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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열기는 없고 온기만 있어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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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03 03:41
- 열기는 없고 온기만 있어도
오늘 주님께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 대해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전보다 덜 괴로워하는 저를 보게 되어서 적지 아니 기쁩니다.
이전 강론을 보면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 했던 짓을 제가
그대로 했기에 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많이 곤란해했기 때문입니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니 실천하지 못할 강론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하나? 아니면 그래도 해야 하나?
하는 짓마다 위선이니 위선을 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나 그래도 선행을 실천해야 하나?
그러나 지금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처럼 그렇게 곤란하거나 괴롭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지 않으니 일거에 많은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으니
가르칠 일이나 지시하는 일이 적어졌고,
남을 판단하는 일이 적어졌고,
시키지 않고 제가 손수 하는 일이 많아졌고,
벌어져 있던 관계가 많이 좁혀지고 소원했던 관계가 많이 친밀해져
너희는 모두 형제라는 오늘 주님 말씀이 좀 더 실현된 것 같습니다.
물론 한결 나아졌다는 것이지 만족할 정도는 아닙니다.
더 낮아져 바닥까지 내려가야 하고
나이를 더 먹으면 틀림없이 바닥까지 내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저의 지향은 좀 달라질 것입니다.
더 낮아지는 것은 저절로 그리될 것이고,
그러니 내가 낮아지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형제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제 옆에 있으면 작아지고,
제가 옆에 있으면 불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듯이 있어서 편하고 다만 사랑의 온기를 나누는 관계가 되면 좋겠습니다.
열기는 이제 없을 것입니다.
온기만 있어도 될 것입니다.
큰 사랑은 없어도 하느님 사랑만 있으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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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사순 제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예언자가 전하는 정의의 소명!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과 이웃과의 전적인 일치(radical unity)가 곧 참된 치유의 길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하느님의 회복하는 정의
예언자가 전하는 정의의 소명
2026년 3월 2일 월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의 개념을 뒤집으셨다고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지금까지도 정의란 잘못한 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성경의 예언자들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의란 악인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몇몇 사람만 지적하고 나면, 우리는 스스로를 "공정한 사회"라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대한 불의와 속임수로 가득한 체제를 고발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죄책과 책임을 함께 짊어지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선을 위한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더 중요한 도덕적 소명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예언자들은 시작했습니다. 공동선이 초점이 될 때, 설교는 개인에게 죄책감과 수치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비전을 제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됩니다.
역사가 필요로 했던 것은 땅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긍정적이고 영감을 주는 보편적 비전이었습니다. 개인의 죄를 집요하게 지적하고 잘못한 이들을 단죄하는 방식은 몇몇 사람들을 부끄러움 안에서 반쯤 억지로 순종하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사회적 변화를 이루는 데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의 뚜렷한 실패였습니다. 보복적 정의는 결국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과 창조 안에 깃든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긍정적 인식 위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는 스스로를 갉아먹지만, 긍정적인 에너지는 새로운 비전을 불러일으킵니다.
히브리 예언자 아모스가 보여주는 긍정적 비전은 무엇일까요? 그의 예언 마지막 부분을 읽어 보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보상과 기쁨은 내세가 아니라 바로 이 땅과 이 세상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모스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근본적이고 온전한 일치만이 우리를 참으로 치유하고 성장하게 합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AA)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깊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 것입니다. AA는 상처에 대한 개인적 책임, 내적 체험으로서의 '더 높은 힘'(하느님 체험), 그리고 지속적인 소그룹 실천을 강조합니다. 이는 건강한 종교가 지닌 모든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마지막 구절들에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과 실패를 여전히 탄식하면서도 하느님을 더욱 자비롭고 더욱 동정심 깊으신 분으로 바라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새롭게 보여주며, 이해의 혁명을 열어 갑니다. 이제 정의는 더 이상 보복이나 처벌이 아니라, 온전한 재질서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은 '너희를 사랑하여 마침내 나를 사랑하게 하리라'는 철학으로 드러나며, 이는 모든 예언자들이 따르게 될 새로운 길의 모범이 됩니다. 아모스는 보복과 처벌에서 벗어나,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제키엘,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삶 안에서 완성될 새로운 계약, 곧 회복하는 정의로 나아가는 분명한 전환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꾸는 사건이며, 적어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리처드 로어 신부의 통찰처럼, 그리스도교가 거래적 관계로만 이해될 때 예수님의 메시지는 죄책감과 심판으로 축소됩니다. 저는 젊은 시절 그러한 종교적 메시지에서 멀리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마더 데레사의 삶 속에서 드러난 ‘변화의 그리스도교’를 발견하면서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내적 인도는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곧 ‘섬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이시며 오직 사랑뿐이십니다!
