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만천구만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오만가지의 성질과 성품, 스타일과 개성으로 살아간다. 나는 어떤 색깔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색깔의 마음이 가장 좋은 것일까?
아무리 많은 색깔의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보면 세상에는 두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뉜다. 엄밀히 분류하면 사람과 부처로 나뉘게 된다. 사람은 감정으로 살아가고 부처는 감정이 멸도(滅度)된, 이름하여 중도(中道)의 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는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중도(中道)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렇게 여여(如如)할 뿐이다.
또 사람은 감정의 업(業)을 크게 가진 사람과, 감정의 업(業)을 작게 가진 사람으로 나뉜다. 감정이 클수록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이 크고, 감정이 작을수록 고락(苦樂)의 업(業)이 작다. 고락(苦樂)의 업(業)이 큰 사람은 좋고 즐거운 마음도 크지만, 싫고 괴로운 마음도 크다. 또 고락(苦樂)의 업(業)이 작은 사람은 좋고 즐거운 감정도 작지만 싫고 괴로운 마음도 작다.
고락업(苦樂業)의 감정이 큰 사람은 천상에 있을지라도 좋고 싫은 감정이 크게 나타나고, 고락업(苦樂業)의 감정이 작은 사람은 지옥에 있을지라도 좋고 싫은 감정이 작다. 다만 좋고 싫은 때의 시절인연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므로, 좋은 업(業)이 나타날 때는 극락이 되고, 싫은 업(業)이 나타날 때는 지옥이 된다.
사람들은 무조건 좋은 조건을 가지려 한다. 하지만 인과(因果)로 인하여 싫고 나쁜 조건의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는 것을 간과한다. 이를 여실히 잘 아는 이를 보살(菩薩), 연각(緣覺), 성문(聲聞)이라 한다. 그러므로 감정을 잘 절제할 줄 안다. 그러나 잔업(殘業)이 아직 남아 있으므로 부처는 아직 아니다.
따라서 생활을 하면서도 나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살펴야 한다. 어떤 조건과 인연에 의해 감정이 좋아져서 즐겁고 기쁜 마음이 든다면, 인과(因果)를 관(觀)함으로써 다음에 괴롭고 슬픈 과보(果報)가 생길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채야 한다. 그래서 즐거움이라는 분별심(分別心)에서 벗어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또 싫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는 인과(因果)를 관(觀)함으로써 다음의 시절인연(時節因緣)에 즐거움과 기쁨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채서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분별심에서 벗어나 괴롭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감정이라는 업(業)의 인과(因果)를 항상 관(觀)함으로써, 오고 가는 연기(緣起)의 모습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맡겨서, 매사를 여유롭고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늘 평화로움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처님과 연기(緣起)와 인과(因果)라는 신장(神將)님께 맡기고 신심(信心)을 키워 나가야 한다.
앞의 강의에서 이 법(法)이라는 것에 대해 사상(四相)이 공(空)하고, 사상견(四相見)이 공(空)함으로써, 아(我-나)와 법(法), 득(得-얻음)과 처(處-장소), 명(名)과 설(說-설법), 해석과 지혜, 보살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공(空)하여, 중생을 중생으로 보지 아니하고, 내가 보살임을 자처하지 아니하고, 불토(佛土)가 깨끗하다는 것조차 보지 아니함으로, 일체가 아견(我見), 법견(法見)이 없을지니, 그러하게 보지 않는 그 이름을 여래(如來)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법(法)을 보지 아니함으로 보는 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다섯가지 눈이 구족(具足)하시어 어긋남이 없으시므로, 이러한 다섯가지 눈, 오안(五眼)이 계시는 것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보심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여래께서는 화신(化身)으로 관찰하시는 육안(肉眼)이 있고, 대천세계를 두루 다 보시는 천안(天眼)이 있고, 지혜가 밝으신 혜안(慧眼)이 있으시고, 모든 법(法)의 공(空)함을 아시는 법안(法眼)이 있으시며, 자성(自性)을 항상 깨치신 불안이 있을지니, 어찌 여래께서 보시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모든 법(法)의 공(空)함을 통달 요달(了達)하셨다 하더라도 그 견해(見解)가 있을 것이며, 반야지(般若智)가 항상 밝은 상명(常明)일지라도 이 또한 견해(見解)이시요, 자성(自性)을 항상 깨치고 계실 지라도 깨침으로 보는 견해가 있을 것이요, 항차 삼천세계를 보신다든가 목전의 모든 경계를 보신다든가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 않는가?
이같이 여래께서는 다섯 종류의 눈이 구족하시어 물질과 법(法)을 보시고 성품과 이치를 보시는 것이 분명 하시거늘, 어찌하여 설법하시는 모든 법(法)과 모든 법지견(法知見)이 공(空)했다고 하시었을까?
이와 같은 것들이 모든 대중들이 의심한다는 것을 미리 아시고, 이를 밝히시려고 걸리지 않는 말씀을 설토하기 위해 수보리에게 묻고 수보리의 대답을 나오게 하시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물으심으로써 이 뜻이 더욱 요긴하게 되고, 수보리는 대답을 통하여 의심나는 곳을 더욱 밝혀 나가는 효과가 생긴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오안(五眼)이 구족 하심에도 부처님께서 생각하는 오안(五眼)과 대중이 생각하는 오안(五眼)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체성(體性)은 오히려 같음으로써 도리어 실무유법(實無有法)인 줄 모르더냐? 하는 뜻이 이러한 물음에서 긴요함을 가르치심이다.
이같이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꿈을 꾸는 듯이 보이는 것은, 수보리는 체(體)를 잡아서 용(用)을 의심한 탓이요, 부처님께서는 용(用)을 잡아 체(體)를 드러내려 하심 이니, 즉 용(用)이 즉 체(體)임을 알리시려 함이다. 체(體)는 걸림이 없는 본성(本性)이고, 용(用)은 걸림 없는 체(體)가 그림자로 비친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가 실제인 줄 알고 잡으려 하지만 결코 잡히지 않는 것과 같음이다.
첫댓글 _()()()_
법문 고맙습니다.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