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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기표를 통해서 본 현대인의 정서 -이설빈, 최금진, 조정인 시인
불안의 심층심리학 인간은 누구 할 것 없이 삶 속에서 불안을 경험한다. 뜻하지 않게 어떤 사건에 연루되거나 현재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뭔가 훅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인간 존재는 손에 땀이 축축하게 배이며, 입안에 밥이, 밥이 아닌 모래로 굴러다닌다. 시간이 지나도 답답한 가슴은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붉은빛의 경고음만 켜진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 정신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는 순간, 경고음은 꺼지고 방망이질 치던 가슴도 평상시처럼 잠잠해진다. 이처럼 불안이란, “지니고 살기에는 너무 위협적이고 괴로운 자신의 경험, 감정, 충동 등을 억압한 결과로, 내면의 감정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위의 내용처럼 우리 일상의 삶은 그 자체로 불안과 동류항을 이룬다. 불안이 일어나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지만 그것이 지닌 급성적 형태들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이 불안의 형태들은 자본주의 산업화에 의한 속도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죽음, 질병과의 문제, 산업재해와의 관계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우리에게 경고음을 켜는 광의의 불안은 그 이름과 내용만큼이나 다종다양한 기표로 이루어져 현대인의 정신을 뒤흔든다. 2019년 말 경제신문에서는 현대인의 불안에 대해 다루었다. 불안 때문에 한 해 동안 병원을 찾는 사람이 15만 9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3년 전 대비 14.3% 증가율을 보이면서,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이중 적잖은 사람들이 불안한 감정을 자기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주기적 불안과 두려움을 갖는다고 한다. 이처럼 불안은 인간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고통과 두려움 등 스트레스와 우울증의 주범으로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인간이 삶의 국면에 접어들면 조그마한 것 하나라도 생존과 연결되기에 신체와 정신의 균형을 바로잡기란 쉽지 않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회가 설립된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안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2020년 봄호에는 현대인의 불안에 대해 다룬 이설빈, 최금진, 조정인 시인의 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시에서 물질문명, 죽음, 인간관계 등 불안이 일어날 수 있는 요인과 불안의 양태에 대해 지금까지 구현해내었기에 2020년 현재에도 주목받는 시인이 될 수 있었다. 불안에 대한 승화와 자아 해방 단계 불안은 다양한 정신구조를 통해 존재감을 표출한다. 의식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무의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불안은 인간의 죽음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고, 인간관계에서의 다툼과 폭력 때문에 생기는 경우도 있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산업구조가 물질문명과 연결되기에 그에 부합하려는 인간 정신의 긴장감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렸을 때 무의식에 내장된 과거의 사건이나 정황, 사고가 어른으로 성장한 이후에도 불안으로 재현된다. 이 때문에 자아는 무의식의 흡수를 제어하느라 현실에서 창조력과 생산적인 활동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억압받는다. 