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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열왕기상18장30~46절
제목 : 엘리야의 기도, 하나님의 응답
엘리야가 아합에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요청하여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송아지 한 마리를 잡고 제단에 불이 네리기를 종일 외치고 춤추고 자해하기까지 했지만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백성들을 모이게 하고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수축하고 참신이 누구냐하는 물음에 하나님이 스스로 입증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고 약속대로 비를 내려 주십니다.
1. 열두 돌로 다시 쌓은 제단(30~35절)
1)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오라하여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합니다(30절)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 엘리야가 이처럼 백성들을 가까이 오라고 부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됩니다.
(1) 이제까지 바알 제단 근처에 모여 있던 백성들을 여호와의 제단 주위로 불러 모으기 위함입니다.
(2) 이제부터 시도하려는 자신의 모든 행위(32-39절)에 어떠한 협잡도 없음을 명백히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Hammond).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 '수축하다'는 '고치다'는 뜻입니다.
즉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서졌던 것을 고쳐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갈멜산 상에는 일찍이 여호와의 제단이 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서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음을 증거해 줍니다(4절; 19:10).
*4절 “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따라서 갈멜 산의 여호와 제단도 이때 헐렸다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
2) 엘리야가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돌 열두 개를 취합니다(31절).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돌 열두 개를 취하니. - 여기서 엘리야의 행동은 약속의 땅 입성시의 여호수아의 행동과 비슷하게 보입니다(수 4:9).
*수4: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그런데 북왕국의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엘리야가 이처럼 '돌 열둘'을 취하여 돌단을 쌓은 것은 매우 의미 심장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12:24)) 그들 모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음을 엘리야는 바로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왕국분열 이래로 멸망에 이르기까지 두 왕국은 한 번도 재통일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앗시라아에 포로로 잡혀간 북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부분은 영원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못 한채 이스라엘 집안의 '잊혀진 열 지파'로 사라져갔습니다.
하지만 '열 두 지파 온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열 두 사도'의 터전 위에 건축된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창 35:9-12; 삼하 7:16; 계 7:4-8).
*삼하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을 각성하게 하는 여러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야곱, 이스라엘, 여호와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선 '야곱'(Jacob)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한 조상에서 비롯된 혈통적 단일성을 가진 존재들임이 부각됩니다(창 35:22-26).
그리고 그 야곱이 '이스라엘'(곧 민족의 이름이 된)로 불리는 것(창 32:24-28)에서는, 이스라엘(Israel)민족이 여호와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백성임이 강조됩니다.
즉 이스라앨 민족은 소명의 주체이신 '여호와'를 섬길 때에만 민족적 정기를 흐리지 않는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출 19:5, 6).
*출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3)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도랑을 만듭니다(32절).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 원문 '브쉠 여호와'는 단순히 '여호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hovah)라는 뜻입니다.
즉 '의지하여'는 해석상 추가된 말입니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굳이 '여호와의 이름'과 관련 엘리야의 단 쌓는 행위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단이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여호와께만 드려지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름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게 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24절 주석 참조.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쌓은 단은 다른 어떤 것과도 동일시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됩니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본절은 '여호와께만 봉헌하기 위해', 혹은 '여호와만을 기념하기 위한'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곡식 종자 두 세아. - '세아'(Seah, 창 18:6에는 '스아'로 번역되어 있음)는 구약 시대 당시 고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입니다.
1세아는 1/3에바(Hphah)로서 약 7.6리터 입니다.
그러므로 '두 세아'는 약 15리터 정도의 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용납할 만한. - 두 세아 정도의 곡식을 부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으로 봅니다.
4)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부으라고 합니다(33절).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 레 1:3-9에는 소(혹은 송아지)를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경우에 관해 수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때에는 제단에 장작을 펴 놓고 그 위에 각을 뜬 제물을 벌여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엘리야는 그 같은 율법의 규정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부으라. - 여기서 말하는 '통'(카드)이 얼마 만한 용량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괄팔스틴 여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물 항아리(17:12, 14, 16; 창 24:43, 45; 삿 7:16, 19, 20)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절까지 살펴보면, 번제물과 나무위에는 무려 열 두 통의 물이 부어진 셈이 됩니다.
