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과 평지수훈(마 5:1-2, 눅 6:17)
지난주에는 '창세기 1:3, 요한복음 1:14, 요한복음 6:63'의 말씀을 의지하여 '말씀이 사건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세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다바르(Davar)와 헬라어 로고스(Logos)그리고 레마(Rhema)입니다. 다바르는 사건이 되는 말씀입니다. 로고스는 사람이 되신 말씀입니다. 레마는 생명이 되는 말씀입니다.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로고스가 성령의 조명으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때 그 말씀이 바로 레마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장 1-2절과 누가복음 6:17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가르침으로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누가복음의 평지수훈이 있습니다. 두 수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신 말씀들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이고, 평지수훈은 예수님께서 평지에 서서 제자들과 많은 백성에게 전하신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지만, 평지수훈은 누가복음 6장 17절부터 49절까지 비교적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수훈은 장소와 분량,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와 핵심은 같습니다. 모두 ‘복’으로 시작하고, 중간에는 ‘황금률’이 있으며, 마지막에는 ‘집을 짓는 비유’로 끝납니다. 두 수훈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반석 위에 집을 세워라’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복을 받고,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은 모두 복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은 말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누가복음은 말씀합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0)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는 여덟 가지 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평지수훈에는 네 가지 복과 네 가지의 화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내면적 가난에 초점을 맞추고, 누가복음은 실제로 가난하고 배고프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현실에 관심을 둡니다.
누가복음은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사마리아인, 과부, 고아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했습니다. 누가복음은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하나임이 찬양한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헌신도 누가복음 21장에 등장합니다. 렙돈이란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입니다. 하루 일당이 데나리온인데 데나리온의 1/64이 렙돈입니다.
복은 헬라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로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과 은혜의 상태를 뜻합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빌 4:11).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이 말씀은 바울의 자족 신앙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핵심 구절입니다. 그는 가난할 때도, 풍족할 때도, 배고플 때도, 배부를 때도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바로 이어지는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밝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복은 소유의 많음보다 관계의 깊이에 있으며, 형통한 환경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에 있습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편 23:4)고 고백했습니다. 골짜기가 없어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의 중간에는 인간관계의 원리를 요약하는 황금률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누가복음도 동일한 말씀을 전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
우리는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인간관계에 관한 가장 귀하고 중요한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관계 원리는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 주면 나도 잘해 주고,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면 나도 그를 무시합니다. 사랑받으면 사랑하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상대방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준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황금률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선을 내가 먼저 행하라”는 적극적인 사랑의 명령입니다.
내가 외로울 때 누군가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면, 외로운 사람을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도와주기를 바란다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가 실수했을 때 용서받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의 실수를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Adam Grant)가 인간관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Giver, Taker, Matcher입니다.
Giver는 자신이 받을 보상보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지식과 시간을 나누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합니다.
Taker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자신이 얻는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관계를 협력의 장이라기보다 경쟁의 장으로 보고, 자신이 더 많은 인정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Matcher는 관계의 공평성과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도움을 받으면 도움을 돌려주고, 자신이 준 만큼 상대도 보답하기를 기대합니다. “당신이 나를 도와주었으니 나도 당신을 돕겠습니다”라는 상호주의적 태도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Giver가 성공의 사다리에서 가장 아래에도 있고, 가장 위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적으로 무조건 주는 Giver는 쉽게 소진되지만, 지혜롭게 주고 협력 관계를 만드는 Giver는 장기적으로 가장 큰 신뢰와 영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건강한 인간관계는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지혜로운 Giver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지만, 무분별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모든 사람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않으셨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며 자신의 영혼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이나 더 머물렀다가 가셨습니다.
어리석은 Giver는 거절하지 못한 채 계속 베풀다가 자신은 탈진되고, 상대방에게는 의타심과 무책임을 더 크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Giver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돕는 사람입니다. 상담의 상황에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문제를 대신 풀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함께도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반석 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은 모두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로 끝납니다. 마태복음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4) 누가복음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눅 6:48)
두 사람이 각각 집을 지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집이 비슷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지붕을 만들고 문과 창문을 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날씨가 평온할 때는 두 집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치자 기초의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크게 무너졌습니다.
인생에도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 때가 있습니다. 질병의 비가 내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의 홍수가 밀려오며, 관계의 갈등과 상실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때서야 우리가 무엇 위에 우리의 인생을 세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삶의 기초를 점검해야 합니다. 건강과 재물과 사람은 소중하지만 영원한 반석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만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2026년 네팔 홍수의 직접 원인은 히말라야 고지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빙하·암석 붕괴였습니다. 폭우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빙하와 기반암이 한꺼번에 무너져 거대한 토석류가 계곡을 따라 하류까지 쓸어내리며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네팔 북부의 주변 건물들이 급류에 휩쓸리는 가운데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가족의 생명을 지켜 낸 ‘청록색 주택’이 있습니다. 수많은 집과 도로, 다리와 차량이 휩쓸려 갔지만, 피아쿠렐 가족이 살던 청록색 집은 거센 물살 속에서도 골조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집을 ‘기적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집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단한 암반 위에 깊고 튼튼한 기초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집’은 홍수가 나지 않은 집이 아니라, 홍수 한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은 집입니다.
신앙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아 고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으며 순종할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은 ‘복’으로 시작하여 ‘황금률’을 거쳐 ‘집을 짓는 비유’로 끝납니다.
이 구조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신앙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성장하며,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참된 복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이웃을 대접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반석 위에 집을 세우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반석 위에 집을 세우자"
이것이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기도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길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소유만을 복으로 여기지 않게 하시고,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참된 복을 누리게 하소서. 가난하고 배고프며 눈물 흘리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위로와 사랑을 함께 나누게 하소서.
다른 사람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게 하소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며, 미움 대신 사랑을, 저주 대신 축복을, 정죄 대신 자비를 선택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순종하게 하시며,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와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굳게 세우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