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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 (22편) *
얼뜨기 중종과 조광조의 좌절 조광조의 기신재와 소격서 혁파
조광조는 중종 10년에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가38세인 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가 조정에서 활약한 기간은 겨우 4년이 채 안 되었으나, 그 사이에 그는 조선 역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조선에서 조광조처럼 불과 4년 만에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대사헌까지 오른인물은 일찍이없었으며,그때 그의 나이 겨우 38세였다.
(에궁~아까버라.)
조광조는 젊은 시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반정 등의 사건들을
보면서 조선의 기강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명제를 품게되었다
즉 세조의 왕위 찬탈이나
연산군의 폭정 등이 모두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은 왕과
신료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힘을 얻기 시작한 조광조는 사림의 선두가 되어 기신재와 내수사의 이자놀이를 혁파했다
기신재란 고려 때부터 내려온
궁중의 불교행사였다
조선이 비록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고는 있었으나,
왕실과 민간에는 아직도 불교가 광범위
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기신재를 혁파해
왕실의 비용을 줄이고, 가난한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한 내수사에 제한을 가하려 했다
기신재를 혁파한 조광조는 다음
으로 소격서를 철폐하려 했다
소격서는 나라에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옥황상제와 노자
에게 제사를 지내는 도교의 관청 이었다
(노자에게 빌면 노잣돈을챙겨주려나?ㅎ)
조선 초부터 왕실에서는 왕실의
일원이 병이라도 나면 소격서에서
쾌유를 비는 제사를 수시로 지내곤 했다
중종이 소격서 철폐를 거부하자
대간들은 일제히 사직했다
(워~매 간뎅이가 불때로 부은겨..)
소격서 논쟁은 정승들이 대간들의
편을 들어 철폐에 찬성하자 중종은 소격서를 철폐하고 말았다
(뭬여? 칼을 뽑았으면 두부라도 썰었어야지~헌칼인듯?)
* 현량과 실시 *
승승장구 사림파들이 성리학적
질서를 세워가는 동안 조광조는
조정의 실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훈구 대신들이 조광조를
견제하기 시작하자 조광조는
일시에 자기의 세를 불리기 위해
'현량과' 제도를 추진했다
현량과는 과거제가 아니라 추천제로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과거제로 세를 불리자니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찾은 대안이
'현량과'였던 것이다
당시 중종도 훈구파와 맞설 세력을 키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조광조의 의견이 받아 들여져 중종 14년 천거된 120명을 심사해 28명이 급제 했다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때 쌍기의
건의에 의해 중국으로 부터 도입 되어 조광조의 시대까지 중앙의 관리를 선발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요한 제도였다.
그러므로 이 제도에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하려는 노력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이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국가 지배체제의 핵심을 개혁하려는 대단히 과감하고도 위험한 시도였다
자연히 그에 대한 반발도 심해 조정 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었으며, 조광조는 현량과가 실시되던 해에 실각하고 말았다
조광조가 실각한 후 현량과는
폐지되었으며, 현량과를 통해
합격한 자들은 자격을 도로 빼앗기고 말았다.
(이런이런 ~애기한테 주는 사탕도 아니고..합격자들 성질겁나게 났겠네 좋다 말았네. 서~~벌..)
* 토지개혁과 위훈삭제 *
당시 조선에는 노비가 전 인구의
1/3 정도나 되었다.
잘 나가는 집안은 노비가 1만명이 넘는 경우까지 있었다(공갈같은냄새가 풍기는데 ~~.)
가난한 백성들이 흉년이 들어 호구를 해결할 수 없으면 스스로 부잣집의 노비로 들어가거나,
병역이나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노비가 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었다.
(흐음..배고픈 소크라테스 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는군~)
조선초에 토지개혁을 실시해 백성
들이 일시 땅을 소유했었으나 공신들이 급증해 땅을 점유하자 땅이 없는 백성들이 늘어났고
빈익빈 부익부가 심각한 사회
현상이 되었다
그래서 조광조가 생각해 낸 방안이 위훈삭제였다
즉, 공신들을 다시 심사해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이 된 자의 자격을 박탈해 소유한 땅을 환수하여 토지개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종 14년 대사헌이 된 조광조와
대사간 이성동은 위훈삭제의 칼을 빼어들었다.
