이 있어야 가능할 겁니다. 어떤 남자가 실연을 당한 분풀이로 술을
먹고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을 때렸다고 합시다. 이 일이 있기 위해
서는 수많은 조건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얽히고 설켜야만 가능할
겁니다. 만약 그 때린 남자가 딴 여자를 사귀어서 그때 시련을 당
하지만 않았더라도, 그가 술을 먹지만 않았더라도, 때린 사람과 맞
은 사람 중에 한 명만 그 시간에 거기에 있지 않았더라도, 때린 사
람의 타고난 심성이 착하다든지 교육을 제대로만 받았더라도... 더
세밀히 들어가서, 그 남자가 실연 당한 이유를 살펴봅시다. 그가
능력이 없어 여자에게 잘못 보였거나, 타고난 것이 못났거나, 가진
재산이 없었거나 하는 등등의 이유가 있었겠죠. 만약 그 남자가 능
력이 없어서 실연을 당한 거라면, 그 남자를 유능하지 못하게 한
수도 없는 원인이 있을 겁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유전적인 요소,
수많은 환경요소 등등이 유기적으로 작용해 그를 그렇게 만들었겠
죠. 또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요건 중에 하나인 그 남자를 버린
여자를 살펴보면, 그 여자가 무능한 남자를 싫어하게 된 이유가 있
을 겁니다. 그녀 자신이 무능해서 무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든
지, 가난이 지겨웠다든지... 그녀 자신이 가난해서 그런 거라면 그
녀를 가난하게 만든 수많은 여건이 또 있을 테구요. 이렇게 나가면
하나의 행동을 일으키게 한 조건이 얽히고 설켜서 거미줄처럼 퍼져
나갈 겁니다. 비약해서 생각하면, 그 하나의 행동에 전국민이 간접
적인 영향을 끼친 요소로 등장할 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에게 영향
을 주는 큰 환경 중의 하나인 친구는 또 다른 친구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 친구는 또 다른 친구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테고... 마치
도미노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가, 광범위한 환경인 우
리가 결국은 누나를 여자로 만들었고, 역시 킬러로 만들었겠죠."
세준은 잠시 숨을 돌렸다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것을 바꿔 얘기하면, 유전과 환경이 평범한 누나가 아닌 킬러
의 누나를 택한 것이죠. 환경과 유전은 인간 각자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꿀 수 있는 요소도 아니니까요. 누나는 인
과관계의 법칙대로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난 원
죄에 의해 천형을 받고 있는데, 신이 내린 그 벌이 바로 인간들에
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결국은 원죄라고 할 수밖에 없는 타고난 죄를 가지고 신이 내린
벌이 바로 죄를 짓는 것, 죄를 지음으로써 벌을 받고 있다는 아이
러니컬한 얘기군요."
"그렇죠. 타고난 것 때문에 죄를 짓는데, 그런 죄를 짓는 것이
불우이웃돕기처럼 떳떳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녀가 데이
트라도 하는 것처럼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
아요. 누구든 죄를 지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죠. 그러니
벌일 수밖에..."
"..."
"우리가 믿고 있는 신의 구원을 떠나서,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여건,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동료직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자 최반장은 시계
를 봤다. 근무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가은 씨는 그 뒤 강진숙 양의 연락을 한번도 못
받았나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없었습니다."
가은은 말을 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희들이 최반장님을 찾아온 이유도 바로 그 것 때문입니다. 혹
시 누나에 대한 새로운 단서라도 발견한 것이 있나 해서..."
"유감이군요. 저희들도 전혀 없습니다."
"..."
최반장은 다시 시계를 봤다.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일이 있어서 이만 들어가 봐야겠군요. 그럼 또..."
최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준과 가은에게 악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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