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님이 떠나신 후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국내외적인 조건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의 목회자들이 후임으로 청빙됐다. 허나 모두들 여러 이유로 얼마가지 못해 낙마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정치적인 요인도 있었고 목회자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 영락교회의 '한경직 신드롬'도 무시하지 못한다.
목회자 개인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에 들어가면 한경직 목사의 리더십 공백을 메우지 못한 후임목회자의 역량에 있다 할 수 있다. 사실 박조문 목사는 교회를 대거 부흥시켰는데도 낙마하고 말았다. 당시 정부의 정치적 희생물이라고는 하나 더욱 근원적인 요인은 당회와의 갈등에 있다.
박조준 목사는 교회도 부흥시켰고 역사의식도 한경직 목사를 앞섰다. 얼마 전 KBS에서 방영한 '한국교회 위기인가'에서 볼 수 있듯 한경직 목사는 전두한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조찬기도를 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템플턴 시상식에서 신사참배를 했다고 고백한 사람이다. 그러나 박조준 목사는 당시 서슬 퍼런 현 정부에 대해서 역사의식을 갖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와 같이 그는 역사의식도 있고 교회도 잘 성장시킨 유능한 목회자였지만 한경직 목사의 근면 검소, 절약, 청빈, 영성 등 개인적인 목회윤리에서 한경직 목사를 앞설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개척한 갈보리교회에서 잘 증명이 됐다.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개인적인 재정비리나 도덕성에 관한 문제는 계속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락교회 당회는 교회를 부흥시킨 박조준 목사의 탁월한 역량과 불의에 항거하는 역사의식을 보지 않고 한경직 목사의 삶과 영성을 보았기에, 박조준 목사가 영락교회에서 낙마한다는 것은 이미 예측된 일이다. 그 이후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나 박조준 목사보다 학력이나 약력에 있어서 뛰어난 국제 변호사이자 구약학 교수인 김윤국 목사를 세웠지만, 계약관계를 위반하면서까지 그를 낙마시키고 말았다. 이는 미국사회와 영어에 익숙한 김윤국 목사의 외적인 학력과 약력은 한경직 목사를 뛰어넘는 것이었지만 설교나 삶에 있어서 역시 한경직 목사를 능가하지 못했기에 교인수가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1년 만에 낙마하고 임영수 목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임영수 목사는 영성목회라는 독특한 접근으로 시도를 했고 삶과 경건, 영성에 있어서 한경직 목사 못지않은 훌륭한 면이 있었지만 교회성장에 있어서는 한계에 부닥치고 말았다. 즉 삶은 한경직 목사 이상이었지만 설교나 교회성장 능력이 한경직 목사에게 미치지 못했다. 결국 영락교회를 자의반 타의반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이철신 목사가 대신했지만 실제 부목사의 임명이나 교회 성장의 여러 요인으로 당회와 마찰이 계속 이뤄졌다. 결국 여러 면에 있어서 한경직 목사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에게서 한경직 목사의 설교나 삶, 리더십을 찾아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영락교회를 보면서 영락교회가 한경직 목사의 신드롬을 버리지 않는 한 어떤 목사가 와도 영락교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경직 목사와 같은 삶을 실천하는 목사가 오면 한경직 목사의 설교나 교회성장 능력을 요구하고, 한경직 목사보다 역사의식이나 교회성장 능력이 뛰어난 목회자가 오면 한경직 목사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틈을 이철신 목사가 메우는 것은 적잖은 무리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철신 목사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하여 개인의 역량으로 교회를 이끌어가기 보다는 자신의 목회 스타일과 색채가 잘 맞는 시내산 출신 부목사들과 함께 오순절 스타일의 영적인 힘을 갖고 집단적 리더십을 갖고 이끌어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것이 한경직 목사가 없는 틈을 메울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거목 밑에서는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영락교회가 한경직 목사의 신드롬을 버리지 않는 한 어떤 목사도 영락교회를 이끌고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