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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기성 서북단 모서리 지점에서 서쪽 통영시 방향을 내려 본 모습. |
섬 산행의 맛, 한려수도의 멋
언제, 어느 곳을 가더라도 산행은 늘 행복하다. 잠깐 사이 피부 위로 솟아나는 땀은 내가 살아있다는 안심이 되어 만족스럽고,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은 마치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작은 보상인가도 싶다. 필자는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산행의 참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산행 중에서도 섬 산행은 더욱 각별하다. 가령 비슷한 풍치나 고도라 하더라도, 물빛과 하늘빛이 이루는 색감의 대비와 조화를 상상해 보라. 수평과 수직의 교차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긴장감 또는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삼는 풍광은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번 산행은 바다 건너 섬나라로 향했다.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 그러나 지금은 구 거제대교, 신 거제대교, 그리고 거가대교로 연륙되어 섬이라고 부르기가 다소 애매해진 섬, 거제도를 대상지로 삼았다.
거제도의 행정적 구분은 경상남도 거제시다. 부산광역시를 동북 방향으로 두고, 김해시, 창원시, 고성군, 통영시 등과 연접하고 있다. 거제시는 11개의 유인도와 51개의 무인도를 합쳐서 하나의 시를 구성하고 있다. 기상이 좋으면 동남쪽에 있는 대마도가 가시권에 들어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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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기성 남동 방향으로 남도의 산과 골짜기와 섬들이 겹치며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
최초의 한려해상국립공원
우리나라 남해안에는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있다. 공원 범위는 남쪽 거제 지심도에서 여수 오동도에 이른다. 거제, 통영, 사천, 하동, 남해, 여수 오동도 등 6개 지구로 나뉘어 있다. 전체 면적 535.676㎢ 중 해상면적이 76%를 차지하며, 해양과 도서 및 육지가 빚어내는 아기자기한 지형 경관이 뛰어나서 매년 100만 명 이상의 탐방객이 찾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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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시설인 집수지. 산성 중앙부에 원형으로 석축을 둘러서 조성했다. |
한려수도라는 이름에서 줄어든 ‘한려’는 한산도의 '한'자와 여수의 '여'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그 뒤에 붙는 ‘수도’는 뱃길이란 뜻이다. 예로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의 거주가 활발했고, 배를 통한 이동도 많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며, 동시에 자연풍광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한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다도해·비진도·한산도·거제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 장군의 유적도 도처에 널려 있다. 기후가 온화해서 동백나무·비자나무·유자나무·풍란 등 난대성 식물이 자생하고 있기도 하다.
6개 지구 중 거제해금강지구는 거제시 동남해안과 가왕도·대덕도·갈곶도·장사도·장병태도 등을 포함한 지역이다. 기암괴석이 이루는 해안절벽이 특히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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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기성의 남쪽 성벽은 급경사지를 지나는 탓인지 붕괴의 정도가 특히 심각하다. |
거제도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거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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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신라에 의해서 조축될 당시, 기반부에 증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는 시굴호. |
거제도에 대한 역사적 확인은 신석기 시대까지는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지역에서 이렇게 이른 시기부터 인간의 거주가 확인되는 것은, 인간 생존에 필요한 좋은 환경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중국의 고문헌인 <삼국지 위서〉에는 ‘변진두로국(弁辰瀆盧國)’이 나오는데, 다산 정약용은 일찍이 거제도를 고대국가 두로국으로 추정하였다. 다산은 그의 저술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거제도의 지세가 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양이라서 신라 문무왕 때 이곳의 이름을 ‘상군(裳郡)’으로 정했다고 나온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과 부합되는 면을 짚어낸 것이다.
