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성의 적 - 이애리수
어제는 1세기를 살다가신 송민도(1923~2023)님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오늘은 송민도님보다 앞서 활동한 이애리수(1910~2009)님에 대한 이야기를 올려드립니다
앨리스를 한자음으로 바꾼 이름 이애리수님은 외삼촌인 희극배우 전경희의 영향을 받아 유년 시절인
9세가 되던 해에 신파극단인 신극좌에 입단하면서 데뷔하여, 배우 및 가수로 활동하며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고, 1922년 민중극단을 거쳐 18세에 취성좌(聚星座)라는 극악단에서 '황성의 적'를 불렀고,
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음반을 발표해 50,000장을 판매됐습니다. 당시 오디오가 엄청난 고가라
이를 보유한 가구가 적었던 때였으므로 50,000장은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황성의 적은 훗날 남인수가 황성옛터로 재취입하여 남인수노래로 많이 알려졌지만
훨씬 선배인 이애리수의 노래입니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풍미하던 이미모의 여가수는
1935년이후 연애사건으로 인하여 장안을 떠들썩하게한후 당사자와 결혼하고 가요계를 떠났는데
훗날 100세를 눈앞에 둔 나이에 일산의 노인병원에 계신게 발견되었습니다
황성의 적은 망국의 아픔을 안고 일제시대를 살아가던 우리부모님과 조부모님세대가
가장 사랑하던 노래였고 박정희전대통령의 18번지이기도 했습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뤄 /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 1932년)
위 노랫말은 1932년 이애리수가 취입한 작품으로 식민지 대중의 폐부를 찌른 가사와 곡조로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첫 손에 꼽히는 '황성 옛터'이다.
'황성 옛터에 밤이되니 월색만 고요해' 가사 첫 대목을 따서 '황성옛터'로도 불리는 이 노래의 원명은 ‘황성(荒城)의 적(跡)’, 폐망한 왕궁의 흔적이란 뜻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는 전수린. 연대는 이 나라의 무대예술이 유랑극단의 어설픈 무대에 명맥을 유지하던 1928년이었다. 이해, 어느 날 바이올린 주자로 순회악극단에 몸을 담고 있던 전수린은 공연의 여가를 빌어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만월대를 들르게 되었다.
비록 잡초만 우거져 인적은 없으나 옛 왕조의 영화는 무너진 성터에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밝게 뜬 가을 밤, 잡초에 가려 폐허가 된 옛 궁궐의 터는 떠돌이 악극단원들의 마음을 울렸고 곧바로 오선지에 슬픈 멜로디와 가사를 써내려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순회극단은 황해도 배천군에 묵고 있었다. 마침 후줄근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어서 단원들은 어쩔 수 없이 여인숙 침침한 골방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이런 때면 으레 피게 마련인 잡담의 꽃도 이젠 그 씨가 끊어졌던지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그러다 보니 답답하기까지 한 침울한 공기가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 허기야, 허구한 날 거듭되는 유랑에 이젠 정말 지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까닭 모를 한숨들을 몰아쉴 때 '전수린(본명 전수남)'은 바이올린을 더듬어 꺼냈다. 바이올린에서는 침울한, 그러나 감미로운 애수를 동반한 조용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이때 굳게 감긴 그의 눈에는 며칠 전 옛 고려왕조 수도였던 개성 만월대(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의 궁궐)에서 느낀 감회가 어리고 있었다.
푸르고 차기까지 한 달빛, 그 달빛 아래 잡초를 스치는 바람 소리의 적막감, 흩어진 옛 기화, 기둥 없는 궁터의 초석들, 그렇게 작곡가 전수린은 개성 만월루방초 우거진 고궁 옛 성터에서 뼈저리게 느껴지는 민족의 슬픈 감회를 오선지로 나타내었다.
이렇게 해서 '황성 옛터'(황성의 적, 荒城의跡)의 선율은 태어났다. 이 선율에 그 악극단의 대표였던 왕평이 작시해서 가사를 붙였다. 노래는 이애리수(1910~2009)가 맡아 연습했다.