—Dave A.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Prophetic Wisdom for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Books, 2025), 26–28.
Image Credit: Jordan Heath, untitled (detail), 2018, photo, New Zealand,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과 호수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의 큰 분수령을 봅니다. 복수 없는 정의가 넓게 흘러가며, 우리를 우리의 상처와 원한보다 더 큰 사랑 안으로 이끌고,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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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지금 다시 시작합시다!~~~
오늘날 많은 언어에서 '바리사이'라는 말은 '위선자'와 동의어처럼 쓰입니다. 이는 마태오 복음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예수님의 말씀,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위선자들아!"라고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르치는 일부 내용의 가치를 인정하시며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다 지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삶과 가르침 사이의 괴리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율법을 해석하는 권위를 주장했지만, 자비 없이 율법을 적용하며 다른 이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신들은 특권을 누렸던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죄인을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요르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마르코 1,9). 그러나 거짓된 종교인은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며, 자기 안의 죄와 상처를 인정하지 못한 채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합니다. 결국 그들의 설교와 가르침은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사랑이 없기에 모두 헛된 것이 됩니다. 한 원로 사제가 젊은 사제들에게 했던 말처럼,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발 강론하지 마십시오." 참된 진리는 사랑 안에서만 선포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 진리조차 증오와 위선으로 오염됩니다(에페소 4,15).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사라졌지만, 교회는 여전히 전례 안에서 그들을 자주 만나게 해 줍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그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다음 내용은 어느 신부님의 글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한 소년이 자기 여자 친구에게 보낸 편지로 시작합니다.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마리에게, 내가 느낀 큰 불행은… … 우리의 사랑을 깨뜨린 이후부터였어.
부디 나를 다시 받아주길 바래.
그 누구도 내 마음 속에서 네 자리를 대신할 수 없어. 그러니 제발 나를 용서해 줘. 나는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영원히, 너의 지미
추신: 그리고… 주(州) 복권에 당첨된 것 축하해!"
편지 속에는, 겉으로는 사랑과 회개의 말이 가득하지만, 끝에는 전혀 다른 관심사(복권 당첨 축하)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자주 드러나는 위선적이고 계산적인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사랑과 진실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 이익과 체면을 챙기려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러한 "위선적이고 전술적인" 태도를 버리고, 겸손과 진리의 길을 따르라고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3장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지적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주장했지만, 실제 삶에서는 무거운 짐을 다른 이들에게 지우고 자신들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 중 옳은 부분은 지키라고 하셨지만, 그들의 삶과 가르침 사이의 괴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과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위선과 계산으로 가득한 사람인가?"
예수님의 예언자적 꾸짖음은 단순히 과거의 바리사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그 모습은 반복됩니다. 그렇기에, 생애 말년의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처럼, 우리는 매일 복음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추며, 겸손과 사랑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지금 다시 시작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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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누울 자리’, ‘일자리’, ‘아버지 자리’, ‘앞자리’, ‘윗자리’ 높이와 위치와 순서와 역할 등등~.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곧 자리에 합당하지 않는 일들을 고발합니다.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23,3-4)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23,5)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잔치집에서는 윗자리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23,6-7)
흔히, 오늘날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군중과 제자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곧 그들의 말과 행실이 모순되고 언행이 불일치한다하더라도, 혹은 행실이 비록 모범이 되지 못한다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실행하고 지키는’ 겸손함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는’ 분별과 지혜를 가르쳐주십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요?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지요?