둔덕기성 아래 평지지역인 둔덕면 거림리, 마장리 등에서 발굴된 고고학 유물들도 거제의 오랜 역사를 확인해 준다. 1996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로 확인된 바,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유물 중 ‘상사리(裳四里)’라는 명문이 출토되어 거제 역사와 관련된 몇 가지 의문점이 해소되었고, 이곳이 고려 이전의 거제도 치소라는 것도 분명해졌다. 고려 의종이 무신란을 통해 폐위되어 거제로 유폐되는 과정의 기록이나, 이 지역 이름 등을 통해서도 많은 가설들이 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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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기성 성벽의 북쪽 구간. 성에서 가장 높은 부분이이서 사진 왼쪽으로 있는 바다 견내량 쪽의 움직임을 쉽게 감시할 수 있는 요지다. |
의종(毅宗, 1127-1173)은 인종이 사망한 후 왕위를 바로 승계했으나, 이자겸의 전횡 및 묘청의 난, 그리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강성 등으로 권위가 위축되어 갔다.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해 보기도 했지만 그 결과는 극히 미미했다. 마침내 1170년, 문인들에게 눌려 소외되고 있었던 이의방·이고 등 무인들이 정중부를 내세워 정변을 일으켰다. 아우인 명종이 무인들에 의해 새로운 왕이 되었고, 의종은 거제지역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때 그가 머물렀던 곳이 바로 이 둔덕기성이라 전한다. 물론 둔덕기성이 이때 처음 세워진 것은 아니다. 7세기 경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확인된다. 의종은 무너진 이 성을 재축 또는 개축하고, 약 3년간 여기에 머물렀다.
특이한 일은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기록에는 둔덕기성이라는 명칭 대신 온통 ‘폐왕성(廢王城)’이란 이름이 쓰였다. 아마도 민간인들이 쓰던 비공식적인 명칭을 일제 관리들이 의도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역사적 실상과 거제와의 관련은 지명에서도 다양하게 확인된다. 예컨대 ‘둔덕’이란 이름은 그때 경영되던 ‘둔전’에서 유래된 것이고, ‘거림’은 둔덕기성 주변에 형성되었던 무성한 숲에서, 그리고 ‘마장’은 몽골 치하에서 제주도가 그랬던 것처럼 종마장이 운영되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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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둔덕기성 북벽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보이는 440m 높이의 우두봉과, 그 옆 뒤쪽으로 보이는 440m 높이의 최고봉 산방산. |
한편 신라 경덕왕 때 상군에서 거제군으로 개명되었던 명칭이 고려 때는 ‘기성현(岐城縣)’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둔덕기성 이름에 반영되었다. 이후 거제는 통영이나 거창, 진주 등에 부속되는 등 더 복잡한 변화를 거치는데, 조선 태종 때인 1415년이 되어서야 ‘거제현’으로 환원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며 거제는 왜구의 약탈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선은 공도정책을 써서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다가 세종 4년, 대마도 정벌 후에야 육지에 소개했던 주민들들 다시 되돌아가게 했다. 조선 세조 때에는 거제에 수영을 비롯한 군영이 설치되었고, 성종 때에는 이른바 ‘7진’을 두어 군사적 요지로 중시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거제는 몇 번의 획기적인 변화를 겪는다. 임의로 짚어 보자면, 첫째는 한국동란 중 포로수용소가 운영된 일이다. 1951년 들어선 포로수용소는 휴전까지 인민군 포로 15만 명, 중국군 포로 2만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의 포로들을 수용하였다. 둘째로, 대규모 조선소들이 들어와 조선사업의 중심지가 된 일이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등이 거제시에서 조선 사업을 전개해 한국이 ‘세계 최대의 조선국’으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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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지를 통과하여 집수지 쪽으로 이어지는 둔덕기성 내부 탐사로. |
둔덕기성의 정확한 위치와 현황
둔덕기성은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산 95번지 일대에 위치한 둘레 526m의 석축산성이다. 붕괴된 부분이 많지만, 분명한 성의 윤곽이 남아 있다. 성의 입지나 형태가 당대 관방 이론이나 전술 원칙을 충족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그러나 아직도 정밀한 발굴조사와 복원과정이 남아있는 만큼, 원형을 훼손할 위험이 있는 무분별한 답사는 제한되고 있다.
둔덕기성이 위치한 입지조건을 좀 더 자세히 보면, 거제도 전체를 모음 ‘ㅓ’ 자 형태로 본다고 할 때 앞으로 튀어나온 짧은 부분에 사등면과 둔덕면이 위치한다. 거제시의 서부권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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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결과, 둔덕기성 중심부에는 중요한 건물이 위치했었음이 확인되었다. |
바다 건너 서쪽에는 통영시가 있다. 통영시 용남면이 동쪽으로 돌출되어 거제시 사등면과 최단거리를 형성한다. 견내량을 사이에 두고 그 최단거리를 이은 것이 바로 신·구 두 거제대교다. 통영시 용남면의 바로 남쪽은 통영읍이다.