그런데 율법 규정에 있지도 않은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즉 엘리야는 이로써 인위적인 협잡의 여지가 없음을 명백히 백성들에게 인
상지우려 한 것입니다. 30절 주석 참조.
또한 이처럼 온통 물로 적셔진 제물에 점화시키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써만 가능함을 주지시키려 한 것입니다(38절).
한편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대의 이교 제사장들 중에는
제단 밑에 빈 공간을 판 뒤 그 속에서 불을 붙이고서 이를 이적이라고 속이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5) 통 넷에 물을 채워 세 번을 갔다 부었다는 것입니다(34절).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세 번째로 그리하니. – 한글 개역은 자칫 두 번 물을 부은 뒤 다시 세 번, 즉 도합 다섯 번의 물붓기가 행해진 걸로 오해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은 '솰로쉬'(three), 그러므로 '쉈리쉬'(third) 세번째입니다.
그러므로 물 붓기는 도합 3회 실시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동일한 행동이 반복되는 것은 최종적이고 결론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예를 들면 레아는 3명의 아들을 낳자 비로소 야곱의 완전한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창 29:34).
또한 전장(前章)에서 엘리야가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린 것도 3회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의혹을 없애기 위한 물 붓기는 3회로 그 의미롤 충분히 달성한 것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 혹자는 4통씩 3회의 물 붓기로 도합 열 두 통의 물을 사용한 것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기 위한 의도적인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하튼 극심한 가뭄 중에(17:1, 7) 이러한 열 두 통의 물은 과연 어디서 길어 온 걸까?
혹자는 이를 지중해에서 길어 온 바닷물로 추측하지만(Mattew Henry),
그보다는 갈멜산 옆을 통과하는 기손시네에서 길어 왔으리라는 추측이 더 유력합니다. 19절 지도 참조.
왜냐하면 수많은 지류에서 물을 공급받는 기손은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물줄기이기 때문입니다(Beek).
6)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습니다(35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 원문에는 '제단 으로'란 말에 '주위', '주변'을 의미하는 '사비브'가 부기(附記)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단 주위에(물이) 두루 흐르다'는 뜻입니다.
즉 많은 물을 들이부은 결과, 돌로 쌓은 제단(33, 34절)이 온통 물이 줄줄 흐르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형편에서는 이교 제사장들이 제단 밑에 한 사람을 숨겨 불붙이는 것과 같은 속임수는 참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Stanley).
2.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36~40절)
1)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가 기도를 드립니다(36절)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1) 엘리야가 기도를 드리는 때입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말입니다.
그런데29절에서의 시점이 본절에 중복되는 탓에 독자들은 약간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30절 이하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모든 행동이 바알 선지자들의 광란이 계속되는 중에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별 무리가 없습니다.
(2)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① 먼저 하나님을 부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라 할 조상들입니다.
그런데 그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를 각별히 호칭하는 이유가 의미 심장합니다.
즉 여호와는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으로 자신을 선포하셨습니다(출 3:6).
*출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그 결과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계약 관계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라고 믿는 한 파기(破棄)될 수 없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무엇이 되지 않는 한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 뿐이십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야는 본절에서 야곱의 이름조차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된'이스라엘'로 호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31절 주석참조.
② 엘리야의 기도는 세 가지 요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하나님이신 것과’
둘째, 엘리야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라는 고백,-‘내가 주의 종인 것과’
셋째, 엘리야 자신의 모든 행위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특징을 띱니다.
사실 엄청난 이적이란 이적 자체와 그것을 행하는 자가 크게 부각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애초에 이적도, 이적을 행하는 자신도 단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과 공손함은 그가 본절에서 사용한 '종''(에베드)이라는 단어 속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에베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겸손히 옆으로 비켜 선 엘리야의 참된 선지자적 모습을 보여 준다 하겠습니다.
2) 엘리야는 응답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37절)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응답하옵소서'는 26절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아나'입니다.
