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302.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월요일. - 나의 됫박은?, - 오로지 사랑!.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55 추가
----------------------------------------------------
260302.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02 04:41
- 나의 됫박은?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의 사단(四端)을 얘기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네 가지 마음이라는 뜻이지요.
이 중에서 오늘은 수오지심을 얘기하고자 하는데
오늘 독서 다니엘이 부끄러움에 관하여 두 번이나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고,
부끄러운 짓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계속하겠지요.
그런데 왜 부끄러운 줄 모를까요?
그것이 부끄러운 것인 줄 정말로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부끄러운 것인 줄 알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것이 너무 큰 괴로움이기에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또 그 짓을 계속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뻔뻔하다고도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뻔뻔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뻔뻔해지면 겸손을 상실하여 자기 부끄러움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남을 심판하고 무자비하게 단죄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떻게 될까요?
남을 단죄한 그 됫박으로 단죄받을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 자비를 입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얘기한 다음 자비하심을 얘기하고,
복음의 주님도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시며 그 됫박 비유를 적절히 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 되질하면 그 됫박으로 주님께 되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됫박이 용서의 됫박이면 그 됫박으로 주님께 용서받을 것이고,
우리 용서의 됫박이 크면 그 크기만큼 주님께 용서받을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됫박이 단죄의 됫박이면 그 됫박으로 주님께 단죄받을 것이고,
또 그 크기만큼 주님께 단죄를 크게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됫박이 크냐 작으냐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의 됫박이 어떤 됫박이냐입니다.
됫박 비유는 너무도 적절한 비유이기에 저는 이에 대해 정말로 감탄하는데
우리는 다 나름대로 자기 됫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욕심 사납게 큰 됫박을 가지기보다
현명하게 좋은 됫박 곧 용서와 자비의 됫박을 가질 것이고,
혹 우리의 됫박이 나쁜 됫박이면 오늘 그것을 좋은 됫박으로 바꿔야겠습니다.
----------------------------------------------------
260302. 사순 제2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오로지 사랑!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의 정의는 본질적으로 사랑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하느님의 회복하는 정
오직 사랑-하느님의 정의는 결국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2026년 3월 1일 주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정의가 본질적으로 사랑에 기초하며, 벌을 주기보다 치유와 회복을 지향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점차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느님을 벌주시는 분으로 묘사한 구절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안에 머물며, 하느님을 점차 성장시키는 우리의 이해 과정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보복적 정의에만 집중하면 결국 자아를 만족시키는, 그러나 지속 불가능한 하느님 상을 만들게 되고, 이는 우리를 불안하고 위험한 우주 속에 머물게 합니다.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 역시 인간이 보복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적하며 율법의 한계를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드러나는 정의는 회복의 정의입니다. 유다 예언자들- 특히 모세와 이사야, 제레미야, 에제키엘, 그리고 호세아-은 아주 다릅니다. 우리가 성경의 주의 깊게 그리고 진솔하게 읽는다면 하느님의 정의가 회복하는 정의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야훼께 죄를 지었음을 꾸짖은 뒤, 곧 이렇게 선포합니다. "야훼께서 이제 너희를 더욱 사랑하시리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온전함으로 이끄시리라. 하느님께서 값없이, 믿기 어려울 만큼 풍성하고 거스를 수 없는 사랑을 너희 위에 부어 주시리니, 마침내 너희는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없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이 사랑하심으로써 '벌하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지극하고 승리하는 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이 주제를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이사야 29장 13–24절, 호세아 6장 1–6절, 에제키엘 16장(특히 59–63절), 그리고 수많은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을 그 본래의 온전한 정체성 안에서 인정하고 확증할 때 완전히 성취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승리하도록 하심으로써 승리하십니다. 이는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이기게 하여 결국 함께 승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신적 지혜를 온전히 드러내시는 모습을 봅니다. 사랑은 치유와 급진적인 용서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이루는 핵심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장 자신을 미워하고, 가장 큰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벌하고 싶어할 때 그들을 변화시키십니다. 세리 자캐오와의 만남(루카 19,1–10)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깎아내리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시며 친구처럼 대하십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마음은 열리고 변화됩니다. 그러고 나서야 자캐오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결심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전한 말씀처럼,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의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야 55,8).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우리의 좁은 생각 속으로 끌어내려, 두려움·분노·위협·처벌을 통해서만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가장 낮은 동기를 가르쳐서는 결코 가장 높은 사랑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가장 높은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하느님을 본받는 것"(에페소 5,1)입니다. 곧, 하느님의 정의는 두려움이나 보복이 아니라 사랑과 회복으로 드러나며, 그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입니다.