그러나 비교적 자아가 단단한 현대인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주관적 감정을 잘 조절하고, 현실을 능동적으로 구성해서 삶의 방향에 큰 무리 없이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한순간에 존재하는 역사적 존재이기에 자주 불안과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인간은 불안을 해결해서 자신의 삶을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실제 불안은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불가피하게 오지만 또한 쉽게 극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불안이 올 때 갈등을 해결하고 승화하면 자아 해방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설빈 시인은 2014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을 타면서 시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설빈 시인의 『울타리의 노래』에 나타나는 불안의 일부를 살펴보자. 여기서 무의식적인 불안은 의식과 화해를 통해 승화 단계로 접어드는 자아 해방 단계에 있다. 이 해방 단계는 억압된 무의식이 욕동의 해방을 지향함으로써 완전한 자아의 자유를 성취하고자 하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옥탑방 앞에는 빛나는 위성접시 너의 방 창문에는 벽돌과 벽돌들 그리고 키 낮은 담벼락
나의 지붕은 기와지붕 너의 지붕은 지붕 있는 옥탑방 無窮花 흐드러진 화단
나는 화단을 짓밟고 올라가 지붕을 부수고 -없어 -없다고
나의 지붕은 무너졌고 너의 지붕은 지붕 없는 옥탑방 無窮花 쓰러진 화단 -이설빈, 「태양 없이」일부분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 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아기들은 펜스를 기어서 지나가 마치 펜스라는 게 텅 빈 빨랫줄인 것처럼 사람들, 눈부신 속옷들 바람에 멀리 날려가고 목초지만큼 멀어져가고, 나는 여기, 기다란 그림자 되어 펜스를 넘어서는데 하나, 둘 …… 눈이 멀어 울타리를 지워가는데 펜스를 들추고 넘어가 마치 펜스라는 게 -이설빈, 「울타리의 노래」 일부분
위의 시에서 ‘너’와 ‘나’ 사이를 잇는 것은 오직 ‘태양’ 뿐인데, 시가 「태양 없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인위적이라도 태양처럼 ‘너’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집 옥탑방 앞에 있는 ‘위성 접시’ 안테나이다. 이 안테나의 역할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 등 이미지와 소리를 들려주는 의식의 고양된 힘을 실어주고, 남성적인 힘을 받쳐준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의 소통을 할 수 있는 태양의 유사성은 ‘위성접시’처럼 생긴 안테나인 것이다. 그러나 너는 나의 완벽한 소통에 비해 방 창문 앞에 “벽돌과 벽돌들/ 키 낮은 담벼락”을 쌓아 놓았다. 이는 네가 내게 소통 부재를 선언한 것과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네가 내게 하는 ‘소통 부재와 단절’이 이것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기와지붕”, “지붕 있는 옥탑방”도 그렇다. 다시 말해 이 세 가지는 너를 둘러싼 바깥 세계와 나에게까지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대상이 세계와 단절한 채 소통 부재를 일으키는 행위를 보고, 화자는 지금까지 네게서 참았던 억압의 패러다임을 통해 대상과 충돌하게 된다. 화자는 숨 막히는 주변 환경을 참지 못하고 모종의 방아쇠를 당긴다. 극단적 불안에 대한 처방은 네 옥탑방 앞에 있는 “화단을 짓밟고 올라가 지붕을 부수”는 것이다. 불안을 제거해버리는 화자의 언술이 “-없다”, “-없어”로 나타난다. 즉 지붕을 해체해버림으로써 너의 단절에서 오는 불안이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다. 불안을 제거하는 또 하나의 해방 출구는 화단에 핀 ‘無窮花’이다. 이 ‘無窮花’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곤궁하고 빈한한 꽃이다. 결국, 무궁화는 네가 내게 ‘벽’을 만든 이유가 되고, 그 벽은 너의 외적인 결핍 때문에 소통이 단절된 것이다. 그녀가 불안의 매개체를 날려버림으로써 상황은 종료되고, 다시 교류와 소통의 시간이 도래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안은 왜 일어날까? 너의 결핍 때문이지만, 실제 화자가 드러내는 불안의 이면을 살펴보면, 현재 너와 나의 상황이 과거에 비해 못하거나, 보다 좋은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에 대한 걱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벽은 화자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허물어지고 ‘태양’은 다시 빛나게 되었다. 화자가 자신의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는 하지만 아래 시를 보면 자아의 완전한 해방감을 맛보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화자의 불안은 ‘울타리’에 있다. 