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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螢雪之功)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이다.
螢 : 반딧불 형(虫/10)
雪 : 눈 설(雨/3)
之 : 갈 지(丿/3)
功 : 공 공(力/3)
출전 : 진서(晉書) 차윤전(車胤傳) 손강전(孫康傳)
반딧불과 눈과 함께 하는 노력이라는 뜻으로, 고생을 하면서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이르는 말이다. 중국 진서(晉書)의 차윤전(車胤傳)ㆍ손강전(孫康傳)에 나오는 말로, 진나라 차윤(車胤)이 반딧불을 모아 그 불빛으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이 가난하여 겨울밤에는 눈빛에 비추어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여러 가지 풍족하지 못한 환경을 이기고 열심히 공부한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전한다. 고사성어로도 숱하게 만들어졌다. 등불을 켤 기름을 구하지 못해 벽을 뚫고 이웃집의 빛으로 책을 읽은 착벽투광(鑿壁偸光)의 광형(匡衡),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천장에 매달고, 허벅다리를 송곳으로 찌르며 공부한 현두자고(懸頭刺股)의 소진(蘇秦) 등이 유명하다.
하지만 이보다 반딧불이를 잡아 주머니에 넣은 불로 공부하고, 흰 눈빛으로 비춰보며 책을 읽어 크게 성공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 성어가 가장 대표적이다. 반딧불로 공부한 차윤(車胤)과 눈빛으로 책을 읽은 손강(孫康)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합쳐져 된 말이다. 각각 차윤취형(車胤聚螢)과 손강영설(孫康映雪)로 따로 떼어서도 사용된다.
동진(東晉)의 차윤(車胤)은 어려서부터 항상 삼가고 부지런히 다방면의 책을 읽어 막히는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夏月以練囊 盛數十螢火 照書讀之 以夜繼日.
하월이연낭 성수십형화 조서독지 이야계일.
집안이 가난하여 여름철 밤이면 등유를 얻지 못하자 명주주머니 연낭(練囊)에 수십 마리의 개똥벌레를 잡아넣고 그 빛을 책에 비춰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이렇게 열심히 독서한 차윤의 박학함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아 중요 직책을 맡았고 나중에는 총리격인 상서랑(尙書郞)을 지내기도 했다. 진서(晉書)의 차윤전에 실린 내용이다.
손강은 차윤과 비슷한 시기의 학자이지만 생몰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어려서 부터 성격이 곧아 구차하게 남들과 사귀지 않았다.
孫康家貧 常映雪讀書.
손강가빈 상영설독서.
집안이 빈한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책을 읽으려는데 등불을 켤 기름이 없자 항상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
나중에 관직에 나아가 관리의 규찰을 맡아보는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냈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손씨세록(孫氏世錄)의 이야기가 다른 곳에 인용되어 전한다.
옛날과 비할 수 없이 풍족한 오늘날에는 이처럼 고생하며 공부하는 사람은 줄었을 것이다. 그래도 불과 한두 세대 전엔 고학으로 학업에 정진하여 입신양명한 인사들이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됐다.
이제 눈빛과 반딧불이 빛으로 공부한 그런 정신으로 매사 정진하여 목표한 뜻을 이뤄야겠다. 젊은 사람들은 아무리 공부해도 앞길이 안 보인다고 아우성이지만 늘 고생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형설지공(螢雪之功)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는다는 뜻으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진서(晉書) 차윤전(車胤傳) 손강전(孫康傳)
동진(東晉)은 중국 역사상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핀 나라다. 무릉도원을 시로 노래한 도연명, 중국 회화사에서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개지, 서예를 예술로 승화한 왕희지는 모두 동진 출신이다. 조선에서도 1500년을 앞뒤로 채 100년도 안 되는 시기에 서경덕, 이황, 이이, 기대승 등 내로라하는 사상가들이 활약했다.
동진에 차윤(車胤)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집안이 가난해 불에 쓸 기름조차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차윤은 여름이 되면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螢)를 주머니에 잡아넣어 그 빛으로 밤새워 책을 읽어 마침내 이부상서(조선시대 이조판서 격)가 됐다.
같은 시대 손강(孫康) 역시 성품이 곧고 어려서부터 배움에 큰 뜻을 두었지만 집이 가난해 기름을 살 돈이 없었다. 그는 겨울밤이면 하얀 눈(雪)에 글을 비추어 책을 읽었고, 뒤에 벼슬이 대사헌까지 올랐다.
한자를 즐겨 쓰는 사람들이 흔히 책상을 설안(雪案)이라 하는 것은 손강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얘기 모두 진서에 전해온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나 형창설안(螢窓雪案)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뜻을 꺾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다. 형창설안은 ‘반딧불 창에 눈 책상’이란 뜻이다. 형설지공을 형설(螢雪)로 줄여쓰기도 쓴다.