[역자 보충 설명: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두려움과 처벌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을 때,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만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그 사랑은 치유와 용서로 드러나며,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키는 은총의 길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리처드 로어 신부의 통찰처럼, 그리스도교가 거래적 관계로만 이해될 때 예수님의 메시지는 죄책감과 심판으로 축소됩니다. 저는 젊은 시절 그러한 종교적 메시지에서 멀리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마더 데레사의 삶 속에서 드러난 ‘변화의 그리스도교’를 발견하면서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내적 인도는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곧 ‘섬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이시며 오직 사랑뿐이십니다!
—Dave A.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Essential Teachings on Love, selected by Joelle Chase and Judy Traeger (Orbis Books, 2018), 78–79.
Image Credit: Jordan Heath, untitled (detail), 2018, photo, New Zealand,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과 호수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의 큰 분수령을 봅니다. 복수 없는 정의가 넓게 흘러가며, 우리를 우리의 상처와 원한보다 더 큰 사랑 안으로 이끌고,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초대합니다.
++++++++++++++++
숨영성 묵상글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로 온통 감싸여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말씀은 자비와 정의의 관계를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많은 설교자가 자비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의 설교나 강론이 무자비하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종교든 근본주의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비와 상관없이 오로지 정의를 추구한다면 저 세상에서 영원한 정의를 얻게 될 것이다." 라고 하거나, "자비와 사랑이 하느님의 전부라면 하느님은 불의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참된 복음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지만 고통을 겪은 이들은 자비의 참된 의미를 압니다.
홉킨스(G.M. Hopkins)가 노래했듯이 우리는 상처받은 영혼이지만 이미 우리는 그 상처를 치유할 하느님의 자비로 온통 감싸여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상처받았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로 온전히 감싸여 있습니다.
마치 공기에 감싸여 있듯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조건처럼 들립니다.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가 주는 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얼핏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자비를 제한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은 자비를 절대 제한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스스로 좁히거나 넓히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좀 더 명료하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한 말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본성의 고귀함에 따라 자기 안에 머무는 만큼 자신을 내어준다." 말하자면, 우리가 주는 정도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우리 내면의 수용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나누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 얼마만큼 받을 능력이 있는지를 성찰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고, 더 실랄하게 말하자면, 받은 것이 별로 없기에 내어 줄 것도 별로 없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깊이 새기고 그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내면에 당신 사랑을 깊이 받아들일 만한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녀 클라라는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믿는 이의 영혼이 하늘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늘들과 모든 피조물을 다 합쳐도 그 창조주를 담을 수 없지만(참조: 2역대 2,6; 1열왕 8,27), 오직 믿는 영혼만이 그분의 거처이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없는, 사랑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진리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나 또한 그를 사랑하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1.23)."(세 번째 편지 21-23)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죄나 연약함,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더 깊이 마음에 떠올리고 새기고자 한다면 우리 내면의 그릇은 조금씩 넓고 깊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 사고의 힘인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과 자비를 나눌 힘을 얻게 되는 것이고요....
사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거나 용서를 닫아버리면, 그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그릇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정의와 자비는 분리되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는 결국 사랑과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초대하는 듯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미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그 자비를 받아들이고, 그 자비를 흘려보내는 것뿐입니다."
----------------------------------------------------
260302.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그러니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제 안에 심으신 당신의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260302.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태현 신부님의 ‘성서 입문’을 읽고, 요즘은 이냐시오 영성을 소개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를 읽고 있습니다. 제가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 수련’을 중심으로 신학생들의 30일 피정에 함께 했기에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습니다. 저자는 각 수도회의 영성을 알려주는 예화를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프란치스칸 사제, 도미니칸 사제, 예수회 사제가 함께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미사 중에 전기가 나갔습니다. 프란치스칸 사제는 전기가 나간 것을 두고 가난한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도미니칸 사제는 빛의 소중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회 신부님은 지하로 내려가서 퓨즈를 교체해서 다시 불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영성은 다리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다리는 나무로 만들었고, 어떤 다리는 강철로 만들었고, 어떤 다리는 시멘트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다리는 아치교로 만들었고, 어떤 다리는 현수교로 만들었고, 어떤 다리는 사장교로 만들었습니다. 다리의 재질과 기능은 다를지라도 목적은 사람이나 차량의 이동을 돕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의 목적도 신앙인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지난 1월 25일 주일입니다. 금요일부터 눈이 내렸고,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평일이면 성당을 닫으면 되지만 주일이라서 고민이 있었습니다. 교구에 문의했습니다. 다른 본당에서도 교구에 문의했던 것 같습니다. 교구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주일미사 의무에 관한 면제 권한은 교구장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교구는 기상악화에 따른 주일미사 불참에 대해서는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의무를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올 수 있는 사람은 주일미사에 참례하라고 했습니다. 기상악화로 주일미사를 빠지는 것은 의무에서 면제가 되지만 올 수 있는 사람은 와도 된다는 공문이었습니다. 저와 부주임 신부님은 교구의 지침대로 성당 문을 열었습니다. 차량으로 갈 수 없어서 사제관에서 걸어갔습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저는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4번의 주일미사가 있었습니다. 15명, 12명, 30명, 7명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평소 주일미사에는 800명이 넘게 왔습니다. 적은 인원이지만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기상악화에도 성당에 오신 분들을 위해서 주일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 역시 교우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다리였습니다.