화자 자신뿐만 아니라, “아기”, “작은 아이”, “큰 아이”, “사람들” 할 것 없이 인간 존재는 본래적 불안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펜스’를 타 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울타리를 “짚고”가고, “훌쩍 뛰어넘고” 가고, “기어서”서 가고 바람에 날리듯 가고, “긴 그림자”로 넘어간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보면 불안은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역사적인 인간이 시간성을 살아가는 우연적 존재임을 진실로 확인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자의 불안이 “기다란 그림자 되어 펜스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 ‘긴 그림자’의 상징은 화자가 아직도 무의식의 불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이 멀어 울타리를 지워”가는 시행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불안’의 촉발점은 ‘그림자’, 즉 무의식에서 출발한다. 무의식은 화자의 현재를 지배한다. 슬퍼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지워진다’는 것이 화자의 자생력에 의한 극복이 아닌, 시간성에 따른 몸의 퇴화 때문에 무의식이 지워진다는 의미다. 이는 인간 존재의 필수요소인 육신, 영혼, 감정의 발란스가 깨졌다는 의미인데 이로 인해 자아의 완전한 해방감을 맛본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따라서 이설빈 시인의 불안은 자신을 찾아 헤맨 끝에 찾은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쓰기를 통해 내적 갈등을 끝내고 불안이 승화 단계에 이른다. 「13월의 귀가 말해준다」. 최금진 시인은 2001 창비 신인시인상에 당선되어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와 세 번째 시집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을 내놓았다. 이 시집은 사방을 둘러봐도 탈출구가 없는 무의식의 그림자로 포박되어 있다. 그 무의식의 중심에는 삶에 대한 불안이 놓여 있고, 이후, 의식과 무의식의 화해를 통해 승화로 나아간다. 만약, 누군가가 시인에게 불안이 ‘왜’ 일어나느냐고 물으면 그 불안에 대한 시원은 현재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불안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단군신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아담과 하와에 이르러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불안의 시원은 ‘먼지의 나라’인 다른 행성에서 온 아기 「검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불안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을 방증해주는 것이 시집 한 권에 있다. 최금진 시인의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에서 화자의 삶은 어둡고 불투명하며 멸절 불안으로 점철된 무의식의 그림자놀이와 같다.
어머니는 견디라 하고, 아내는 나쁜 놈이라 한다 참과 거짓의 해답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세례 요한은 목이 잘려, 쟁반에 올려진 제 목을 봐야 했다 참이라는 말, 나는 자꾸 그 말의 느낌이 궁금해서 이따금 어머니의 서랍을 뒤지거나 아내의 통장을 몰래 열어본다 내 얼굴에 달린 창문들이 덜컹이는 기분 뱀이 제 꼬리를 먹으며 점이 되어 사라지는 기분 <생략> 아무 것도 믿지 않음으로써 참에 이르렀다는 데카르트는 패배주의자, 그런 점에서 약간의 마법이 필요하다 살아 있다는 증표로 가끔 눈을 깜빡여주는 마법 -최금진, 「마법을 믿을 때」 일부분
내 손 곁에 누워 나를 쓰다듬는다 사랑 얘기, 때려치운 직장 얘기, 성경책을 찢어버린 얘기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나는 토닥토닥 내 손을 두드린다 이 손으로 남은 생애 동안 밥이나 퍼막다 갈 것이다 손 위에 바지랑대처럼 근심을 괴어놓고 바람 좋은 날엔 어머니의 헐렁한 속옷이라도 널어야 한다 남은 게 고작 손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 손은 슬며시 반대편 손을 잡아 가슴팍 위에 얌전히 올려 놓았다 처음부터 이런 순간을 알고 있었다는 듯 심장이 뛰는 소리, 보일러 도는 소리, 창밖엔 눈이 내리고 눈을 감으면 어둠이 사분사분 속삭이는 소리, 나야, 나, 나야 -최금진, 「나의 손」 일부분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광막한 어둠과 마주할 때 누군가에게 해답을 구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바로 ‘참’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할 때이다. 자신의 과오에 대해 어머니는 ‘견디’라 하고, 아내는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이 말속에는 화자가 세계에 대해 ‘진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 예가 기독교 성서이다. 