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자
가장 안전해 보이는 순간에 침묵하면
그 침목 자체가 압박이 통하는구나라는 신호로 읽힙니다. 그 신호는 다음 논란에서 다른 창작자들을 더 빨리 더 일찍 입 다물게 만듭니다. 스스로 검열하게 하죠.
이 검열의 진짜 효과는 한 번의 사건을 막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올 발언을 미리 위축시키는 데 있어요.
저쪽의 힘이 조직화에서 나온다면 답은 이쪽도 조직화하되 그 방향이 공격이 아니라 엄호여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저 질문일 뿐이라는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면 전쟁을 치르는 건 저들 혼자가 되고 그 과잉 자체가 저들의 약점으로 알아서 드러납니다.
학교 폭력에서 일진이 한 사람을 지목해서 좌표를 찍으면 조무래기들이 우르르 달려가 때리고 괴롭힙니다.
그 지목이 정당한지는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일진이 찍었다는 사실 자체가 공격의 허가증이 되는 거죠.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라는 공동체가 불안해 처했을 때 진짜 원인을 겨누는 대신 상대적으로 약하고 반격할 힘이 없는 대상에게 그 폭력을 집중시킨다고 썼어요. 희생양 메커니즘이죠.
이러한 모든 소동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박정희라는 인물의 서사가 얼마나 취악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정말 튼튼한 건 이야기 하나로 흔들리지 않아요. 흔들릴까 봐 미리 막으려는 태도야말로 그 취약함의 증거입니다.
왜 이렇게 극단적 소수는 늘 시끄럽고 합리적 다수는 조용할까요?
몇 가지 이유가 겹칩니다.
손실을 막으려는 동기는 이득을 지키려는 동기보다 훨씬 강합니다. 박정희 지지층에게 이 영화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핵심 서사, 정체성의 일부를 빼앗기는 일이에요. 반대로 건국 전쟁을 보고 웃어넘긴 사람들에게 그 영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지킬 게 있다고 믿는 쪽이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법이죠.
또한 시끄러운 소수는 합리적인 다수보다 조직화하기가 쉽습니다. 이해관계가 좁고 강하게 집중된 소수는 이미 연결된 조직과 채널을 갖고 있어서 동원 비용이 낮아요. 반면 그 정도면 그냥 영화지 하고 넘어가는 다수는 애초에 뭉칠 이유도 채널도 없습니다.
조용한 것은 동의해서가 아니라 나설 동기가 없어서인 경우가 많아요.
진보진영이 건국 전쟁에 법적 조치를 하지 않은 건 단지 무관심해서가 아니에요.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을 자기 진영에도 동일하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블랙리스트와 검열의 피해 당사자였던 역사를 가진 쪽은 같은 무기를 상대에게 되돌려 쓰는 일에 대한 내적 제동이 더 큽니다. 원칙을 지키는 쪽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조용해 보이고 원칙 없이 힘으로 누르려는 쪽은 그래서 더 시끄러워 보입니다.
스웨덴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의 2026년 민주주의 보고서는 2025년 기준 전 세계 민주주의 수준이 1978년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밝혔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권위주의 국가가 92개국, 민주주의 국가가 87개국으로 독재 체제 국가가 더 많은 상태가 2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 후퇴가 좌우 대칭이 아니에요. 우파 포퓰리즘이 압도적으로 주도하는 비대칭적 현상입니다.
영화를 입틀막 하려는 이들의 방식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입니다.
시장과 표현의 자유를 짓밟으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고 믿는 것. 그것이 이들의 가장 깊은 자기모순입니다.
좌파와 우파라는 말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국민의의 좌석 배치에서 나왔습니다. 왕정과 기존 질서를 지키자 하는 쪽이 의장석 기준으로 오른쪽에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쪽이 왼쪽에 앉은 데서 비롯됐죠. 이후 두 세 개 넘게이 말은 하나의 축으로 정리되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좌파라는 단어는 오로지 상대를 공격하고 혐오하기 위해 쓰입니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 즉 분당과 냉전 반공 교육을 거치며 좌파라는 말 자체가 경제 정책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시험하는 도구로 변질된 겁니다. 더 우스운 건 한국에서 좌파라 불리는 이들조차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전혀 좌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서구에서 보수주의는 전통과 공동체, 점진적 개혁이라는 뚜렷한 철학적 뼈대를 가진 사상입니다. 에드먼드 버크(보수의 품격) 일례로 급격한 변화보다 검증된 질서를 지키자는 입장이고 그 질서를 왜 지켜야 하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운동가 김병국은 한국 보수주의가 그 성찰의 과정 자체를 건너뛰었다고 짚었어요.
근대화에 대한 성찰과 반성 없이 국가주도 경제 성장과 방공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것이죠. 힘에 의한 파시즘적 통치에 익숙해졌을 뿐 자신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과정 자체가 부족했다는 말입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도 같은 역설을 짚었어요. 한국의 수많은 정당이 보수를 표방하지만 정작 학계에서는 한국의 진정한 보수주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한국 보수의 아이러니라고 짚죠. 한국 보수 최대의 적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를 참칭하는 유사 보수주의자들입니다.
