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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7장 1절 ~ 10절
요시야의 아들 시드키야왕이 여호야킴의 아들 코니야를 대신하여 통치하였으니,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이 그를 유다 땅에서 왕으로 삼았더라. 1)
And king Zedekiah the son of Josiah reigned instead of Coniah the son of Jehoiakim, whom Nebuchadrezzar king of Babylon made king in the land of Judah. 1)
드디어 예루살렘성이 함락이 되어 느부캇넷살이 왕을 시드키야로 세우는 모습입니다. 여호야킴왕이 겨울궁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보낸 두루마리를 불태우던 여유도 이젠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신하들과 그 땅의 백성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주의 말씀에 경청하지 아니하리라. 2)
But neither he, nor his servants, nor the people of the land, did hearken unto the words of the LORD, which he spake by the prophet Jeremiah. 2)
위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도 자신의 고집으로 살아가는 시드키야왕과 그 신하들이 괴팍한 사람들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키야왕은 우리와 닮았습니다. 시드키야왕을 우리가 닮은 것이 아니라 시드키야왕이 우리를 닮았다고 봐야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더 숫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시드키야의 고집은 세상적 시각을 놓치 못하는 저와 당신에게 있는 상식입니다.
우리가 운이 없게 마지막때를 살아가므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인류는 전쟁과 기근, 질병의 고통속에서 이 땅을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이 없는 시대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가난한 자들까지도 먹을 걱정을 하지 않는 인류역사상 유일한 세대입니다. 마지막심판을 겪는 세대가 어느 세대인지는 몰라도 그 세대 또한 유일한 세대가 될 것입니다.
시드키야는 주의 말씀앞에서 자신의 상식을 내려놓지 못하여 파멸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서도 발견이 됩니다. 당연히 살아오던 삶의 방식은 사람들의 인정과 시간의 깊이가 있다고 해도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앞에서 상식을 벗어나 순종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드키야왕은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괴팍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세상의 것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효종이 병자호란에서 그의 아버지 인조가 청의 모욕을 당한 것을 갚겠다고 북벌론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괴뢰정권이었고, 거기에다 쿠데타로 얼룩진 조선왕실은 그럴 능력도 힘도 의지도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기분에만 의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그들은 계속 청의 지배속에서 굴욕적인 자세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런데 청의 누루하치와 홍타이지는 조선왕실과 형제입니다. 조선 백성과 조선의 왕실은 민족이 다르지만 청의 왕실과 조선의 왕실은 같은 민족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에 가장 슬픈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누르하치는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묘사하며 임진왜란에서도 도우려고 했고, 후에도 조선을 침략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혼군(惛君)이라 불리울 정도의 멸시의 대상인 인조는 그 자신의 정체성도 모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사내아이였던 것입니다.
혼군 시드키야, 선조, 인조, 고종
우리文化遺産 톺아보기 - 안타까운 古 역사의 ..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어찌보면 시드키야왕은 효종보다도 나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일관되게 가졌고, 실행에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조선의 역대왕들의 모습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시각은 사람의 시각일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시드키야는 침략자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신념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을 수 있으나 그의 불순종은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비겁한 조선의 괴뢰 왕들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앞에서 사람의 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의 의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려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의를 존중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 자신안에 있는 의로 인하여 스스로 멸망하는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시드키야왕이 있다면 아마 사람들은 영웅시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경고되는 것은 사람의 의와 순종을 잘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구별은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잘못하면 시드키야처럼 멸망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드키야를 그저 못난이로 치부할 만한 자격이 저나 당신도 못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시드키야왕인데 시드키야왕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 자신도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시드키야왕이 셀레먀의 아들 예후칼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파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이제 우리를 위하여 주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였더라. 3)
And Zedekiah the king sent Jehucal the son of Shelemiah and Zephaniah the son of Maaseiah the priest to the prophet Jeremiah, saying, Pray now unto the LORD our God for us. 3)
그때 예레미야는 백성 가운데서 오고갔으니 이는 그들이 그를 감옥에 넣지 아니하였음이라. 4)
Now Jeremiah came in and went out among the people: for they had not put him into prison. 4)
이런 모습을 전문용어로 양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앞에서 양다리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을 보시는 분으로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다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종교통합은 불교나 천주교나 이슬람이나 힌두교나 부두교등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진리의 말씀에는 조금의 거짓도 섞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종교통합은 그대로 하나님의 대적하는 것이고, 시드키야의 이런 행동은 종교통합과 같은 위선적인 기만인 것입니다.