진정, ‘배우는 자의 자리’에 있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늘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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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흔히 위대한 인물을 이야기할 때 그의 성공과 영광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서는 인물을 그렇게 단순하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빛과 그림자를 함께 기록합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한 왕이었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지도자였으며, 시편을 남긴 시인이었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용모가 뛰어났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기름 부으신 이를 해치지 않았던 인물로도 기억됩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은 결코 영광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고, 정욕에 눈이 멀어 부하의 아내를 취했으며, 충직한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가정 안에서는 더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아들들 사이에 폭력과 살인이 있었고, 결국 압살롬의 반란으로 늙은 나이에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다윗의 삶은 한마디로 말하면, 실패와 상처가 끊이지 않았던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서가 다윗을 위대한 왕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았고, 변명하지 않았으며,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잘못했을 때 회개했고, 고난의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뉘우치고 돌아온다면, 비록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겠다.”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인간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라, 돌아올 줄 아는 인간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과 교만을 매우 단호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가르침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자신들은 그 짐을 함께 들 생각이 없습니다. 기준은 엄격하지만 책임은 회피하고, 율법은 강조하지만, 자비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태도를 위선이라 부르십니다. 이 말씀은 단지 2천 년 전 바리사이들만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가장 먼저, 가장 무겁게 들어야 할 사람은 어쩌면 사제들일지도 모릅니다. 성서를 해석하고,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전하는 사제가 혹시 말은 하고 있으나 삶으로 책임지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신자들에게는 성사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정작 성사로 가는 길을 어렵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한 교우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글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깊이 상처받은 한 영혼의 고백입니다. 큰 눈 폭풍으로 미사에 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미사를 봉헌해 주는 본당 공동체를 부러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본당 교우가 선종하셨을 때, 병자성사를 세 번이나 요청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고백 소 앞에 줄을 서 있어도 고백성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두 주일 동안 성사를 보지 못한 신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강론 시간에는 성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으며, 예수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합니다. 그러나 그 교우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성당에서 특전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시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강론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모든 것이 진실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신앙의 중심은 설명의 완전함이 아니라, 진실함의 체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사는 신자들의 삶에서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살리시는 통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제직은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흘러가도록 길을 내어 주는 자리입니다. 성사를 쉽게 열어 주는 것이 사제의 약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함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사순 시기는 남을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다면, 비록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눈처럼 희게 빚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살게 하소서. 회개할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을 저희에게 주소서. 저희 모두가 섬김의 자리에서 다시 주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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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높은 자리!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다 부질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특별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성구 갑’입니다. 성구 갑은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작은 통입니다. 유다인들은 작은 성구 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성구 갑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지요.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구 갑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습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구 갑!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과시욕이 지나쳤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의 극치에 달했습니다.
“이것 한번 봐주세요! 이 멋진 성구 갑을! 내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을 애지중지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극진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칭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에 반하며 사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이중성, 과시욕과 허영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공허한 의(義)를 가차없이 폭로하십니다. 그들의 공허한 의는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참된 의와 극명하게 비교·대조되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신앙과 이중적인 삶, 그로 인한 철저한 몰락과 멸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강력한 경고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늦었지만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높은 자리!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강력한 질타를 받고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처신 하나하나를 묵상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어찌 그리 제가 살아온 지난 모습과 닮아있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 5-7)
돌아보니 수도자요 사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젊은 시절부터 윗자리에 자주 앉았습니다. 수도회 내 이런저런 보직을 담당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한 마디 할때도 많았습니다. 미사 때면 잠자리 날개처럼 화사하고 질감 좋은 제의를 차려입고 사람들 앞에 자주 섰습니다.
그런 삶이 지속되다 보니 부끄럽게도 스스로 뭐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난감해하였을까 생각하니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지경입니다.
늦었지만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높은 자리!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높은 자리!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 결국 그 자리는 낮은 자 되어 이웃을 섬기라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리라는 것.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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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3,1–1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한 신앙”을 경계하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첫자리, 윗자리, 인사받기, 선생이라 불리기”를 좋아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결론처럼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초대 교부 대 바실리오는
교회의 직무와 덕행이
사람 위에 서기 위한 권리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낮추는 사랑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에게 ‘높아짐’은 위험한 유혹입니다.
왜냐하면 높아질수록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의로움’에 기대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꾸짖으시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을 자기 과시의 도구로 만드는 마음입니다.
신앙이 사람을 살리기보다
사람을 눌러버리는 순간,
그 신앙은 이미 성령의 숨결을 잃습니다.
대 바실리오가 말한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용기입니다.
