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신동집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고
(시집 『누가 묻거든』, 1989)
[어휘풀이]
-포들한 : 부드럽고 도톰한
-찹잘한 : 차갑고 달착지근한
-또아리 : ‘똬리’의 잘못. 갈큇발의 다른 끝을 모아 휘감아 잡아맨 부분
[작품해설]
이 시는 오렌지를 소재로 하여 존재의 본질을 추구한 주지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사물의 외면과 내면적 의미를 대조시켜 존재의 참다운 본질 파악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렌지는 김춘수의 시 「꽃」에서의 ‘꽃’과 같이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관념적 사물을 상징할 뿐이다.
1연에서는 의미 이전의 사믈 그 자체로서의 오렌지를 묘사한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은 가공하거나 꾸밀 수 없는 것이므로 본질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또한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은 내가 사물의 존재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할 때만 사물도 나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그 바탕에는 내가 대상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심리뿐 아니라, 나의 존재 의미도 대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2~3연에서는 ‘나’가 인식하는 단순한 외형적 사물로서의 오렌지를 보여 준다. ‘오렌지의 껍집을 벗기’거나 ‘속살을 깐’다는 것은 오렌지의 겉모양이나 색깔 등의 외면만을 파악한 것일 뿐, 오렌지의 본질을 파악한 것은 아니다. 본질은 도외시한 채 사물의 외면만 관심 갖는 그읏된 인식 태도를 지적한다. 4연에서는 존재의 본질로서의 오렌지를 보여 준다. ‘나’가 오렌지를 파악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는 주체적 존재로 ‘이미 오렌지가 아닌’것이 되어 ‘나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오렌지는 무엇이다.’라고 ‘나’가 정의하는 순간, 이미 오렌지는 그 정읭하는 상관없는, 생명을 가진 본질적 존재로 되돌아가 나-생명을 가진 또 다른 존재-와 대치한다. 5연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나’의 고민을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라는 것은 오렌지의 본질ㅇ르 파악하는 것이 끝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는 ‘나’가 당혹에 하고 절망하는 모습이다. 오렌지도 나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당혹해 하고 절망하르로 ‘마찬지가 위험헌 상태다’. 따라서 ‘아’와 오렌지는 서로를 경계하고 대립하는 상대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몰라 당혹해 하고 절망하는 속에서 시간은 존재의 본질에 대해 아직 깨닫지 못하는 ‘나’와 ‘오렌지’를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뱁처럼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6연에서는 당혹과 절망이 계속되는 어느 순간, 사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보여 준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서 오렌지와 ‘나’의 긴장은 계속되고 있지만, ‘나’가 오렌지의 본질을 어렴풋이 인식함으로써 긴장 해고의 계기가 된다. 그러나 내게 존재의 본질을 알게 해 줄 것 같던 그 존재는 ‘어진 그림자’만 보여 줄 뿐, 아직 완전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렌지를 ‘한없이 어진’ 존재라고 한 것은 ‘나’가 찾고 싶어하는 해답을 제공해 줄 것 같기 때문이며, ‘그림자’로 표현한 것은 아직 완전한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막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회의로 시작된 이 시는 한 가닥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존재의 본질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해 준다.
[작가소개]
신동집(申瞳集)
본명 : 신동집(申東集)
현당(玄堂)
1924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및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 수학
1948년 시집 『대낮』을 발간하여 등단
1954년 시집 『서정의 유형』으로 아시아 자유문학 수상
1980년 한국현대시인상 수상
198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198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시집 : 『대낮』(1948), 『서정(抒情)의 유형(流刑)』(1954), 『제이(第二)의 서시(序詩)』(1958), 『모순(矛盾)의 물』(1963), 『들끓는 모음(母音)』(1965), 『빈 콜라병』(1968), 『새벽녘의 사랑』(1970), 『귀환』(1971), 『송신(送信)』(1973), 『신동집시선』(1974), 『미완(未完)의 밤』(1976), 『장기판』(1980), 『진혼(鎭魂)⸱반격(反擊)』(1981), 『암호』(1983), 『신동집시전집』(1984), 『송별』(1986), 『여로(旅路)』(1987), 『귀환자』(1988), 『누가 묻거든』(1989), 『백조의 노래』(1990), 『고독은 자라』(1990), 『목인의 일기장』(1993), 『시인의 출발』(1993), 『예술가의 삶』(1993), 『그리고 싶어여』(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