인간은 위대함 자체보다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에 더 감동한다. 땀의 가치를 아는 까닭이다. 재능은 노력을 이기지 못한다. 세상에는 재능으로 성공한 사람보다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 훨씬 많다.
천재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한 자 중에 끝까지 그 이름을 단 자는 많지 않다. 남을 탓하고, 사회를 탓할 순 있다. 한데 남탓 이전에 자신이 쏟은 노력의 덩치를 재봐야 한다. 그게 순서다.
형설지공(螢雪之功)과 노오력
내가 1990년대에 독일에 처음 유학 가서 놀랐던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아무리 둘러봐도 전봇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사방에 개똥이 널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는 속담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그렇게 흔한 개똥마저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개똥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긴 되었나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기는커녕 개발도상국에도 끼지 못할 때도 우리나라에는 개똥이 흔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개똥’이 하찮은 것을 일컬을 때를 일컫는 접두어로 쓰일 정도였다. 예를 들어, 전혀 기름지지 않은 밭을 개똥밭이라고 한다. 또 주인 없는 길가 땅에서 자라는 참외를 개똥참외라고 한다. 정성껏 키우기는커녕 지나가다 한 번씩 찰 수도 있는 개똥참외에 맛이 들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개똥벌레는 어떻게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유리벽’과 ‘불씨’라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신형원 씨의 최고 히트작 ‘개똥벌레’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아무리 우겨 봐도 어쩔 수 없네 /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 걸” 이 벌레는 밤에는 날아다니지만 낮에는 습기가 있는 곳에 숨어 있는데 어쩌다보니 소똥이나 갓 눈 개똥 밑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이 농부들의 눈에 띄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예전에는 지천에 널린 벌레라서 개똥벌레라는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요즘 개똥벌레를 개똥벌레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부를 정도로 흔하기는커녕 어디 가서 구경 한 번 해보기도 힘든 벌레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반딧불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반딧불이라는 이름은 왠지 낭만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반딧불은 사랑을 갈구하는 표식이기 때문이다. 반딧불이 꼬리에는 루시페린이라는 물질이 있다. 루시페린이 산소와 결합하여 산화할 때 빛이 난다. 빛을 내니 당연히 에너지는 소모되지만 열은 나지 않는 차가운 빛이다.
반딧불이 암컷은 배의 여섯 번째 마디에서 불을 내고 수컷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마디에서 불을 낸다. 당연히 수컷 불의 밝기가 두 배 정도 밝다. 암컷은 날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빛을 내면 날아다니던 수컷이 그 빛을 보고 찾아와 더 강한 불빛을 낸다. 수컷이 마음에 들면 암컷도 불의 밝기를 높여 구애를 받아들이고 짝짓기를 한다.
3년 전 보르네오 섬의 맹그로브 숲에서 나무 하나를 가득 메운 반딧불이를 본 적이 있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관이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찍으면 그 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는 나무도 반딧불이로 가득하지만 바로 그 아래로 가지 않으면 그 빛은 보이지 않는다. 반딧불이는 짝을 찾기 위해서 꼬리를 밝히는 것이지 사람 좋으라고 불을 밝히는 게 아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말이 있다. 진나라 차윤이라는 소년이 반딧불과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는 노력 끝에 중앙정부의 고급관리로 출세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다. 글자가 매우 커서 한 페이지에 기껏해야 20글자쯤 되는 천자문을 읽으려면 반딧불이 80마리가 있어야 한다. 얘네들이 동시에 불을 밝히는 게 아니니까 아마 200마리쯤은 있어야 할 것이다. 형설지공은 ‘너의 성공은 네 환경이 아니라 너 자신에게 달려 있어. 형편 따위를 탓하지 말고 노력을 하란 말이야! 노오력!’을 그냥 네 글자로 줄인 말일 뿐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이제는 시대의 개념으로 굳어진 ‘헬조선’이나 ‘흙수저’ 그리고 ‘노오력’을 빗대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젊은이들이 왜 이런 말을 쓰게 되었는지 살피시는 대신 다시 모두에게 도전, 진취, 긍정이라는 단어를 제시하셨다. 이 대목에서 오히려 젊은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예전에는 ‘개똥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못된 주인이 노비의 아이를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얼마나 하찮게 보이면 그랬을까? 주인마님에게 개똥이는 동창이 밝고 노고지리 우지지는데도 상기 아직 일어나지 않고 ‘노오력’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로 보였을 게다. 그러지 마시라. 그렇지 않아도 힘들다.