거제시의 서부를 형성하는 사등면과 둔덕면은 산세에 의해서 그 경계가 나뉜다. 507m 높이의 산방산을 주봉으로 하는 전체 산세 중에서, 북단에 속하는 우두봉이 동서로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연결이 경계선이다. 이 산세의 전체적인 흐름은 산방산~대봉산~백암산~명등산~우두봉~둔덕기성~별학산~안치봉으로 아주 길게 이어진다. 이 산세는 크게 남서방향으로 열려져 있으며, 그 입구에 해당하는 둔덕면 하둔리 쪽은 온전한 평지다.
산방산의 높이는 507m, 대봉산에서 우두봉까지 봉우리는 고르게 400m대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둔덕기성이 326m, 그 이하 남쪽으로 흐르는 별학산과 안치봉은 340m 정도다. 그러니까 이 산방산 산세는 크게 엎어진 ‘U’자형이고, 주봉인 산방산은 왼쪽인 동쪽 중간부에 치우쳐 있다. 반면에 둔덕기성은 이 엎어진 ‘U’자형 산세의 바닥에 해당하는 우두봉 오른쪽 안부를 약 1km 지나서, 돌출된 낮은 봉우리를 깔고 앉은 타원형 석성이다. 성과 별학산과의 거리도 1km 정도 되며, 이 역시 중간에 안부가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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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둔덕기성 동남부 연결 성벽의 아래 있는 등산로(임도)에서 위로 성벽을 올려다 본 모습. |
둔덕기성 자세히 둘러보기
둔덕기성으로 오르는 방법은 크게 거제대교를 타고 들어온 다음 만나는 오량교차로에서 시작하는 것과, 둔덕면 소재지인 하둔리 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있다.
오량교차로 기점은 둔덕기성을 남쪽에 두고 북쪽에서 시작해서 성을 향해 올라가는 방법이다. 교차로를 내려와서 국제친환경농장 건물 앞 길가에 설치된 등산로 안내판을 보고, ‘고려촌 문화 체험길’이란 표시를 따라 임도를 오르면 된다. 안내판에는 둔덕기성까지의 거리가 3.76km, 약 1시간 45분이 소요된다고 적혀 있다.
오량교차로에서 마을 쪽으로 더 들어가서 신광사 절이나 오량저수지를 경유해 오르는 방법도 있다. 길들은 모두 임도로 이어져 있어 승용차로 가기에는 조금 버겁지만, SUV 차량이라면 어려움이 없다.
둔덕면 쪽도 다를 것이 없다. 관내 버스 정류장을 타고 청마로를 따라오다가 청마 생가와 갈리는 교차로에서 반대쪽으로 걸어 오르면 된다. 거림소류지를 지나 성문까지 역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되고, 거리는 4.5km쯤 된다.
둔덕기성의 통행문은 동문이다. 우두봉과 갈리는 안부에 주차장이 있고, 여기서부터 남서방향으로 가까운 거리에 동문지가 있다. 동문은 현문식 원형에서 나중에 문루가 있는 형태로 변화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닥 위로 통행로가 형성되어 있을 뿐, 문루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동문지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새로 복원된 것이다. 그 성벽을 따라서 안쪽으로 통행로가 잘 형성되어 있다. 끝 지점에는 집수정도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곳은 이것이 전부다. 아직도 시굴구가 여기저기에 노출되어 있어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는 것도 감동이다.
통행이 가능한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돌다보면, 남·서·북문의 위치는 각각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북쪽 고지에 있었던 망대지에서는 사방으로의 조망이 가능하다. 특히 서쪽으로 보이는 통영 쪽 경치가 압권이다. 그곳에 서서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다 문득 가는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고려 의종의 탄식인지,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인지 모를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Information - 교통
서울 쪽에서 거제로 가는 교통축은 1번 경부고속도로와 대전-통영을 연결하는 35번 중부고속도로다. 진주~고성~통영을 거쳐 거제대교를 타고 거제도의 서부인 사등면 쪽으로 이어진다.
부산에서는 가거도를 경유하는 거가대교를 타고 거제시 북부인 장목면 쪽으로 접근할 수 있다. 서울에서 거제도로 가는 버스는 남부터미널(02-521-8550)에서 출발하는데, 거제 고현시외버스터미널(1688-5003/055-635-5102)까지 하루 31회 왕복한다. 거제 시내를 운행하는 관내교통은 거제시 버스정보시스템을 이용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수인 객원기자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