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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프강 라이프·온 카와라·로만 오팔카의 작업 방식 조명…기다림과 반복으로 완성된 현대미술의 번역 |
송미리내 작가
[글=송미리내]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계절의 변화나 하루의 날짜, 나이 들어가는 얼굴을 통해 시간을 감지한다. 미술은 오래전부터 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붙잡으려 했다.
1965년부터 평생 캔버스에 숫자만 적어 내려간 로만 오팔카를 비롯해 볼프강 라이프, 온 카와라 등 현대미술의 거장 3인은 시간을 직접 그리는 대신 기다림과 기록, 반복이라는 행위를 통해 시간을 물질로 번역해 냈다. 오늘날 회화와 조형을 이해하는 핵심은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물질로 옮겼는가'에 있다.
볼프강 라이프, 꽃가루로 자연의 시간을 채집하다
독일 출신의 작가 볼프강 라이프는 시간을 시계나 숫자로 표시하지 않고, 자연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을 작업의 재료로 삼는다. 그는 1977년부터 들판에서 꽃가루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헤이즐넛 꽃가루(Pollen from Hazelnut)'는 자연에서 오랜 시간 모은 꽃가루를 바닥에 일정한 형태로 펼쳐놓는 설치 작업이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라이프의 작품 세계에 대해 "우유, 대리석, 꽃가루, 쌀, 밀랍 등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축적해 작업한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꽃가루 자체만이 아니다. 꽃이 피고 꽃가루가 생기기까지 작가는 그 계절을 오롯이 기다려야 한다. 2004년 워싱턴 히르시혼미술관에 설치된 작품 역시 작가가 사흘 동안 직접 꽃가루를 체에 걸러 바닥에 쌓아 완성했다. 라이프에게 시간은 기다림과 채집의 물질이며, 그의 작품은 시간이 만들어낸 물질을 예술로 번역한 결과물이다.
볼프강 라이브 블뤼텐스타우브 폰 하젤누스 (디테일), 2013 하젤누스폴렌 설치 뷰: 뉴욕 아트리움 현대미술관, 2013 © 볼프강 라이브 / 사진: 캐롤린 라이브 /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발췌(송미리내 작가 제공)
온 카와라, 하루를 하나의 회화로 기록한 '오늘'
시간을 보다 직접적으로 기록한 작가도 있다. 일본 태생의 개념미술가 온 카와라는 1966년 1월 4일부터 '투데이(Today)' 연작을 시작했다. 캔버스에는 오직 그날의 날짜만 적혔다. 여기에는 그림을 날짜가 표시된 바로 그날 자정까지 완성해야 하며, 실패할 경우 폐기한다는 엄격한 규칙이 존재했다.
단일 화면만 보면 단순한 날짜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수십 년의 작업이 모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966년, 1970년, 1980년의 어느 하루가 캔버스 위에 축적되면서 한 사람의 시간이 거대한 회화의 연속으로 변모한다. 그는 단순히 날짜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날짜를 살아낸 하루를 기록했다. 온 카와라의 회화는 "오늘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날짜라는 가장 단순한 언어로 번역하며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한 가지 / 1965년 / 베트남 / 온 카라와 공식 홈페이지 발췌(이미지 제공: 송미리내 작가)
로만 오팔카, 무한의 숫자를 따라간 유한한 생애
온 카와라가 하루를 기록했다면, 폴란드 태생의 작가 로만 오팔카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하나의 연속된 작업으로 만들었다. 1965년에 시작된 '1965/1–∞' 프로젝트에서 오팔카는 캔버스에 1부터 차례로 숫자를 적어 나갔다. 이 숫자는 한 화면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캔버스로 끝없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배경에는 흰색 물감을 조금씩 더해 화면은 점차 밝아졌다.
숫자는 무한을 향하지만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오팔카는 바로 그 모순을 자신의 회화 안에 담아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동일한 조건에서 자신의 얼굴을 촬영하고, 숫자를 소리 내어 읽는 목소리도 함께 녹음했다. 회화와 사진, 그리고 소리가 한 사람의 생애가 지나가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오팔카에게 숫자를 적는 행위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소진되는 과정이자, 한 인간의 시간을 세는 숭고한 행위였다.
1965년부터 숫자를 기록하는 오팔카 / 브런치 홈 발췌(이미지 제공: 송미리내 작가)
시간을 살아낸 행위의 번역, 그리고 다음 질문
세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다루지만, 공통적으로 시간을 직접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기다림, 기록, 반복이라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시간이 작품 안에 머물도록 유도한다. 보이지 않던 시간이 작가의 행위를 통과하며 날짜, 숫자, 꽃가루라는 물질과 형식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회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어떤 이미지를 만들었는가'를 넘어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는가'를 묻게 만든다. 시간을 살아낸 행위를 회화와 조형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다음 질문을 낳는다. 시간이 작품에 흔적을 남긴다면, 그 시간을 살아낸 몸에는 무엇이 남을까. 걷는 방식, 손의 움직임, 호흡과 습관처럼 몸 자체에 새겨진 경험들은 다음 회화가 번역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일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번역회화 ⑥]에서는 화면이 아닌 몸을 하나의 기억 장치로 바라보는 작가들의 신체와 감각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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