그런데 본절은 '아나'가 두 번 반복되어 기도의 간절함을 보여줍니다.
사실 바알 선지자들의 광란의 기도(26-29절)에 비하면 엘리야의 기도는 서운할 정도로 짧습니다.
그러나 그 간명(簡明)한 기도 속에는 진실되고 순전한 정열과 굵직한 뚝심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마 6:7).
*마6:7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치 사랑하는 자식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진 어버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단한 한 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는 진심이 깃들어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절의 엘리야의 기도는 중언부언하지 않고 하나님께 꼭 아뢸 것만 진실하게 구한 기도였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삼상 1:9-18 강해, '기도와 기도의 응답'을 보다 참조하라.
되돌이키심. - 이에 해당하는 '사바브'는 마음이나 자세의 변화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된 변화의 상태를 지시하는데 자주 쓰입니다(대하 29:6).
*대하29:6 “우리 조상들이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려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
본절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은총의 회복, 즉 백성들의 회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3)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모든 것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38절).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의 '여호와의 불'이란 '번개'와는 다른 초자연적인 불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한편 구약시대 당시 하나님께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불을 내리셨습니다.
(1) 당신의 언약을 보증하실 때(창 15:17),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세울 때.
*창15: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2) 하나님께서 친히 현현하실 때(출 3:2), -모세에게.
*출3:2 “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실 때(출 9:24)
*출9:24 “ 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 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
(4) 인간(아론)의 제사를 열납하실 때(레 9:24)등입니다.
*레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 여호와의 불에 의해 살라진 것은 번제물 뿐 아니라 이처럼 나무, 돌, 흙까지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점을 강조해 줍니다.
(1) 여호와의 불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를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2) 동시에 거기에는 어떠한 협잡의 여지도 없었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입니다.
사실 제단 밑에 사람을 숨겨 불을 붙이는 협잡으로서는 도저히 이만한 화력(火力)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33주석 참조.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 여기서 '핥은지라'(라하크)는 불길이 혀처럼 널름거리며 도랑물을 증발시키는 장면을 잘 표현해줍니다.
3) 모든 백성이 보고 하나님을 인정합니다(39절)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본절에는 '여호와의 불'의 이적을 접한 당시 백성들의 경악과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요소가 두가지 있습니다.
(1) 즉각 엎드린 점.
(2)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명쾌한 시인을 거듭 반복한 점입니다.
이러한 백성의 모습을 21절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선명히 느껴집니다.
*21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그것은 마치 졸음이 쏟아지는 한낮에 느닷없이 떨어진 폭탄의 광음을 듣는 충격과도 같습니다.
4) 엘리야가 그들에게 바알의 선지자를 잡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입니다(40절)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바알(Baal)이 거짓 신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백성들은 엘리야의 명령에 따라 바알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기손시냇가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일견 지나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호와의 공의(公義)를 나타내는 일이었기에 필요 불가결하였습니다.
즉 이 일은 하나님의 계명(신13:6-9; 17:2-7)에 대한 순종 행위였던 것입니다.
저들에게 이르되...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 엘리야의 승리는 너무도 완벽혀여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로서도 항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엘리야로부터 달아나려 했을 터인데 이들을 막기 위해서 이제 엘리야는 백성의 무리를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손 시내.-여기서 '시내'(나할)는 '강'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한편 기손 강(Kishon Brook)은 므깃도 근처의 여러 샘들로부터 발원하여 갈멜 산맥과 나란히 걸쳐진 에스드렐론 광야를 흐릅니다.
이 강은 갈멜 산 근처에서 제법 넓은 폭을 유지하기도 하는데 대개 건기(乾期)에는 폭 100m 이하의 작은 강이됩니다(Beek).
따라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당시는 극심한 가뭄 중이었던 점(5절;17:1-7)을 고려하면 '시내'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기손 강은 과거 사사 시대 당시 바락이 시스라를 무찔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곳으로도 유명합니다(삿 5:19-21).