▶️ 螢(반딧불 형)은 ❶형성문자로 蛍(형)의 본자(本字), 萤(형)은 통자(通字), 萤(형)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벌레 훼(虫; 뱀이 웅크린 모양, 벌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빛을 내며, 엇갈려 날아다니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𤇾(형; 개똥벌레)으로 이루어졌다. 개똥벌레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螢자는 '반딧불이'나 '개똥벌레'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반딧불이는 딱정벌레목 반딧불이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반딧불이나 개똥벌레는 같은 곤충을 일컫는 말이다. 반딧불이는 꽁무니에 있는 발광기로 빛을 내는 곤충이다. 그러니 螢자는 虫(벌레 충)자와 熒(등불 형)자를 결합해 빛을 내는 반딧불이의 특징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옛사람들은 반딧불이를 잡아 어두운 밤에 책도 읽었다고 하니 등불을 뜻하는 熒자와 虫자의 조합은 매우 재미있는 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螢(형)은 ①반딧불이(반딧불잇과의 딱정벌레) ②개똥벌레(반딧불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고생하면서도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학문을 닦음을 형설(螢雪), 반딧불을 형작(螢爝), 반딧불의 불빛을 형광(螢光), 개똥벌레의 꽁무니에서 반짝이는 인의 불빛을 형화(螢火), 공부하는 방의 창으로 학문을 닦는 곳을 형창(螢窓), 공부하는 책상을 형안(螢案), 반딧불의 빛으로 공부한다는 말로 어렵지만 힘써하는 공부의 뜻을 형학(螢學),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유형(流螢), 개똥벌레를 주머니에 넣음 또는 주머니에 넣은 개똥벌레라는 뜻으로 고생하며 학문을 닦음을 두고 이르는 말을 낭형(囊螢),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반딧불이 비치는 창과 눈에 비치는 책상이라는 뜻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문에 힘씀을 비유한 말을 형창설안(螢窓雪案), 차윤이 개똥벌레를 모았다는 뜻으로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공부함을 이르는 말을 차윤성형(車胤盛螢), 차윤의 반딧불과 손강의 눈雪이라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서의 면학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차형손설(車螢孫雪) 등에 쓰인다.
▶️ 雪(눈 설)은 ❶회의문자로 비(雨)가 하늘에서 얼어 내리는 하얀 눈을 빗자루(부수를 제외한 글자)로 쓴다는 뜻을 합(合)한 글자로 눈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雪자는 '눈'이나 '흰색', '고결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雪자는 雨(비 우)자와 彗(비 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彗자는 손에 빗자루를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빗자루'나 '쓸다'는 뜻이 있다. 雪자의 금문을 보면 雨자 아래로 彗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내린 눈을 빗자루로 쓰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눈을 표현하기 위해 재미있는 방법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본래 彗자가 적용된 䨮(눈 설)자가 쓰여야 하지만 편의상 획을 줄인 雪자가 '눈'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외에도 雪자는 하얀 눈에서 착안 된 '고결하다'나 '씻어 버리다'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雪(눈)은 ①눈(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 ②흰색 ③흰것의 비유 ④눈이 내리다 ⑤희다 ⑥고결하다 ⑦씻다 ⑧표명하다(의사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눈이 내리는 경치 또는 눈이 쌓인 경치를 설경(雪景), 눈이 쌓인 산을 설산(雪山), 눈이 내리는 밤을 설야(雪夜), 눈이 뒤덮여 있는 벌판을 설원(雪原), 눈이 많이 내림으로 인하여서 받는 피해를 설해(雪害), 굵게 엉겨 꽃송이 같이 보이는 눈을 설화(雪花), 상대를 이김으로써 지난번 패배의 부끄러움을 씻고 명예를 되찾는 것을 설욕(雪辱), 부끄러움을 씻음을 설치(雪恥), 맛이 달고 물에 잘 녹는 무색의 결정을 설탕(雪糖), 세차게 내리는 눈을 강설(强雪), 많이 오는 눈을 대설(大雪), 적게 오는 눈을 소설(小雪), 많이 오는 눈을 장설(壯雪), 갑자기 많이 내리는 눈을 폭설(暴雪), 고생하면서도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학문을 닦음을 가리키는 말을 형설(螢雪), 얼음과 눈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가 결백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빙설(氷雪), 봄철에 오는 눈을 춘설(春雪), 부끄러움 따위를 씻어 버림을 세설(洗雪), 눈 위에 또 서리가 내린다는 뜻으로 어려운 일이 겹침을 이름 또는 환난이 거듭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설상가상(雪上加霜), 