화자는, 세례자 요한이 “목 잘려, 쟁반에 올려 진 제 목”에서 이미 참의 진리를 깨닫고 이를 설화적 기법으로 풀어낸다. 이를 통해 화자는 성화 속 세례 요한처럼 응당 죽음에 처해질 걸 잘 알면서도, ‘참’이 아니길 바란다. 그래서 화자는 어머니의 서랍을 뒤지고, 아내의 통장을 뒤진다. 여 기서 중요한 것은 뒤져도 충분히 ‘거짓’이 안 나오게 되는 경우, ‘참’이 박해의 개념으로 자신을 헤치려 할 때 “내 얼굴에 달린 창문이 덜컹거리는” 것처럼 불안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때 화자의 폭력성은 멸절 불안을 일으킨다. 예컨대, “뱀이 제 꼬리를 먹으며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구순기 어머니와의 대상관계에서 좌절 경험 때문에 나타난다. 화자는 멸절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임의적 불안의 세계로 자신을 투사한다. 여기서 투사의 대상이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는 신 중심 철학에서 신을 버리고 주체 철학인 “Cogito, ergo sum”을 외친다. 막상 주체 중심 이론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데카르트는 ‘참’을 증명하지 못하고 ‘유아론’에 빠지는 패배주의자가 된다. ‘참’이 ‘거짓’으로 드러난 순간 데카르트는 다시 신을 찾게 된다. 화자는 데카르트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매개로 비존재(non being)의 경험인 ‘마법’을 든다. 이 ‘마법’은 모순된 상황에서 “눈을 깜빡여 주는” 눈속임을 통해 잠깐은 거짓을 잠재울 수 있는 환상이다. 하지만 진리란 항구적이고,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것이라서 결국 ‘잘린 목’과 ‘꼬리 잘린 뱀’, ‘신을 버린 주체’는 멸절 불안을 거쳐 죽음이라는 ‘참’을 알게 된다. 화자 역시 ‘참’을 알려는 순간 불안에 휩싸여 ‘진리’를 포기하게 된다. 그에게서 멸절 불안은 무의식의 생산성인 피학성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다. 이와 달리 「나의 손」에서 보면, 화자는 무의식의 멸절 불안에서 의식의 불안으로 전환을 꾀한다. 왜냐하면 화자는 비존재성으로 자신을 타자에게 투사한 것이 죄스럽기 때문이다. 그는 자아 인식을 통해 사물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고 관념으로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화자는 진리의 실패 요인을 ‘손’의 감각에서 찾았다. 이 시에서 ‘손’은 ‘거부’로 나타난다. 즉 사랑에 대한 거부, 직장에 대한 거부, 하느님에 대한 거부이다. 그는 ‘거부’ 때문에 ‘죄의식’과 ‘죄책감’ 그리고 ‘빈곤’을 느끼고 미래를 불안한 전망으로 채운다. 그러나 도구화된 손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 화자는 “어머니의 헐렁한 속옷”을 널어야 하고, “양푼을 긁고 있는 약사여래보살” 「밥을 먹으면 조금 멀쩡해진다」을 책임져야 한다. 그 손에는 마음의 불안이 전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불안에 대한 긴장감은 급성적 형태로 오기 때문에, 그에게 “심장 뛰는 소리”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인 불안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눈을 감으면 근심이 근접해 와서 또 속삭인다. 이때 ‘소리’는 불안의 기표이다. 의식적 불안의 동기가 바로 ‘손’이 도구로서의 역할을 ‘거부’할 때 시작되었다. 하지만 남은 한 손이 한 손을 지각하고 연민과 공감을 표하는 순간, 그의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갈등을 풀고 화해에 의한 승화 단계로 나아간다. 최금진 시인이나 이설빈 시인의 시에서 나타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불안은 인간 화자인데 비해 조정인 시인의 『사과 얼마예요』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의 불안은 타자화된 동·식물이 화자이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무의식의 상징화인 꿈을 통해 죽음을 표상하고 있다. 예컨대, 「부서진 시간」에서는 동물 화자를 내세워 꿈의 상징화인 죽음에 관한 불안을 투사로 드러내고, 「내 잠 속에 기숙하는 자」에서는 자신을 꽃 화자로 전위시켜 죽음에 관한 불안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시인은 탈억압인 승화에 의해 마침내 자아 해방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자아 해방을 부르짖는 조정인 시인은 1998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이 시집 이 외에도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등이 있다. 「부서진 시간」과 「내 잠 속에 기숙하는 자」에서 무의식의 상징화는 꿈을 통해 드러난다.