‘흑기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 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술자리에서 간혹 흑기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술이 좀 과했거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부득이하게 술을 마셔야 할 때에 대신 술을 마셔주는 우정(?)을 보여 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술 상무’라는 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래처와 회식이 있을 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술도 곧잘 마시면서 거래를 성사하게 만드는 직원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는 않지만, 친구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눈 내린 길을 조심조심 운전하고 와서 주일미사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도 흑기사입니다. 지상 최대의 흑기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흑기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어야 했던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고 율법 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율법 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흑기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
260302.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Bn/2006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요즘 창세기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성조들의 이야기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의 굴곡진 인생 스토리에서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장자권을 빼앗고 하란으로 달아났던 야곱 가족과 일행이 형 에사우를 만나는 장면은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머나먼 타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어머니 치마폭에 싸여 놀던 철부지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탐욕스럽고 변덕스러운 장인 라반 아래서 뼈 빠지게 일하던 그의 마음 안에는 마치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형 에사우였습니다.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철없던 시절 형에게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야곱은 야뽁 건널목을 건너는데, 에사우를 만나기 전, 진정성 있는 용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실시했습니다.
야곱은 형에게 심부름꾼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합니다. “나리의 종인 야곱이 이렇게 아룁니다.” 야곱은 완전히 자신을 바닥까지 낮춥니다. 형에게 동생이 아니라 종으로라도 받아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야곱은 형에게 줄 선물을 엄청나게 준비했습니다. 그 숫자가 어마어마합니다. 암 염소 이백 마리와 숫염소 스무 마리, 암 양 이백 마리와 숫양 스무 마리, 어미 낙타 서른 마리와 수나귀 열 마리. 큰 목장 하나를 만들 정도의 가축입니다.
뿐만아니라 야곱은 야뽁 건널목 건너편에 에사우가 무장한 장정 400명과 함께 대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밤을 지새우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주십시오. 그가 들이닥쳐서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보십시오. 에사우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아 달아난 야곱은 오랜 객지 생활을 하며 대가족을 이루며 어른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의 인품, 그의 신앙도 크게 성장한 것입니다.
형을 만나기 직전 야곱의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형 에사우가 눈앞에 나타나자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면서 7번이나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했습니다.
에사오는 동생의 진정성 어린 사과에 냉랭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풀립니다. 원망과 저주가 사라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동생을 향한 측은지심이 저절로 올라옵니다.
마침내 에사우가 야곱에게 달려와서 그를 껴안았습니다.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추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한참을 울었습니다.
보십시오. 야곱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처절히 반성했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빨리 용서를 청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마음의 표현이 엄청난 선물 공세요, 한없는 자기 낮춤이었습니다.
참된 용서와 화해는 거저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진정 어린 반성과 지속적인 자기 성찰과 용서를 청하려는 구체적인 노력, 그리고 목숨 건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사오를 향해 주인이라고 칭합니다. 형을 주님, 곧 하느님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야곱과 에사우는 서로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
260302.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6,36–38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져라.”
또 “판단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을 재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분량입니다.
그리고 그 분량은 늘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자비를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 가는 존재의 변화로 보았습니다.
자비란
남을 “봐주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먼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의 방식으로 다시 사람을 대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정의의 포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심판자의 자리)를 내가 빼앗지 말라는
영적 경계선입니다.
또한 “주는 대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거래처럼 들릴 수 있지만,
복음이 말하는 돌봄은 교환이 아니라 흘러감입니다.
자비는 막아 두면 썩고,
흘려보내면 살아납니다.
오늘 돌봄 주간의 첫날,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사람을 재고 있는가, 아니면 살리고 있는가?
나는 판단으로 관계를 닫는가, 아니면 자비로 길을 여는가?
오늘의 복음은
“착해지라”는 도덕 명령이 아니라,
자비의 리듬으로 다시 호흡하라는 초대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쉽게 판단으로 기울 때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게 하소서.