지금까지 나라에서 그냥 퍼준 넓은 땅에, 많은 노비에,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편히 잘 먹고 잘살던 공신들에게서 편안함 과부를 몽땅 환수 하는 작업이니 반발이 얼마나 심했을까?
(그래서 가진게 없는 나는 뺏길것도 없어유~ㅎㅎ)
대간들의 위훈삭제 상소에 중종이
망설이자 대간들은 총 사직으로
맞섰다
(요럴때는 단결하나는 끝내주는군)
중종과 대간들의 힘 겨루기는 정승들이 조정하여 결과는 사림의승리로 끝났다.
117명의 공신중 76명의 녹훈이 삭제된 것이다
녹훈이 삭제된 공신들은 토지와
노비를 몽땅 국가에 반납해야
했다
비록 사림파가 커다란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그들의 집단행동과
뜻을 관철하려는 과격한 방법에
겁먹은 머저리 중종은 이미 조광조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림파가 일하는 방식에 겁을 먹은 중종은 반정세력과 손을 잡고 조광조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요런것을 보고 토사구팽이라 했던가?)
훈구 공신들은 중종의 이러한 의도를 눈치채고 조광조를 모함하기 위해 별 수를 다 썼다
공신들 중 녹훈을 빼앗긴 심정과 남곤은 홍경주와 모의해, 희빈 홍씨를 시켜 매일같이 조광조를 씹게 했다
(이를 이불속 송사라 하지?)
남곤은 더 구체적인 모함을 하기위해 꿀로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 쓰고 벌레가 파 먹게 했다
'주초'란 조광조의 한문 성인 '조'
자를 파자한것이고 "조씨가 왕이
된다" 는 뜻이다
남곤은 벌레가 파 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 안으로 흘려
보냈다
'주초위왕'의 나뭇잎을 보자 점점 불안해진 머저리 중종은 홍경주를 통해 남곤과 심정을 만나 밀지를 내려
조광조를 비롯한 그 일파를 모조리 잡아 들이게 했다.
조광조가 하옥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성균관 유생 천여명이
대궐 앞에 상소를 올리고 통곡 했다
그 중 일부를 잡아 가두었으나 서로 갇히려 하는 바람에 옥이 좁아 더 가둘 수 없어 결국 사흘만에 모두 석방하고 말았다.
*기묘사화(1519)와 조광조의 죽음 *
드디어 조광조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었다
국문을 담당한 추관들은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지어 사사로이 세를 불려 영달을 꾀하였으니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이런 죄는 경국대전 에는 없었다 국문을 받은 조광조 일파는 모두 30대 초중반의 선비들로 당당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영의정 정광필이 중종에게 눈물로
호소하여 조광조는 참형에 처하지
않고 유배로 낙착되었다.
조광조 일파가 몰락한 후 현량과는 폐지되었으며, 소격서는 부활했고 위훈삭제된 공신들은 모두 복원되어 전답과 노비들을 돌려받았다.
(이런~써글것들!)
조광조는 유배된 지 한달만에 사사되었다
당시 조광조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 선비였는고 하니,
그가 저잣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 앞에
엎드려 "우리 상전이 오셨다"며
예를 갖추었다 한다
모지리 중종은 사림파의 기세가
무서운데다가 조광조의 개인적인
인기가 너무 치솟자 위기 의식을
느끼고 위훈삭제된 훈구파의
공격을 빌미삼아 조광조를 죽여
버렸다
이로써 개혁의 한가닥 희망이
끊어지고, 조선은 16세기가 시작된 중종 때부터 완연히 기울어져 쇠퇴의 관성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광조의 유교적 왕도정치 실현
시도에 대한 평가는 율곡이 그의
저서 '석담 일기'에 수록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개혁실패를
아쉬워했으나 조광조의 정치력
미숙과 성급함을 탓하고 있다
조광조는 중종 다음을 이은 인종의 유언에 따라 신원되었고,
선조대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모셔져 조선 왕조 성리학의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명기 황진이 *
조선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기생
황진이는 중종대에 활약했다
원래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기명은 진이 또는 명월로 전한다
황진이는 기생의 딸이었기 때문에
기생이 되었을 것인데 '소호당 문집'은 황진이가 기생이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황진이를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은 총각이 있었다
그 총각의 관을 끌던 말이 황진이
집 앞에 도착하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 황진이가 입던 속옷을 관에 덮어주니 그때야 말이 움직이더라는 것이다
하여튼 황진이는 이 일로 크게
느낀 바가 있어 만인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기생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말이 관을 끌었다는건 쫌 거시기 하네?)