(라파엘이 슬픈 꿈을 꾸는지 흐느껴 운다. 개의 영혼이 낮의 일을 기억하는 개를 달래며 천천히 눈 물을 핥아준다)
#1 나는 두 겹, 비닐봉지에 싸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푸드득푸드득 발버둥 쳐 보았다. 여자는 고개를 외로 하고 젖은 쓰레기인양 나를 멀찍이 치켜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얼마 후, 나는 곧장 어딘가에 던져졌다. 다만 사랑하는 습성을 가지고 태어난 짐승. 혈관에 미친 바람이 불 때면, 차문이 열리고 어둠 속으로 던져지던 깜 깜한 기억을 좇아……타이어 냄새를 더듬어……심장이 터질 듯……내달렸다. 그런 밤이면 허공을 향해 창자처럼 긴 울음을 울고는 했다. 물 한 모금 없는 거리. 나는 지쳤 다. 그리움이니, 외로움이니, 허기니 하는 귀찮은 거 따돌리 는 데 한 생이 걸렸다. 이제 나는 짐승이라는 철창을 부수 고 환하게 열리는 중이다. 오랜 고립에서 놓여나 개의 시간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중이다. 주검은 외출 중이고, 나는 열 망한다. 다시는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말기를.
#2 개 한 마리 방향의 미열을 따라 길을 건넜을 것인데, 길 건너를 향해 막막한 걸음을 떼었을 것인데, 길 건너는 검 은 미궁이 되고 있었다. 낭패로군. 녀석이 부서진 개의 둘 레를 돌며 습관적으로 벌어진 상처를 핥다가 아직 온기가 남은 주검 속으로 들어가 비스듬히 눕는다. 모든 게 아늑 하고 단촐해졌다. 저의 가장 나중에 깃들어 -조정인 「부서진 시간」 일부분
너는 어쩌다 타인의 잠 속에 기숙하는 거니. 피에 젖은 넝마를 걸친 소년의 목에는 낡은 나무십자가가 목걸이가 걸 려 있다. <중략> 한 잎 한 잎 무량억겁을 더듬는 손끝에서 지난 생의 음 역에선 듯 느린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한때 숲속, 이름 없는 주검 옆에 핀 보랏빛 개양귀비였다.
꿈 속 어떤 장소는 꽃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나무십자가 를 두고 간다. 누군가 흘린 슬리퍼 한 짝을.
-조정인 「내 잠 속에 기숙하는 자」 일부분
현실 문맥에서 보면, 화자는 중층적이다. 전체적인 화자가 있고, #1에서 죽은 ‘개’ 화자가 있다. 현재 전체 화자는 꿈을 꾸고 있는 라파엘을 보면서, 어떤 개의 고통에 공감해서 눈물 흘리는 라파엘의 눈물을 닦아준다. 시인은 독자수용미학 차원에서 이 피조물인 개를 모티프로 차용하여 현대인의 극악함에 경종을 울린다. 이때 전체 화자는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죽어가는 개와 그 개의 모습을 온전히 지켜보는 또 다른 개를 관찰하면서 불안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여기서 개의 ‘죽음’이란 정신, 영혼, 육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주검인 개는 물질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하나의 화자는 시 #1에서의 주체이다. 이 화자는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푸드덕푸드덕 거린다. 이때 불안의 촉발 요인은, 주인이 ‘검은 비닐봉지’ 두 겹으로 자신을 싸는 것에 있다. ‘검은 비닐’은 세계에 대한 폐쇄라는 점에서 ‘죽음’과 연결되고, 죽음 이전에는 불안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 감정에 화자가 대항하다 보면 피로해지고,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화자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어딘지 모를 곳에 내던져진다. 화자는 막막한 어둠속에 놓이면서 극도의 불안을 경험한다. 실제 불안은 행위와 관계된 시간에 찾아오지 않는다. 즉 화자가 “타이어 냄새”를 좇아 심장이 터질 듯 집으로 향할 때는 불안이 엄습해오지 않는다. ‘물 한 모금 없는 거리’에 있을 때,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에 고독처럼 불안이 찾아온다. 그런데 만약 ‘불안’이 ‘물’과 친화적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화자는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곳에 서 있다. 그런 이유에서 화자는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한다. 길 건너에 있는 “검은 미궁”도 자신의 죽음에 또 한몫한다. (「부서진 시간」 #2)」 이때 화자의 불안은 무의식의 상징화인 검은색으로 드러난다. “검은 비닐봉지” 와 “검은 미궁”이 그것이다. 