제가 누군가를 단죄하는 말 대신
살리는 말 한마디를 선택하게 하시고,
닫힌 손 대신 열린 손으로
돌봄을 흘려보내게 하소서.
아멘.
----------------------------------------------------
==========================================================
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
260302.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00 추가
열매를 얻기를 바란다면, 씨를 심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1) 이 말씀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라는 ‘황금률’을 구체적으로 풀이해 주신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황금률’에는 ‘네가 먼저’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것을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 주어라.”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도, 남을 용서하는 일도,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일과 같습니다.
‘많은 열매’를 얻기를 바란다면 ‘먼저’ 씨를 심어야 합니다.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일은,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씨를 심는 일입니다.
만일에 “저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 하겠다.”, 또는 “상대방이 먼저 하면 나도 하겠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즉 씨를 심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열매를 얻기를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자비’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또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냥’ 베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비에 관한 말씀은, 루카복음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ㄴ-14).”
이 말씀은, “보답을 받기를 바라면서, 보답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초대하지 마라.
보답을 받기를 바라지 말고,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초대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이 너에게 보답을 못해도 하느님께서 보답하실 것이니 너는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너도 의인으로 인정받고 다른 의인들과 함께 부활할 것이다.
그것이 네가 받게 될 보답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 보답에 비하면, 이쪽 세상에서 얻는 보답은 정말로 하찮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3) ‘심판’과 ‘용서’에 관한 말씀은,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2-35).”
그런데 주인이 종에게 한 말을 보면, “네가 용서받았으니 너도 용서하여라.”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네가 용서받고 싶으면 너도 용서하여라.”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모순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용서의 은총’은 이미 너에게 주어져 있다.
그 은총을 완전히 너의 것으로 만들려면, 네가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이 나에게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4)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심판’은 하느님의 심판과 같은 일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죄인 취급하면서, “너는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7장에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저주받은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남의 구원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의 ‘심판’은 종말의 날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5)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는, “받고 싶으면 주어라.”인데,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담과 비슷합니다.
‘사랑’을 뿌리면 ‘사랑’을, ‘미움’을 뿌리면 ‘미움’을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면, ‘주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즉 ‘이웃 사랑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이비 종교에서 그런 모습을 흔하게 봅니다.
헌금이든 무엇이든 재물이 종교 밖으로 나가지 않고(사랑 실천에 사용되지 않고) 종교의 재산 축적에만 사용된다면, 그 종교는 사이비 종교이고, 만일에 개인이 그렇게 한다면 사이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곡처럼 보이지만 알곡이 아닌 ‘쭉정이’가 ‘사이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분께서는) ...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루카 3,17).”>
----------------------------------------------------
260302. 사순 제2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1:40 추가
루카 6,36-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지난 주 내내 여섯 가지 ‘대당명제’에 대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고 싶다면 겉으로만 거룩한 척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게을리하며, 율법 규정의 내용을 어기지만 않으면 되는 최소한의 수준에 머무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가르침들을 마무리하시면서, 우리가 율법과 계명의 실천을 통해 지향해야 할 ‘최종목표’를 설정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참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당위성만 강조하시거나 일방적으로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왜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시지요. 그건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한 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입은 그 큰 자비와 은총에 감사하며, 하느님께 보은하는 마음으로 내 이웃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이 보답을 바라지 않고 손자 손녀에게까지 전해지길 바라는 ‘내리사랑’이듯,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 또한 당신께 돌려드리기보다, 그 은총과 사랑을 당신께서 나만큼이나 사랑하시는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기를 바라시는 또 다른 의미의 내리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으로 실행해야 할 자비의 양상을 크게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두가지 부정명령은 ‘최소한 이건 절대 하지 말라’는 수동적 지침이고, 뒤의 두가지 긍정명령은 ‘이건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실천하라’는 능동적 지침이지요. 먼저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그것이 내 권한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윤리 도덕적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우리가 만든 사회적 약속인 ‘법’이 할 일입니다.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의도와 의지의 부분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보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웃, 형제를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내 내면을 성찰할 ‘양심의 거울’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자기 잘못을 성찰하여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 사람은 하느님께 받은 용서와 자비에 감사하며 자연스레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적극적 차원의 사랑으로 넘어가게 되지요. 그렇기에 뒤의 두가지 긍정명령은 명령이 아니라 참된 회개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용서와 자비를 실천하면 하느님께서 내가 실천한 것에 넘치도록 후하게 덤을 얹어서 다시 돌려주신다는 점이지요. 그러니 이것저것 복잡하게 계산하지 말고,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기회될 때마다 즉시, 최선을 다해서 용서와 자비를 실천해야겠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