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현 모세 신부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 7,14-15.18-20 루카 15,1-3.11ㄴ-32
신앙생활을 중단한 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 이러한 말을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가 두렵다. 평소에 상황이 좋을 때는 하느님을 찾지 않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하느님을 찾는 것 같아 양심에 걸린다.’
또는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서 하느님을 찾더라도, 다시 상황이 좋아지면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예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은아들은 순수하게 아버지가 좋아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돌아온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고
자신은 아버지의 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큰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와 함께하였는지에 상관없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정의를 넘어섭니다.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서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회개의 시작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큰 차원에서 정의를
뛰어넘으십니다”(『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십시오』, 생활 성서사, 48면).
우리는 정의에 묶여서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기도 합니다.
두 아들의 아버지는 참된 정의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십니다.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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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훈 토마스 신부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 7,14-15.18-20 루카 15,1-3.11ㄴ-32
부모님은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사고 치고 걱정을 한가득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의 생각과 다른 결정을 하여 실망시켰을 때에도
부모님은 그런 저를 지켜봐 주셨습니다. 어쩌면 무엇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부모님은 늘 그러하듯 묵묵히 저를 바라봐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님은 자식을 기다려 주십니다. 자식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아들을 그렇게 기다려 줍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요구하는 작은아들에게 아무런 꾸중이나 충고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아들을 바라봅니다.
떠나간 아들을 걱정하며 마음속으로 잘 지내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의 끝, 아들이 거지꼴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괘씸한 마음이 아닌
가엾은 마음으로 달려가 안아 줍니다.
더욱이 아버지는 큰아들도 기다려 줍니다.
큰아들은 아우와 달리 아버지를 섬기며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자기 몫으로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아 서운해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약속합니다.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큰아들을 이해합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차이는 기다림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가,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들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생각에만 집중하여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고, 기다려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기다립니다. 자비로움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와 맞지 않고 내가 이해할 수도 없지만, 조금만 기다려 보는 지혜를 가질 때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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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락 타대오 신부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 7,14-15.18-20 루카 15,1-3.11ㄴ-32
우리 가정에도 복음에 나오는 작은아들 같은 아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시겠지요. 머리로는 이 복음을 이해하려고 애써 노력하지만,
끝까지 작은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작은아들이 집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큰아들같이 마치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면서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사고도 저지르고 반항도
조금씩 해 가면서 그럭저럭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졸라 얻어 내어,
그것을 날려 버리기까지 해야 할 정도로 유산이 탐났을까요?
그러나 만일 작은아들이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끝까지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그는 알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복음의 거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그는 자기가 집에 돌아가면 아들이 아니라
품팔이꾼으로 살아야 하리라고 생각하고 굳게 다짐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어떻게 맞아 줄 것인지를 올바로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그는 아버지를 아직 모릅니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반응은 그가 예상한 것과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 순간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부서지고 깨지고 잘못하고 죄를 짓고, 사순 시기마다 회개한다고 또 애를 쓰지만
매번 같은 죄를 반복하고, 후회하고 좌절하고 …….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은,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찾아가는 우리를 기꺼이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는 계기가 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갑시다.
아버지의 품은 고향의 오솔길처럼 포근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마음의 고향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