3. 비를 내리신 하나님(41~46절)
1) 엘리야가 아합에게 큰 비 소리가 있다고 알립니다(41절).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올라가서. - 이 말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기손 시내에서 갈멜 산 어디쯤엔가 설치되어 있을 왕의 장막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는 말입니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아합은 갈멜 산상의 대결 현장과 기손 시내의 바알 선지자 처형 현장에 내내 동참했던 모양입니다.
먹고 마시소서. - 아합은 대결의 긴장감 때문에 온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음식을 권하는 이 말에는 '이제 더 이상 근심하지 마십시오'하는 어감(語感)이 들어 있습니다.
원래 사람이 음식을 끊는 것은 슬픔, 근심 등을 표하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아합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은 그러한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한편 그 동안 아합에게 직접적인 근심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가뭄일 것입니다(5절).
그러나 엘리야가 보기에 그 가뭄이란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계일 뿐입니다(17:1).
따라서 우상 숭배자들을 처단한 현시점에 있어서는 곧 가뭄이 끝나리라고 엘리야는 확신한 것입니다.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여기서 '소리'(콜)란 말은 원래 '음성' 혹은
'목소리'라고 해야 더 적절한 단어입니다.
즉 이는 '누구의 음성에 귀기울이다'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창 4:23; 21:12; 삼하 22:7).
아무튼 본절은 엘리야가 믿음의 귀로써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43-45절).
2) 아합이 먹고 마시러올라가고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기도합니다(42절).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땅에 꿇어 엎드려. – 야고보는 본절과 관련, '엘리야는...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약 5:17, 18)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사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의 실현을 위하여 다시금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기다리는 행동(롬 4:19, 20)과 기도함으로써 그 실현을 응답받은 행동의 두 가지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 엘리야는 이처럼 땅에 무릎을 꿇는 정도에서 지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는 깊숙한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풀이합니다.
(1) 복종을 표현하는 무릎 꿇음과 겸손을 표현하는 깊숙한 머리숙임이 결합된 자세로서 그 기도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행동 입니다.
(2) 외부에 대한 시각(視覺)을 차단함으로써 보다 깊숙한 내면의 기도의 경지에로 몰입해 가기 위한 행동입니다(Bahr).
3) 그의 사환에게 올라가 바다 쪽을 일곱 번까지 바라보라 합니다(43절)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바다 쪽. -갈멜 산 정상에서는 서쪽으로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바다 편'이란 바로 그 지중해 쪽을 의미합니다.
일곱 번. - 히브리인들의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 '7'은 하나님의 수이자 완전한 승리의 수로 쓰입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 차인확인해 보라 지시한 것은 곧 기도의 씨름에서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결의의 표시이자 하나님께서 끝내는 응답하시리라는 완전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4) 엘리야는 일곱 번째이르러서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난다는 보고을 듣과 아합에게 비에 막히지 하니하도록 내려가게 합니다(44절).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사람의 손 만한. - '손'으로 번역된 '카프'는 오히려 '손바닥'(palm)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손'을 가리키는 단어는 '야드'입니다.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손바닥 만한'으로 적절히 번역하고 있습니다.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 '막히다'에 해당하는 '아차르'는 '꼭 닫다', '기다리게 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많은 비로 인해 보행을 방해받는 광경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양의 비를 예상하는 것은 그만치 확고한 엘리야의 확신을 보여줍니다.
한편 기손 강은 갈멜 산 바로 아래로 흐르며 여러 갈래의 시내가 합류되어 있습니다. 40절 주석 참조.
따라서 큰비가 내릴 때에는 기손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 일대는 통행이 불가피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아합을 염려하여 길이 막히기 전에 갈멜 산에서 떠나도록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과 그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그들을 위하는 자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17절).
따라서 아합은 이제 지난날의 과오를 깨끗이 청산하고 여호와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본분으로 돌아와야 마땅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집요하게도 고집하였으며 끝내는 참혹한 말로 맞기에 이르렀습니다(22:38).
*22: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함으로써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아가는' 패역한 자의 전형을 발견하게 됩니다(롬 2:4, 5).