그리고 1928년 늦은 가을 이 노래는 단성사에서 '이애리수'가 불렀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전해지게 된다. 이후 '황성옛터'는 1932년 ‘황성(荒城)의 적(跡)’이라는 제목으로 빅터레코드에서 정식 음반으로 발매된다.
당시 서울극단 취성좌 공연 때였다. 청순한 여가수 이애리수의 등장은 만장 관중의 환호성 섞인 박수를 받았다. 박수가 지나고 다시 정숙해 졌을 때...,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장내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저마다 그녀의 노래에서 다시 한번 망국의 뼈저린 한을, 그리고 잃어버린 조국에의 그리움을 되새겼는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앙코르의 요청이 터져 나오고 그래서 관객들이 따라 부르고..., 따라부르는 사람들의 두 뺨에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눈물들이 흐르고 있었다.
특히 나라를 잃은 아픔을 폐허에 빗댄 가사와 슬픈 왈츠의 곡조는 많은 사람들을 눈물짓게 했고, 조선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당시 이 노래가 배달의 민족혼을 일깨운 데 비상한 관심을 끌자, 작곡자와 작사자를 함께 구인해서 혹독하게 조사하는 한편 노래는 금지곡으로 못 박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심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숨어서 전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 노래를 금지했던 일본인들조차 "조선의 세레나데"라고 하여 즐겨 애창하였으니 그만큼 이 노래가 담았던 예술성과 호소력은 컸던 것이라 할수있다.
전국의 가요팬들은 이 ‘황성의 적’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축음기 판매량도 늘어났습니다. 주로 악극단 공연이나 무대를 통해서만 보급되던 유행창가나 영화주제가들이 드디어 음반을 통해 정식으로 보급되는 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 음반이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사이에 5만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워낙 인기가 높아가자 일본 경찰 당국에서는 바짝 긴장의 털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이 노래의 가사 속에 민족주의 사상이나 불온한 내용이 없는지 뒤지고 두리번거것이다. 극장에서도 반드시 임석 순사가 입회하여 흥분한 관중들 앞에서 가수가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금지했고, 나중에는 기어이 트집을 잡아서 발매금지를 시키고 말았다. 이 노래를 만든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경찰서에 불려갔다.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계급주의 문학운동에 열정을 쏟던 카프(KAPF) 계열의 청년들은 밤마다 토론을 마치고 술집에 모여 마신 술이 거나하게 오를 때면 일제히 일어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황성옛터’의 3절 가사를 비장하게 합창을 했다고 한다. 노래를 부르다 끓어오르는 감개에 북받쳐 흐느끼는 청년문학인들도 필시 여러 명 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이애리수의 인기는 193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왕수복과 선우일선을 비롯한 기생가수의 출현, 이난영, 전옥 등 새롭고 모던한 창법과 감각을 지닌 후배가수들에게 가요팬들의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다. 창가풍의 단조로운 음색에 익숙한 이애리수의 노래는 인기 반열에서 급격히 퇴조하게 된다. 묵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구축하는 변화의 거친 물결은 그 자체가 너무나 비정하고 막을 수 없는 이치일 테이다. 한 잡지사가 조사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선에서도 이애리수의 노래는 앞 순위에 오르지 못하고 점점 그녀의 이름은 대중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져갔다.
이러한 때 이애리수는 그녀의 노래를 몹시 사랑하던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연희전문 졸업반 학생이던 배동필(裵東弼)! 하지만 이미 배동필에게는 부모가 맺어준 처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애리수에게도 지난날 그녀의 노래를 사랑하던 이광재란 자산가청년과 진작 정분을 맺어 세 살 바기 아기가 하나 있었던 처지였다. 그러니까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젊은 유부남 유부녀가 불륜으로 만나 사랑을 키워간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과 가수라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행한 난관이 수렁처럼 자꾸만 앞을 가로막았다.
만날 기회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이승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밤 몰래 만나 칼모친이라는 수면제를 다량 삼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목을 면도칼로 그어서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정사를 시도한다. 이런 아슬아슬한 정황이 집주인에게 발견되어 긴급히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입원을 하게 된다.