이처럼 화자가 맞이하는 ‘어둠’은 생존을 위한 정신과 영혼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상태를 의미하고, 귀로를 위한 시선마저 강탈당하는 걸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삶에 대한 모색은 퇴로를 차단당한 채 급기야 무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시사하는 것은 개의 주검을 통해 현대인의 잔혹성과 이기적인 속성을 세계에 고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전체 화자는, #1의 화자가 주인에게 어떻게 내버려지고 어떤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렀는지 다 알고 있다. 이것은 #2에서 “길 건너는 검은 미궁”이 있고, 그 미궁은 화자에게 어떤 고통이 다가올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때 전체 화자는 ‘검은 미궁’이라는 무의식의 불안을 라파엘에게 투사시킨다. 라파엘은 “온기가 남은 주검 속에 들어가 비스듬히 눕는” 다. 즉 버려져 죽어가는 개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의 한 속성인 ‘죽음’의 기표는 ‘검은’으로 나타나고, 이는 전체 화자의 내적 불안의 한 표현이며, ‘자아 소멸’을 의미한다. 이후 화자는 「내 잠 속에 기숙하는 자」에서 꿈을 통해 자아 해방감을 맛본다. 자아 해방은 철창에 갇혀 산 고립의 짐승을 벗어나는 것이고, “이름 없는 주검 옆에 핀 개양귀비 꽃”에서 벗어나는 시간이다. 이 시에서 꿈속의 화자는 “개양귀비 꽃”이다. 화자는 꿈에서 ‘개양귀비 꽃’으로 자신을 전위시킨다. 전위란 한 대상에게 자신의 이드 충동을 표출하기 힘들면 그러한 충동을 다른 대상에게 치환시키는 데 여기서는 그 역할을 하는 게 ‘개양귀비 꽃’이다. 이 ‘개양귀비 꽃’ 화자 역시 “꽃가지 부러 지” 듯 고통당하고,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며 죽어간 절대자처럼, 즉 “슬리퍼 한 짝”을 두고 간 소년의 고통과 죽음에 공감한다. 화자는 자신의 죽음과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지는 ‘박애’의 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꽃가지가 부러”지고, “나무십자가”를 두고 간 “슬리퍼 한 짝”을 더듬는 것에서 타진할 수 있다. 화자는 이 예수처럼 피 흘리며 죽어간 소년의 주검과 대면하며 불안한 시간을 견뎌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화자의 ‘무량억겁’은 ‘박애’과 등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화자에게 마침내 “지난 생의 음역에 선 듯 느린 노래가 흘러나온” 다. 따라서 화자는 무의식에서 승화를 거쳐 자아 해방을 하게 된 것이다. 무량억겁의 고통을 넘어서 무의식의 불안을 넘어서려는 이설빈의 시는 주목에 값한다. 이설빈은 불안에 관한 깊은 천착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불안만을 부려놓는 여느 시인들과는 차이가 있다. 이 차별화는 21세기 스마트폰과 사이버 세계 속에 기투 된 현대인의 불안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데서 구별된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가상세계에 빠져서 불안의 요인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현실상황에서 이설빈 시인이 그 점을 다루었다는 것에서 진정성의 몫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설빈 시인은 현대인의 소통 부재가 불안을 야기시킨다고 보았다. 시인은 그 불안의 덮개를 해체해버리고 가난과 빈곤의 벽을 무너뜨리면서 너와 나, 우리의 ‘벽’을 와해시켜버린다. 그럼으로써 그늘진 곳에 태양을 부려놓는다. 불안을 해체하는 방식에서 시인의 적극적인 노력도 있지만 몸의 퇴화현상 때문에 자연적인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다. 이를 자아 해방이라는 주제의식 차원에서 보면 시인은 불안의 해체에 대해 완전한 힘을 얻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이설빈 시인만의 내용은 아니다. 