*롬2:4,5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5) 조금 후에 큰 비가 내리고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갑니다(45절)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조금 후에. – 이는 곧 큰비가 올 것에 대비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다 저편의 손바닥 만한 구름(44절)이 얼마나 급속도로 폭우로 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르엘. - 과거 솔로몬의 다섯번째 행정 구역에 속하였던 성읍으로서 아합, 아하시야, 요람 당시 왕의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왕하 9:15).
이곳은 갈멜 산 동남방 20여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곧 길보아 산 부근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 성읍은 이스르엘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한편 훗날 아합은 이곳 이스르엘(Jezreel)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음으로 더욱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습니다(21장). 4:12 주석 참조.
6)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습니다(46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 원문을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여호와의 손이 엘리야에게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원문에는 '여호와의 능력'이란 말이 '여호와의 손'(야드 예호와)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를 '주님의 손'(the hand of the Lord)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Living Bible은 의미를 충분히 살려 본절을 '주께서 엘리야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다'(the Lord gave special strength to Elijah)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호와의 손'이란 다름 아닌 엘리야를 아합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게 한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동이고. - 달리는 데 지장이 없도록 긴 옷의 아래부분을 묶었다는 말입니다(출12:11).
한편 비유적인 의미로 '허리를 동이다' 말은 어떤 행동을 위해 자신을 긴장시킴으로써 준비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렘 1:1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12:11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 엘리야는 이스르엘 성읍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그 어귀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아합의 반응을 면밀히 주시 하기위해서였던 동시에 이세벧의 격노를 예상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합이 홀로 도회하기에 급급한데서 우상 숭배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그의 의도가 이미 여실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합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존경하였다면, 그는 에디오피아의 내시처럼 엘리야를 마차에 동승시켰을 것입니다(행 8:31).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 갈멜 산에서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질러 이스르엘 성읍 어귀까지 이르는 길의 거리는 대략 22.4km입니다.
이 거리를 엘리야는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이나 마차 앞에서 달리는 것은 시종(侍從)이나 심부름꾼의 위치를 자처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엘리야 역시 아합의 종으로 처신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이제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이 증명되었음을 시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때 아합은 그 인물 자체의 도덕적 평가를 떠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상징적 의미로서만 기능합니다.
즉 갈멜 산 대결 현장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전령의 위치에 앞세웠다면 그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 신인가를 결정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이심이 판결났다는 뜻이 아닌가?
바로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아합의 앞에서 달리면서 나름의 축하 행진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하나님이 능력을 행하시기에 불가능한 상황은 없습니다(32b~35절).
엘리야는 제단 주위에 넓게 도랑을 파서 번제물과 나무 위로 열두 통이나 되는 물을 붓습니다.
나무로 쌓은 단이며 제물이며 온통 흠뻑 젖게 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시기에 더 불리한 상황을 연출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는 ‘자충수’로 보여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승부수’로 바꾸십니다.
2)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여 참 신임을 입증하십니다(38~40절).
사실 백성들이 인정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참 신이었고, 애초부터 바알은 인간의 헛된 기대와 두려움에 기생하는, 인간이 만든 신이었을 뿐입니다.
우상을 곁에 둔 채 믿음과 섬김을 다짐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임을 깨달았다면 이와 상관없는 헛된 믿음의 흔적을 어서 제거하십시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엘리야는 백성을 불러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돌을 취해 제단을 쌓습니다(30~32a절).
방치된 제단은 백성의 무너진 신앙과 단절된 신앙의 전통, 잊힌 언약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분열의 아픔을 통감한 엘리야는 간절한 회복의 열망을 담아 모든 백성이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도록 의식을 치릅니다.
정직한 ‘돌아봄’없이는 제대로 된 ‘돌아섬’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간절한 회개기도가 아닐까요?
2) 엘리야의 기도는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36,37절).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것과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바알 선지자들과 달랐습니다.
주문을 외워 신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나를 증명하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기도였습니다.
3) 엘리야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비를 확신합니다(41~46절).
비가 올 징조가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한 것은 비를 주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현실은 기도를 무력하게 하지만 주의 약속은 기도를 늘 견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