몇 차례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두 사람은 당시 언론과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어이 동거생활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간다. 배동필은 두 아내를 처첩으로 거느린 야릇한 광경으로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갔다. 처첩간의 갈등으로 인해 이애리수는 이후에도 또 다시 자살을 시도해서 신문기사의 화제로 오르는데 두 번째의 자살시도에 대해서는 언론과 사회에서 매우 싸늘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듯한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를 마지막 곡으로 취입하게 된다. 그 애처로운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을 서러움으로 빠뜨렸고, 눈물까지 뚝뚝 흘리도록 만들었다.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 부모는 이 노래를 듣고서 결국 두 사람의 부부로서의 사랑을 승낙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남7녀의 자녀가 태어났고, 이애리수는 무대를 아주 떠나서 현모양처로만 살아갔다.
그런데 지난 2008년, 뜻밖의 기사 하나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왕년의 가수 이애리수가 경기도 일산의 한 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보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대를 떠나 종적을 감춘 지 어언 70여년! 세월이 흘러서 가수는 호호백발 할머니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20대 시절의 사진과 현재의 얼굴모습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은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 그 선과 윤곽이 또렷하게 닮아있었다. 언론에서는 특집을 준비하고 인터뷰 프로그램을 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009년 3월31일 99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출처> 싱싱국악배달부와 이동순교수의 그시절그노래
강남제비 - 이애리수(1930), 최초의 가요 강남달을 작사작곡한 김서정 작사 작곡
첫댓글 황성옛터 이노래 저도 좋아합니다
무엇인가 가슴은 쓸쓸하게 해주는
애절함이 담긴 우리의 옛노래이지요
이애리수의 일대기를 자세히도 기록
하셨네요 역사탐방 해설가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좋은 자료 모으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반갑습니다 이노래를 작사한 왕평 선생이 만월대의 허물어진 자취를 보고 황성의 적이란 글을 쓰고
전수린선생이 곡을 붙여 이애리수여사가 노래한 우리가요사에 빛나는 명곡입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옛노래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수집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주말되시기 바랍니다
정수님~
이애리수가 참 이쁘게도 생기셨네요
남인수씨의 노래만 듣다가 이애리수 노래를 들으니
또 다른 맛이 나는군요
감사합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미인이십니다
남인수님의 노래도 좋지만 왜색조가 좀 있고 이애리수님의 노래는 창가조지만 애닲은 심사가 잘느껴집니다
감동입니다.
뫼나리 민요가락만 깔리던 시절에
참 모던한 가락의 선구자네요.
로맨스도 아름답게 읽혀지고요.
감사합니다. 20년대 신민요에서 순수가요로 넘어가는 시점의 뛰어난 노래입니다
현해탄에 몸을던진 윤심덕과 김우진처럼 이애리수와 배동필도 함께 수면제를 먹고 동맥을 끊으려 했지만
다행히 하숙집 주인에게 발견되 목숨을 건졌고 그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합니다
황성 옛터
가사속에 모든 애환이
노래 부르면 괜히 슬퍼 저요
역사의 진 면목을 상세히도
올리셨네요.
한 많은 인생도
한 순간에 물거품
이애리수님 미인이시네요.
기정수님 수고에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60대이상중 이노래를 모르시는 분을 없을겁니다
당시 나라를 잃고 3.1운동도 실패로 돌아간 시대에 백성들은 이애리수님의 황성의 적을 들으며
설움을 달랬다 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시기 바랍니다
남인수님 노래인줄알았는데 이 애리수 선배님이 계셨군요!
덕분에 고운 미모도 잘봤네요.
반갑습니다. 남인수님은 황성옛터로 리바이벌했고 원곡은 이애리수님의 황성의 적입니다
상당한 미인이시고 100세를 앞둔 연세의 사진에도 많이 옛모습이 남아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잘 읽고 갑니다
기정수님께서 연예부문에 조예가 깊으시네요
다음 게시물이 기대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역사와 고전, 옛노래 여행등을 많이 좋아합니다
지금도 옛노래와 포크송, 올드팝을 많이 듣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고
5월초까지는 바빠서 당분간 글올리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