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1983년 12월 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글입니다. 안보신 분들도 계실까봐 다시 한번 올립니다.
(디코에서도 이말했고, 서든 홈에서도 그렇게 말했고, 에뜨랑제님 카페에도 이렇게 올렸으니 난 죽었다 -_-;;)
격침된 수송선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장병 23명이 외딴섬 모래사장에 고무보트를 끌어올려 놓고는 모두 나동그라져 버렸다. 얼마 후 그중 3명이 마실 물을 찾아 맹그로우브 홍수링(紅樹林)속으로 들어갔으나 허탕치고 돌아왔다. 그러자 누군가가 다급하게 "오스트레일리아 군이다!"하고 소리쳤다.
1943년 3월의 일이었다. 12일 전에 연합군 항공기들이 뉴기니와 뉴브리튼섬 사이의 댐피어 해협에서 벌어진 비스마크 해전에서 7000 남짓한 병력과 탄약, 식량을 실은 일본군 수송단을 공격, 수송선 8척과 구축함 4척을 격침시켰다.
일본 육군 제51사단인 통칭 『아까쯔끼』부대의 상등병 오오기 세이지(小城淸二)는 바닷물 속에 내팽겨쳐졌다가 용케도 몸을 추스려서 사람이 가득 찬 고무 구명보트에 기어올랐다. 그들은 음식과 물도 거의 못먹고 9일간 표류하다가 작은 섬에 닿았다. 섬에는 무덤이 하나 있을 뿐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땅을 깊이 파면 물이 나왔으나 마시기에는 너무 짰다. 몇 사람이 코코야자나무에 기어올라가 열매를 30여개 따냈는데 그때 동쪽에 또 다른 섬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사관출신 장교였으나 선임인 스도오 사부로(須藤三郞)소위는 새로 발견한 그 섬에 가보기로 결정내렸다.
그들은 섬에서 하룻밤을 지샌 뒤 다시 고무보트를 타고 그 섬으로 향했다. 거기까지 가는 데 꼬박 이틀이나 걸렸다.
그들은 새로 찾은 섬에 상륙해서 미처 전투태세를 갖출 사이도 없이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 1개 중대는 넉넉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총뿌리를 겨누면서 밀림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전원 후퇴!" 스도오소위는 외치면서 "빨리" 숨으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성난 듯 전의에 찬 오오기의 부하 하나가 미친듯이 죽창을 휘두르면서 오스트레일리아 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오스트레일리아군 한명이 창에 찔려 쓰러지자 나머지 병사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오오기는 전우가 핏기 없는 눈을 부릅뜨고는 소리없는 소리를 지르는 듯 입을 딱 벌린 채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이마에 총알이 박혔던 것이다.
촉촉한 모래사장에서 오오기의 전우들이 고무보트를 파도에 띄우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때 오스트레일리아군 상륙용 주정 4척이 갑(岬)을 돌아 나타나더니 200m 떨어진 곳에 군인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총탄이 마구 스치는 가운데 오오기가 소속된 사단의 일등병 코오노 세이사꾸(河野淸作)가 보트 끝머리에 매달린 채 잔등에 총탄을 맞았다.
"먼저 갑니다, 만세!" 그는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초록색 야전복에 챙이 넓고 둥근 모자를 쓴 오스트레일리아군 증원군이 전투에 가담했으나 총개머리판으로 후려갈겼지 별로 총을 쏘아대지는 않았다. 백병전이 끝나고보니, 일본측은 코오노 세이사꾸를 포함해서 4명이 죽고 또다른 4명이 중상을 입었고, 5명은 경상을 입었으나, 오오기를 포함한 10명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 몸을 가눌 수 있는 15명의 일본군은 단단하고 젖은 모래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채 모두 멍하니 얼떨떨한 표정들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인들은 죽은 4명의 일본군인들을 다리부터 잡고 끌고 가더니 덤불속에 내동댕이쳤다. 그들은 다시 중상자 4명을 끌고 갔다. 배에 총알을 맞은 한 중상자는 줄곳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풀밭 언저리에서 누군가가 명령을 내리자 기관총성이 한동안 요란하게 울렸다. 신음과 비명소리가 뚝 그쳤다. 짧았지만 치열한 전투가 끝나자 12일간의 굶주림과 갈증이
첫댓글 걔들은 죽어도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