섬김은 약자의 포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방식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으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살 수 있도록 조용히 낮아지는 길을 걷는가?
주님,
제가 신앙을 사람 위에 서는 도구로 쓰지 않게 하소서.
칭찬을 얻기보다
사람을 살리는 섬김을 선택하게 하시고,
큰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
사랑으로 낮아지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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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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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20 추가
<위선자들이 위선으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2-12).”
1) 이 말씀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위선자들이 ‘위선’으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만족감, 사람들의 존경, 그리고 물질적인 이익 같은 것일 텐데, 하느님으로부터 얻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위선으로 얻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것, 허망한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거짓 예언자들’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물 없는 샘이며 폭풍에 밀려가 버리는
안개입니다.
그들에게는 짙은 암흑이 마련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실없이 큰소리치면서,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갓 빠져나온 이들을 육체의 방탕한 욕망으로 유혹합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신들은 멸망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굴복을 당한 사람은 굴복시킨 쪽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2베드 2,17-19).”
이 말은, ‘거짓 예언자들’에 관해서 한 말이지만,
‘위선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위선자들의 실제 삶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겉모습만 보면서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존경하는 일이 많은데, 그런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이라는 말씀에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로데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을 하고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때에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다. 그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사도 12,21-23).”
<헤로데는 연설을 잘했던 것 같은데, 그 자신의 위선과 교만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재능이 되어버렸습니다.>
3) 바오로 사도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1-15)”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라는 사도들의 말은, “너희는 모두 형제다.” 라는 예수님 말씀에 연결됩니다.
남들보다 먼저, 그리고 남들보다 더 많이 성경과 교리를 배웠다고 해서, 남들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4) 태어날 때부터 ‘위선자’인 사람도 없고, 태어날 때부터 교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에 취해서, 또는 자기는 남들보다 잘났다는 착각에 빠져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위선자가 되고,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처음부터 위선자였던 것은 아닐 것이고, 사람들의 존경에 취해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그리고 경건하고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칭찬을 받는 신자들도 모두 그렇게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함정에 많이 빠지는데, 그렇게 되면
위선자가 된 줄도 모르는 채로 위선자로 살고,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채로 교만하게 살면서, 자기 생각만 옳다고 믿어버리고, 남들을 가르치려고만 하고, 그러다가 결국 ‘하느님 없이’ 살게 되는, 겉은 멀쩡한데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수아비’ 같은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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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사순 제2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23,1-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지난 주 내내 묵상했던 ‘대당명제’에서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셨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비판의 수위를 높여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십니다. 그건 바로 율법을 지키려면 이래야 한다 혹은 저래야 한다고 말은 많이 하면서, 정작 자기들이 내뱉은 대로 실행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지요. 그들이 종교 지도자라는 특별한 지위를 차지한 것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겨준 특별한 유산, 즉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사람들에게 잘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어야 할 중요한 소명을 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큰 책임을 맡은 만큼 큰 권한을 받은 것인데 예수님은 이를 ‘모세의 자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시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큰 권한을 받아 휘두르면서도, 정작 그 권한에 따르는 책임은 다하지 않았습니다. “~해야 한다”라고 자기 입으로 내뱉었으면 자신이 먼저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였어야 하는데, 말만 앞세우고 실행은 하지 않는, 다시 말해 말한 그대로 살지는 않는 위선적이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 겁니다. 그러면서 그런 자기 모습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 저런 예외규정들과 첨부사항들을 누더기처럼 덧붙여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글자 그대로 지키라고 강요했지요. 그리고는 그것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으로 자신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사람들을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기에, 그건 그들에게 큰 권한을 맡기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큰 잘못이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나서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동과 삶으로 ‘내실’을 튼튼히 다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높아지는 방법, 즉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크고 특별한 존재가 되는 방법은 심판과 단죄로 다른 이를 헐뜯어 그들을 억지로 내 발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다른 이들이 내 안에 사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는 것 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 때문에라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만큼 그분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인 나도 존중하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의 반대로만 하면 됩니다.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며 솔선수범하면 됩니다. 겉으로만 선한 척 하지 말고 하느님의 선을 내 안에 가득 채우고 실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를 당신 나라에서 참으로 큰 사람으로 인정해주시고 특별히 사랑해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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