나약한 불안에 대한 해결은 현대 시인들이 가지는 하나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이설빈 시인은 불안에 대한 내구성이 단단해서, 즉 문명과 결부된 현대인의 분열의식을 극명하게 표출한 것에서 시에 반영된 시인의 정신이 고결할 만큼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설빈 시인의 불안에 대한 패러다임이 문제의 요인과 모색에 대한 대안이 분명하게 드러난데 반해 최금진 시인의 무의식의 불안은 환상에 의해 불투명하고 모호한 멸절 불안의식을 내보이고 있다. 이후 그는 ‘신체’를 통해 무의식과 의식의 갈등을 풀고 약한 승화 단계로 나아간다. 그의 불안은 전우주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더 깊이 말하자면 환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불안의 요인은 ‘먼지의 행성’에 젖줄을 대고 있어 불투명에서 약한 투명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대부분의 시인이 시도하기도 힘든 점이다. 그런데도 최금진 시인은 서슴없이 환상을 통해 멸절 불안을 말하고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환상이라고 해도 무의식의 불안 사상에 딜레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불안에 대한 투사를 철학에서 찾는다. 데카르트의 ‘진리’와 이를 증명해주는 ‘성서’는 신 중심과 인간 중심이라는 둘의 ‘참’과 ‘거짓’, 즉 진리의 비교를 통해 불안을 해결하고자 했다. 문제는 ‘참’ 이 진리가 될 때 자신의 행위가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고 ‘마법’을 통해 그 거짓은 진리로 둔갑하게 된다. 이점에서 시인은 현대인에게 나타나는 불안을 편향성으로 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도 그가 ‘이성’이 아닌 ‘신체’에서 오는 힘의 부족함을 직시하고 연민과 공감을 통해 불안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파급력 또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조정인 시인의 시에서 ‘죽음’은 누구에 의해서든 죽을 수 있는 불안에서 오기도 하고, 막막한 중심에서, 그리고 혼자 남겨지는 불안에서 오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무의식의 불안은 꿈의 상징화인 죽음을 통해 자아 해방 단계로 나아간다. 조정인 시인은 시에서 단순한 화자를 들이지 않고 ‘개’와 ‘꽃’의 화자로 투사, 전위시켜 현대인의 잔혹성과 이기적인 속성을 남김없이 고발, 비판하고 있다. 그것이 ‘검은 비닐’과 ‘검은 미궁’으로 나타난다. 개 화자는 죽음의 중심에서 홀로 있다는 불안감에 퇴로를 찾지 못하고, 결국 짐승이라는 창살에 갇혀 정신과 영혼의 균형을 잃고 주검으로 변한다. 꽃 화자는 나무십자가에 박혀 죽어가는 소년의 옆을 지키는 ‘개양귀비 꽃’이 되어 그의 주검과 함께 했다. 이뿐만 아니라,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개에게 투사시켜 죽어가는 타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 주검 속에 들어가 죽어가는 개의 고통과 함께 했다. 이 두 시에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화자의 태도는 ‘고통’과 ‘죽음’을 공감하고 함께 아파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화자는 윤리적 무한 책임을 다한 ‘박애’의 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누가 죽든, 불안에 떨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길만 가는 이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과 비교해보면 조정인 시에서 나타나는 시정신은 박애를 통한 타자윤리 회복, 즉 자아 해방을 실현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조정인의 시는 한국 시단에서 타자윤리의 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2020, 2월호 『문학과 사람』 <권영옥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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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평론가님의 글 참 좋아요^ 세 사람의 시인들이 제가 다 좋아하는 시인들이네요.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