황진이와 서경덕(서화담) 사이에
있었던 일화는 유명하며,
이로인해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는
'송도삼절'로 꼽혔다. (흐미~이쁜 것!)
당시 서경덕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농막을 지어 토함 이지함 같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경덕에게 반한 황진이가 뻑하면 술병을 들고 찾아와 꼬셔보려고 엄청 애를썼는데 결국 별 볼일이 없어서,
술값만 없앴다는 스토리~
(황진이가 꼬시는데 안 넘어가는
남자가 있었다니. .혹 거시기?)
지족선사 스토리도 유명하다
이 양반은 30년 면벽하고 내려왔다가 황진이가 꼬시자 그대로 자빠지는 바람에 30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는 스토리이다
아니.. 달마대사는 10년 면벽에 불교 종파를 하나 세웠는데, 30년 면벽했으면 공중부양이라도 해야 되는것 아녀?
여기서 웃기는 이야기 하나! 지족선사의 대선배인 지수선사 라는 고승이 부처님 시대에 살았다.
어느 날 지수선사가 부처님을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부처님."
"오, 지수군, 한동안 안 보이더니
그래 어떻게 지냈나?
몸이 좀빠졌는데."예, 30년 면벽을 마치고 막 출관했습니다.
""호오~장하군! 그래 무엇을깨달았는가?"
방금 갠지스 강 위를 걸어서 건너 오는 길입니다.
"옛날에는 도가 트면 물 위를 걷는것이 기본이었다.
예수님 봐라~부처님도 가끔 인더스, 갠지스 강을 걸어서 건너 다녔고
바쁠 때는 날아 다니셨다"
대단한 일을 했군! 가서 쉬게나~
돈 있으면 가다가 보신탕이라도 한 그릇 하든지."
"예, 안녕히 계십시요."
지수가 나간 다음 부처님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미친 놈! 뱃사공에게 50전만 주면 건널 수 있는것을 30년씩이나 걸리다니.."
부처님믿는분들 죄송합니다~^^
(크흐~빵 터지시길..)
황진이는 40대 초반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기가 죽으면 매장하지 말고 까마귀, 솔개의 밥이 되게 해달라고 유언을 했다 한다
엄청 아깝다. 똑똑하고 예쁜데다
재주까지 있는 여자가 타고난
신분때문에 평생을 기생으로
살아야했고, 게다가 일찍 죽었으니.. 쯧쯧(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 있는 난 왜~~분명 이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은게야~흐흑흑)
*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23편) *
독살당한 인종과 마마보이 명종
오늘은 오래 전 방영했었던
'여인천하'를 떠올려 보시기를..
(뭬야? ㅎㅎ)
* 인종의 죽음 *
거의 40년이나 공밥을 축내던
중종(11대)이 드디어 죽고
세자 이호가 30세에 인종으로 즉위
한지 겨우 8개월만에 후사 없이
병사(?)하자12세의 이복동생 경원 대군이 즉위하여 명종이 되었다
세자 이호가 1544년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으로 즉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가졌다
인종은 호학이었으며, 사림파를
좋아해 문풍이 다시 불 것을 기대
했으나
아깝게도 재위 8개월만에 (독살의심 ? ) 사망하고 말았다
야사에서는 대비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했다고 전하고 있다.
"언제 우리 모자를 죽일거요?"
하며 평소에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가 하루는 문안을 드리러 온
인종을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맞더니 다과를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맛있게 다과를 먹었는데,
그 후앓기 시작하더니 결국 숨을
거두었다
(오잉~당나라의 측천무후와 견준다 하더니..ㅉㅉ)
인종실록'은 인종의 사인을 중종
의 장례 때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상했기 때문이라 하였는데
젊은 사람이 며칠 울었다고 죽어?
실록의 기록은 소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이듬
(에~효! 믿을게 하나도 읍당께요)
인종이 죽은 후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즉위했으며인종의!
외삼촌으로 인종을 지지했던 윤임과 유관, 유인순, 이휘 등이 참형에 처해졌고 많은 사림들이 귀양을 갔으니, 이것이 을사사화다
요대목에서 잠깐 을사사화란?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명종 즉위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왕실 외척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수많은 선비들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조선 시대의 4대 사화(무오, 갑자, 기묘, 을사) 중 마지막으로 일어난 대규모 숙청 사건입니다.