눈처럼 흰 살결과 꽃처럼 고운 얼굴이란 뜻으로 미인의 용모를 일컫는 말을 설부화용(雪膚花容), 기러기가 눈이 녹은 진창 위에 남긴 발톱 자국이라는 뜻으로 얼마 안 가서 그 자국이 지워지고 또 기러기가 날아간 방향을 알 수 없다는 데서 흔적이 남지 않거나 간 곳을 모른다는 말을 설니홍조(雪泥鴻爪), 매화를 달리 이르는 말을 설중군자(雪中君子), 눈 속의 송백이라는 뜻으로 소나무와 잣나무는 눈 속에서도 그 색이 변치 않는다 하여 절조가 굳은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설중송백(雪中松柏), 눈 속에 있는 사람에게 땔감을 보내준다는 뜻으로 급히 필요할 때 필요한 도움을 줌을 이르는 말을 설중송탄(雪中送炭),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눈 빛에 비쳐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가난을 무릅쓰고 학문함을 이르는 말을 영설독서(映雪讀書), 얼음이 얼고 찬 눈이 내린다는 뜻으로 심한 추위를 이르는 말을 동빙한설(凍氷寒雪), 정씨 문 앞에 서서 눈을 맞는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을 존경함을 이르는 말을 정문입설(程門立雪)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功(공 공)은 ❶형성문자로 糿(공)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힘 력(力; 팔의 모양, 힘써 일을 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뜻으로 쓰인 工(공; 도구, 일, 일을 하다)으로 이루어졌다. 전(轉)하여 훌륭하게 일을 하다, 훌륭한 일, 공로(功勞), 공력(功力)으로도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功자는 ‘공로’나 ‘업적’, ‘사업’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功자는 工(장인 공)자와 力(힘 력)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工자는 땅을 다지는 도구인 ‘달구’를 그린 것이다. 그러니 功자는 땅을 다지는 도구를 들고 힘을 쓰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달구는 땅을 단단하게 다져 성벽이나 둑을 쌓던 도구였다. 전쟁이나 치수를 중시했던 시대에는 성과 둑을 쌓는 일 모두 나랏일과 관련된 사업이었다. 그래서 功자는 나랏일에 힘써 준다는 의미에서 ‘공로’나 ‘업적’, ‘사업’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功(공)은 (1)공로(功勞) (2)공력(功力)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공, 공로(功勞), 공적(功績) ②일, 사업(事業) ③보람, 업적(業績), 성적(成績) ④상복(尙服: 궁중의 의복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종오품 벼슬) ⑤경대부(卿大夫)의 옷 ⑥공부(工夫) ⑦공(公), 공의(公義) ⑧공치사(功致辭)하다 ⑨튼튼하다, 정교(精巧)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공 훈(勛), 공 훈(勳),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지날 과(過), 허물 죄(罪)이다. 용례로는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에 힘쓴 노력이나 수고를 공로(功勞)라 하고, 쌓은 공로를 공적(功績), 사업이나 나라를 위해서 두드러지게 세운 공을 공훈(功勳), 나라에 공로가 있는 신하를 공신(功臣),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침을 공명(功名), 일의 성적을 공과(功課), 뜻한 것이 이루어짐을 성공(成功), 나라를 위하여 드러나게 세운 공로를 훈공(勳功), 전쟁에서 세운 공적을 군공(軍功), 죄 되는 일을 거드는 행위를 가공(加功), 피륙을 짜내기까지의 모든 수공의 일을 여공(女功), 여러 해 동안의 공로를 연공(年功), 세상이 모르는 숨은 공덕을 음공(陰功), 공로가 있음을 유공(有功), 공로와 허물이 반반이라는 뜻으로 공도 있고 잘못도 있음을 이르는 말을 공과상반(功過相半), 공을 이루었으면 몸은 후퇴한다는 뜻으로 성공을 이루고 그 공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공성신퇴(功成身退),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고 벼슬에서 물러난다는 말을 공명신퇴(功名身退), 훌륭한 공업을 이룩하고 나서 명성을 크게 떨친다는 말을 공성명수(功成名遂), 쌓는 공도 한 삼태기로 이지러진다는 뜻으로 거의 성취한 일을 중지함을 이르는 말을 공휴일궤(功虧一簣),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엉뚱한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 보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전부지공(田夫之功), 공이 있고 없음이나 크고 작음을 따져 거기에 알맞은 상을 준다는 말을 논공행상(論功行賞), 조개와 황새가 서로 싸우는 판에 어부가 두 놈을 쉽게 잡아서 이를 보았다는 뜻으로 두 사람이 다툼질한 결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를 얻게 됨을 빗대어 하는 말을 어인지공(漁人之功), 안에서 돕는 공이란 뜻으로 아내가 집안 일을 잘 다스려 남편을 돕는 일을 말함을 내조지공(內助之功), 헛되이 수고만 하고 공을 들인 보람이 없다는 말을 도로무공(徒勞無功), 성공한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성공자퇴(成功者退)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