전통과 질서를 지키는 진짜 보수의 태도라면 적어도 하나는 지켜야 합니다.
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내 편이든 내 편이든 똑같이 적용하는 겁니다.
진짜 보수주의라면 지켜야 할 전통과 질서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건 반공주의와 독재 시대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뿐입니다.
그러니 더 정확한 이름은 안보 보수 혹은 권위주의적 반공보수입니다.
가치를 지키는 가치 보수가 아니라 안보 불안을 동안 수단으로 쓰는 보수라는 뜻입니다.
한국 정치를 가장 정확히 가르는 축은 좌파 대 우파가 아니라 자유주의대 권위주의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가해자가 자신의 과을 깨끗이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 현대사는 정반대였죠.
침묵으로 지나갔다면 한 편의 영화로 남았을 것이 이렇게 논쟁이 일고 힘으로 억압하려고 하면 한 시대의 상징으로 남습니다.
억압이 지우려 한 것을 오히려 역사에 새기는 역설이 됐죠.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고 권력은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 합니다. 그러나 힘없는 민중은 멈추지 않고 질문하고 진실을 구합니다. 이 장봉화와 같은 무고한 희생자, 경호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파면된 수십 명의 경찰관, 동이일보에서 해직된 113명의 기자들처럼 목소리도 얼굴도 이름도 끝내 지워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지운 건 서슬 퍼런 군부 독재였죠. 그러나 그 시대와 맞서 싸운 이들이 있었기에 유신은 영원하지 못했고 서울에 봄을 지나 광주를 돌고 돌아 그 싸움은 결국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기나긴 투쟁의 결과로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아래에서이 영화를 보고 마음껏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챕터 9: 우리는 제대로 질문하고 있는가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을 부추이고 있는 2026년의 조중동 극단주의 종교계열 언론사 기자들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권력의 개가 되었을 겁니다.
표현의 자유에는 상호성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는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
배우를 좌표 찍어 집 앞으로 몰려가고 사상을 검증하고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조리돌림하는 이 방식은 정작 저들이 가장 증오한다고 외치는 공산주의 체제의 통치술과 정확히 같습니다.
사상을 검멸하고 전향을 강요하고 대중 앞에 끌어내 공개로 망신 주는 방식이죠. 북한의 공개 비판 투쟁과 중국 문화대혁명식의 홍위병의 인민재판이 그랬습니다. 반공을 외치는 이들이 막상 반대자를 다루는 방법이 북한이나 중국 공산당의 방식을 그대로 베껴 쓰고 있는 거죠.
2015년 영화 암살에는 밀정 염석진이 나옵니다. 해방 후 동지를 팔아넘긴 이유를 추궁받자 그는 이렇게 변명합니다.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그는 일본의 지배가 영원할 거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를 배신자로 만들었고요.
영원한 권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예술은 깁니다.
그래서 극단주의자들은 사력을 다해이 영화 암살자들을 멈추려는 겁니다. 그들 또한 그 예술의 힘을 알기 때문이죠.
박정희의 독재를 부정하고 그를 미화하고 추항하는 극단주의자들은 지금 허수합이 때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던지는 것과 주장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이 전면전이야말로 자신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질문을 가장 크게 외치는 확성기가 되고 있다는 걸 그들은 모르나 봅니다.
바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의 역설'입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이미 코끼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육영수를 쏘지 않았다고 반복해서 외칠수록 이 대중의 머릿속에는 역설적으로 어 진짜 박정희가 쐈나라는 의심이 자라게 돼요.이 부인이 질문을 만드는 겁니다. 침묵이 가장 안전했을 자리에 그들은 지금 계속해서 스스로 의심의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다.
같은 밤 정반대로 움직인 사람들도 있었어요. 정병주 특전 사령관을 지키려다 반랑군의 총탄에 쓰러진 김오랑 중령. 국방부 지하벙커를 사수하며 끝까지 무장 해제를 거부하다 전사한 정선엽 하사. 영화 서울의 봄에서 배우 정애인이 연기한 오진호소령의 실제 모델이 바로 김오랑 중령입니다. 2026년 10월 1일 제78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두 사람에게 충무 무공 혼장이 수여됐습니다. 전사 47년 만이었어요.
도망친 자는 영화 속자로 기억되고 맞서다 죽은 자는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야 국가의 최고 예우를 받습니다.
누가 역사에 더 가까이서 있었는지는 결국 이렇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한복판에 있어요.
먼훗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이 123 내란 전후 상황과 작금의 블랙 코메디 같은 현실이 영화로 만들어질 날이 올 겁니다.
그 영화 속에서 저는 그리고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인물로 묘사될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gJWgkVN1YYI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3gZPUwZZ8Zg
육영수 피살 사건, 모든 의문점과 의혹을 파헤친다. - 황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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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0Y2B1IyJgG8
육영수 저격 진범 따로 있다. - 경찰 감식 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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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shorts/7NGxVLhLF6w
육영수 저격 사건에 대해 북한이 사과했다고? 쌩거짓,
박근혜도 사과받은 적 없다고 증언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