*사건의 배경*
대윤(大尹) vs 소윤(小尹) 중종의 뒤를 이을 왕위 계승권을 놓고 외척 세력이 두 파벌로 나뉘어 대립하며 시작되었지요.
(드디어 전투가 시작됐네)
대윤(윤임 일파):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중심으로 세자(훗날의 인종)를 지지했꼬.
소윤(윤원형 일파):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문정왕후의 아들(훗날의 명종)을 지지했네요.
*전개 과정*
인종의 즉위: 인종이 즉위하자 처음에는 대윤 세력이 권력을 잡는 듯했으나,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하게 됩니다.
*명종의 즉위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12세의 어린 나이로 명종이 즉위하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이에 따라 소윤 세력(윤원형 등)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숙청의 시작*
윤원형 등 소윤 세력은 "윤임이 인종 승하 당시 다른 왕족을 추대하려 했다"는 반역 음모를 조작하여 대윤 세력과 그들을 따르던 사림파 인물들을 제거하기 시작.
*결과 및 영향*
*인명 피해*
윤임, 유관, 유인숙 등 대윤의 핵심 인물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으며, 이들과 가까웠던 이언적 등 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화를 입었습니다.
*외척 치세의 시작*
이 사건 이후 척신(외척)인 윤원형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고, 문정왕후가 생존해 있는 동안 외척들의 전횡이 극에 달했습니다.
*사림의 위축과 재기*
사림 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향촌으로 물러났으나, 이후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힘을 길러 선조 대에 이르러 다시 중앙 정계를 주도하게 됩니다.
사실 인종은 하늘이 낸 효자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효자였으며
주관이 뚜렷한 군주로서 부왕
중종에게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의
신원을 명했고, 조광조의 정책이
었던 현량과를 회복하도록 유언을 하고 죽었다.
어쨌거나 아버지 보다, 동생 명종보다는 백 배 나은 인물이었다.
*부패한 암탉 문정왕후*
동생인 명종을 즉위시키려는 문정왕후 일파의 유언비어와 모함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종은 덕이 있고 총명하여 성군의 자질을 지닌 왕으로서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로 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
인종이 죽고 난 후 경원대군 명종이 12세의 어린나이로 왕위를 잇게 되자 모친인 문정왕후가 8년간 섭정을 했으며,
그 바람에 명종 재위기간 내내
사화가 그치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얼마나 못됐는고 하니,
제가 원하는 일이 있으면 메모지에 적어 명종에게 보냈다.
그래도 지 아비보다 덜 멍청한
명종이 메모지에 요구한 것이
말이 안되면 모친의 명이라도 듣지 않았다
그러면 문정왕후는 왕을 불러놓고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한다.
야, 니가 누구 덕에 왕이 된 줄 알아? 망할 자식, 왕이 되더니 뵈는게 없구나!
너 종아리 걷어!"
(설마 요케 말하진 않았겠지?
사극 멘트로 알아 들으시길..ㅎㅎ)
왕인 명종에게 욕을 해대고, 귀싸대기를 때리는가 하면 종아리도 쳤다니..
참으로 썩은 암🐓 이고, 암🐕같은 왕후였다(당신 같은 여인네가 있어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생긴겨~~물어내! 물어내 ㅠㅠ)
멍청하지는 않았으나 심신이
약해 빠졌던 명종은 이렇게
제 어미 에게 얻어 맞으며 살다 22년 동안 아무것도 한 일 없이 죽었다
게다가 세자도 일찍 사망해 후사가 없자, 왕위는 중종의 제 9자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하성군에게 돌아가 이 하성군이 선조가 되었다.
족보상으로 따지면 꿈도 못 꿀
왕자리가 그냥 얻어 걸린 것이다
이 선조대에 조선 최대의 옥사인
기축옥사와 조선 최대 참사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무능하고 비겁한 데다 모질고 시기와 질투에 찬 정말 싸가지없는 왕
선조 때문에 조선 백성 들은 엄청난 고생을 해야했다
하여간 얼뜨기 중종과 소인배 선조 둘이 재위한 기간만 거의1세기다.
(이룬..된장! 조선은 이때 망했어야 했는가?)