그때에 파라오의 군대가 이집트에서 나오니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칼데아인들이 그들의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을 떠났더라. 5)
Then Pharaoh's army was come forth out of Egypt: and when the Chaldeans that besieged Jerusalem heard tidings of them, they departed from Jerusalem. 5)
칼데아인들은 예루살렘이 다시 파라오의 군대에게 포위당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철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신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점령해보았으니 그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빌론의 군대는 철수를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O 그때에 주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니라. 6)
Then came the word of the LORD unto the prophet Jeremiah, saying, 6)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내어 묻게 한 유다 왕에게 이같이 말할지니라. 보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온 파라오의 군대가 자기 땅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며, 7)
Thus saith the LORD, the God of Israel; Thus shall ye say to the king of Judah, that sent you unto me to enquire of me; Behold, Pharaoh's army, which is come forth to help you, shall return to Egypt into their own land. 7)
enquire 1.문의하다 2.조사하다
시드키야왕은 주의 뜻을 예레미야를 통하여 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청과 순종은 다른 것임을 시드키야왕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은 선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드키야왕은 예레미야를 풀어주고, 주의 뜻을 들으려했지만 그의 마음은 주의 뜻에 순종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에 주의 뜻이 시드키야왕과 일치했다면 시드키야왕은 주저없이 실행하는 순종을 이뤄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적인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시드키야에게 주신 상황처럼 우리의 순종도 우리의 뜻에 거스르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에 맞는 순종만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은 시드키야왕과 같은 사람들이며, 시드키야의 결말로 향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환난은 진정한 순종을 확인하기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자신의 본질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물어보는 복이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순종하지 못하겠다면 시드키야처럼 위선떨지 말고,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는 것이 그나마 마음고생을 덜할 것입니다.
인내가 필요없는 환난전 휴거가 자신의 뜻에 합당하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믿음이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살아있는 믿음으로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생각하기 이전에 제 자신부터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왜냐면 한국교회는 곧 제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칼데아인들이 다시 와서 이 성읍을 대적하여 싸우고 취하여 불사르리라. 8)
And the Chaldeans shall come again, and fight against this city, and take it, and burn it with fire. 8)
against는 거슬러 대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칼데아인들은 반드시 우리에게서 떠나리라." 하지말라. 그들은 떠나지 아니하리라. 9)
Thus saith the LORD; Deceive not yourselves, saying, The Chaldeans shall surely depart from us: for they shall not depart. 9)
침략자들이 떠나고 다시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사람인 저는 인지상정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러한 마음이 자신을 속여 말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신을 속인다는 것은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 피해는 멸망입니다. 멸망은 육신의 소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구원의 언약을 스스로 파괴하는데에 이를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경험으로도 주의 뜻과 나의 뜻은 일치하는 않는 경우를 발견합니다. 이때 자신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여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록 너희가 너희를 대적해 싸우는 칼데아인들의 온 군대를 쳐서 그들 가운데 부상자들을 남긴다 해도, 그들이 각기 자기 장막에서 일어나 불로 이 성읍을 사르리라. 10)
For though ye had smitten the whole army of the Chaldeans that fight against you, and there remained but wounded men among them, yet should they rise up every man in his tent, and burn this city with fire. 10)
지금 당장은 바빌론군대가 떠나고 이집트 군대가 도와주러 올 것같아 승산이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예측은 하나님의 계획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드키야의 양다리는 사람의 예측과 하나님의 계획을 저울에 놓고, 선택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의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서 눈에 보이는 일루미나티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경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모든 권력을 가진 일루미나티를 당해낼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부정부패와 살인으로 전세계 경제를 장악하였고, 부정선거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들을 상대할 자가 없어보여도 일루미나티는 파멸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일루미나티가 세련된 엘리트나 부자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냥 악마입니다. 살인과 배신과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더러운 영의 소유물일뿐입니다.
지금 당장은 그들의 백신과 5G와 각종 테러에 고통을 당하고 속수무책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군의 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영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자들을 두려워하거나 물러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대로의 승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더러운 일을 하는 것은 그의 직분을 하는 것이며, 우리가 놀라거나 두려워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양다리는 신중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파멸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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