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신명 10,12-22; 마태 17,22-27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2023.8.14.; 이기우 신부
오늘의 독서가 신명기 10장인데, 신명기는 구전(口傳)을 바탕으로 기록된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를 총정리해서 후대에 다시 쓰여진 율법서입니다. 신명기 기록자들이 지금처럼 모세오경의 결론처럼 취급될 것을 알고 쓴 것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여호수아서, 판관기, 사무엘전후서, 열왕기 전후서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서의 서론 삼아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려는 의도로 썼다고 합니다. 먼저 멸망한 북이스라엘 왕국에 이어, 멸망의 위기에 놓인 남유다왕국이라도 율법에 근거하여 새롭게 재건하려는 비장한 각오로 쓰여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그 이전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백성이 저질렀던 과오와 죄악상에 대해서 상기시키기보다는 그들이 명심했어야 할 정신과 실천했어야 할 공동선에 대해서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너희가 잘 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잘 지키는 것이다”(신명 10,12-13). 그리고 나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이 위대한 구원경륜을 위해 이스라엘이 받은 특별한 소명에 대해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보라,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에게만 마음을 주시어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오늘 이처럼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인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더 이상 목을 뻣뻣하지 말고,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에게 차별 대우하지 말아라”(신명 10,16-19).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정신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자면 마음에 할례를 행한 것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지 말아야 하고, 뇌물도 받지 말아야 하며,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어야 하고, 이방인에게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 등이어서, 요즘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회의 공동선을 수호하고 증진시키는 실천활동이 그 실질적 내용입니다. 오늘 마태오 17장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공동선이 지향해야 할 최고선으로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데,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납세를 독촉하는 바람에 공동선의 하나로 볼 수 있는 세금 납부의 의무를 행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사회의 생명은 공동선입니다. 그 구성원들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선의 혜택을 고르게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공동선에 기여해야 합니다. 전자가 국가의 의무라면 후자는 개인의 의무입니다. 그러자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고 그 기회를 받는 일도 공동선의 혜택이며, 그렇게 해서 공동선에 기여한 실적이 있으면 출신과 학력과 재산, 성별 등 조건에 상관없이 사회적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사회가 공동선에 기여하려는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들을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고 배제하면 그들은 한을 품고 그 사회에 등을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을 하루 앞두고 기억하려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신부로서 히틀러와 나찌 세력으로부터 박해받던 유다인들 2천 명을 수도원 내에 은신할 수 있도록 돕다가 체포되었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수감생활을 하다가 다른 죄수를 대신하여 죽겠다고 자원하였으며, 같은 형을 함께 받은 수감자들과 처절한 옥중생활 속에서 아사형 즉 굶주림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성가가 울려 퍼지게 하는 증거 행동을 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나찌 정권은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수백만 명의 유다인을 말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했는데, 특히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던 아우슈비츠의 프리취 수용소장은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칙을 수용소장 재량으로 시행했는데, 탈출을 예방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악마스러운 소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탈옥자가 발생하자, 악인 프리취는 수감자들을 모두 모여 놓고 무작위로 열 명을 지목하여 아사형(餓死刑)을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라는 사람이 이미 자기의 온 가족이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가 그를 대신해서 죽겠다며 자원하였습니다. 프리취는 열 명을 아사 감방에 가두고 물과 음식을 일체 주지 않았는데 3주 동안 여섯 명이 굶어서 죽어갔습니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기도와 성가로 힘과 용기를 주던 콜베 신부와 세 명의 죄수는 기도의 힘으로 3주를 넘겨서도 살아 있었는데, 프리취는 결국 독극물인 페놀액을 주사하여 이 네 명을 모두 살해했으니, 그 날이 1941년 8월 14일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일은 전후의 혼란을 수습하느라 자연스럽게 잊혀질 뻔 했으나, 콜베 신부 덕분에 살아난 가조우니체가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콜베 신부의 영웅적 선행에 대하여 증언하는 강연 활동을 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콜베 신부에게 전구하여 기적적으로 낫게 된 불치병 환자들도 나오게 되면서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콜베 신부를 복자로 시복하였으며,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콜베 신부를 순교자로 기록하고 그의 성인 시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는 신앙의 이유로 목숨을 바친 전통적 의미의 순교자가 아니라 이웃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새로운 의미의 순교자로 추앙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군부와 자본에 의해 조종당하며 엘살바도르 민중을 억압하던 군부정권의 불의에 항거하다가 미사 중에 총격을 받아 죽은 오스카 로메로는 가난한 이들과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더 새로운 의미의 순교자로 추앙을 받아서,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성하였습니다. 사랑의 순교자에 이어 정의의 순교자가 나오는 시대로 전환되는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과 정의라는 진리를 목숨 바쳐 증거한 증인들의 삶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앞당겨 다가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 같은 사회적 약자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느님 사랑을 함께 행할 공동체로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최고선과 공동선을 위한 예수님의 대책입니다. 수난과 부활로 이룩할 최고선과 사랑과 정의로 이룩할 공동선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