참! 명종이 아무것도 안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아주 잘한 것이
있다
1555년 왜구들이 배 7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 강진, 진도 일대를
침범하여 해안 일대를 점령한 후
약탈 방화를 일삼았다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으로
하여금 대규모의 토벌대를 파견
하여 겨우 왜구를 섬멸할 수 있었다
이를 을묘왜변이라 하는데,
명종은 왜구들이 육지에 상륙
하기 전에 바다에서 초전박살 내기 위하여 판옥선을 개발하여 실전에 배치했다.
요대목에서 잠깐!!
* 을묘왜변이란? *
(을묘왜변은 1555년(조선 명종 10년)에 왜구가 전라도 달량성(지금의 전남 해남) 등 남해안 일대를 대규모로 침입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해적 행위를 넘어 조선의 국방 체계를 뒤흔든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발생 배경 및 경과*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로 인해 통제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조선과의 무역이 제한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왜구들이 대규모 함대(약 70여 척)를 이끌고 침공했습니다.
*침입*
왜구는 해남의 달량성을 함락시키고 어란포, 장흥, 강진 등 전라도 연안 지역을 휩쓸었습니다.
*조선의 대응*
전라병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초기 대응에 참패했습니다.
이후 조정에서 파견한 이준경, 김경석 등의 관군이 영암 전투에서 승리하며 왜구를 격퇴했습니다.
*사건의 결과와 영향*
을묘왜변은 조선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국방 정책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비변사(備邊司)의 상설화*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가 정식 상설 기구로 확립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조선 후기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핵심 기구로 성장하게 됩니다.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 도입*
기존의 진관 체제(지역 방어)의 한계를 느끼고, 유사시 주변 병력을 한곳에 모아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는 대규모 동원 체제인 '제승방략'으로 방어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대일 관계 단절*
일본과의 모든 공식 교역이 일시 중단되었으며, 나중에 국교가 재개될 때도 교역량과 입국 인원을 엄격히 제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의의*
을묘왜변은 훗날 발생할 임진왜란의 전초전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조선은 이 사건을 통해 국방의 허점을 깨닫고 비변사를 강화하는 등 대비책을 세웠으나, 근본적인 병력 부족과 군역의 문란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더 큰 전란인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이 결단 때문에 바로 선조 대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에서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싸라비요~판옥선!)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 (24편)*
을사사화ㅡㅡ(1545)
조선의 왕비 중에는 특히 윤씨가 많았는데 중종의 두 왕비도 모두 윤씨였다.
그 중 장경왕후의 집안이 대윤,
계비 문정왕후의 집안을 소윤이라 불렀다.
장경왕후는 다음 왕인 인종을 낳았으며, 문정왕후는 자식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두 동생인 윤원로와 윤원형을 동원했다.
인종의 죽음에 소윤이 책임이 있다고 믿은 대간들이 윤원로를 탄핵하자, 문정왕후는 할 수 없이 윤원로를 실각시키고 대신 윤원형을 내세웠다.
문정왕후는 윤원로를 실각시킨
배후에 장경왕후의 오빠인 형조
판서 윤임이 있다고 믿어 몰래
윤원형을 시켜 윤임을 치죄 하도록 했다.
문정왕후의 밀지와 윤원형일당의 모함으로 윤임을 비롯한대윤들은 죄도 없이 모조리 지방으로 유배되고, 윤원형 일파가 권세를 잡게 되었다.
(같은 집안끼리 잘들 하고 있네~
완죤 콩가루 집안이여! 인절미 대령할깝쇼?)
유배를 당한 윤임, 유관, 유인숙이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들을 사사하라는 명종의 명이 도착해 있었다
대윤일파가 사그리 죽자
윤원형, 정순봉, 이기, 임백령,
허자 등이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문정왕후와 간신들이 짜고 고스톱 쳐서
반대파를 숙청한 다음 그것도
공이라고 저희끼리 나눠 먹은 것이다.
(마음 같아선 요케~)
사화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윤임을 사사한 직후 경기도 관찰사 김명윤이 역모를 고변 했다 윤임 일파가 윤임의 조카인 계림군 이유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모의를 했다는 모함이었다
계림군 이유는 행실이 바르고
호학이라 왕족 중에서도 명성이
자자했으나 서자 였으므로 왕위에 오를 희망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사림을 제거할 좋은 기회로 본 소윤파는 이를 역모 사건으로 확대 조작했다
즉시 계림군 체포령이 떨어지자
겁먹은 계림군이 도망쳐 역모는 사실이 되어버렸고 계림군과 함께 교유했던 인물들, 윤임을 모함할 때 반대했던 신하들이 줄줄이 엮여 잡혀와 모조리 참형에 처해졌다.
하여간 모함으로 죽은 쓸 만한인재가 조선조에 수백 명은 될 것이니, 이런 인재들이 나라를 이끌어갔으면 조선은 아마 신라 보다도 더 긴 왕조가 되었을 것이다. 🐕만도 못한 것들!
* 간신배의 아이콘 윤원형 *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대표적인
간신인 윤원형은 본부인을 내쫓고 기생 출신인 첩 정난정을 정경부인 으로 봉했다
그는 난정이 낳은 서자들을 적자로 만들었으며, 서자들도 벼슬에 나갈 수 있도록 법을 바꾸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는 10여 채가 넘는 대저택을 지어놓고 비단 휘장을 치고 금은 그릇으로 밥을 먹었으며,
궁궐에서 처럼 팔진미를 넣어 끼니마다 1만 전을 썼다고 한다
더구나 형인 윤원로가 대우에
불만을 표하자 죽여버렸다
이러한 부패와 패륜에 조정신료
들과 온 백성들이 모두 치를 떨었고,
사관들도 윤원형을 '개만도 못하다' '벌레나 다름없다'
등 으로 악평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잘 나가던 윤원형도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으며,
3사에서는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평소에 외삼촌 윤원형의 행실을
떫게 보았던 명종은 윤원형을
파직하고 낙향시켰다
윤원형이 힘을 잃고 낙향하자 윤원형의 처소에 돌이 날아들고 화살이 꽂혔다
겁이 난 윤원형은 정난정과 노비
몇만 데리고 산으로 숨어들었다.
언제 자신들을 잡으러 금부도사가
내려올지 전전긍긍하고 살던 어느날, 옆동네에 다른 죄인을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가 내려왔다
그러자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것으로 안 정난정은!독을 마시고 자살했고, 윤원형은 죽은 아내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다가 자신도 뒤를 따랐다.
(거봐! 지은대로 벌을 받는거라구요~)
윤원형을 내친 명종은 내내 병을
앓다가 2년 만에 죽었다
어머니 문정왕후의 등쌀과 외숙부
윤원형의 전횡으로 재위 내내
아무것도 못 해본 채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윤원형의 종말을 보고 생의 의미를 다시 새겨라!
( *****후보들 잘 듣고 있제?)
* 대도 임꺽정 *
임꺽정은 홍길동 시대가 한 세대
지난 16세가 중반인 명종 14년
(1539)부터 출현해 처형당한 명종 17년까지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조선의 대표적인 도적 우두머리였다
임꺽정이 활약하던 시대는 윤원형의 부정부패로 관료들의!수탈이 심해진데다가 여러 해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했을 때였다
막강한 관군의 체포작전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이 3년씩이나 도망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의 비호 덕이었다
임꺽정의 무리는 양반과 토호의!집을 습격하거나 공물을 털었고,대낮에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등 그 대담함이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들은 관아의 옥을 부수고 동료들을 구출하거나 관리들을 살해하는 등 공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은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임꺽정의 소굴을 습격하다가 살해되었으며,
부장 연천령은 선전관 정수익과 함께 500여 군사를 거느리고,
구월산을 공격하다가 역시 살해
되었다
임꺽정이 토포군에 몰려 한 민가로 숨어들었다
임꺽정은 주인 노파를 위협하여
"도둑이야!" 라고 외치게 한 다음
자신이 뛰쳐나가 도둑이 달아난다고 소리쳤다
관졸들이 임꺽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몰려가자 그는 관졸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려 했다 그때 임꺽정의 모사였던 서림이 "저 사람이 임꺽정이다!" 라고
외쳐 그는 끝내 부상을 당한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덴쟝~ 그 모사는 어찌 되었지?)
벼슬아치의 탐학이 심해지면서
생활이 파탄에 다다른 백성들은
관군을 격퇴하는 임꺽정의 대담함에 대리만족을 느꼈고, 그의 행적을 미화시켰다!
뒤에 홍명회가 이러한 구전설화를 바탕으로 임꺽정을 의적으로 그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