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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년~1860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독일어: Arthur Schopenhauer 아르투어 쇼펜하워, 독일어 발음: [ˈaɐ̯tʊɐ̯ ˈʃoːpənˌhaʊ̯ɐ])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독일의 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에 대해서는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철학(인식론)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에 출간하였다. 대학강의에서 헤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서 줄곧 독자적인 연구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이후 <여록과 보유>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1820년 대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에 관해 알게 되었다. 이 종교들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과 칸트가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먼 과거의 동양 사상가들이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환경, 언어,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학의 과제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철학의 세련된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한 철학자이자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독창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 19세기 말에 유행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1788년 2월 22일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793년(5세)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자 가족이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함부르크의 집.
1797년(9세) 여동생 아델레가 출생했다. 아버지가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친구 집에 쇼펜하우어를 맡겼고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2년 간 지내며 프랑스어를 익혔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프랑스어를 확실히 익히길 원했고 결과에 만족스러워했다.
1799년(11세) 프랑스에서 돌아와 상인 양성기관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4년 간 공부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1800년(12세) 아버지와 함께 하노버, 칼스바트, 프라하, 드레스덴을 여행했다.
1803년(15세) 상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은 상인이 되기 싫어하는 쇼펜하우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런던에 도착하여 신부 랭카스터의 집에서 머물며 영어를 익혔다.
1804년(16세) 프랑스를 여행했으며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돌아왔다. 쇼펜하우어는 여행 도중에 사색하며 많은 일기를 썼는데 진지한 고민이 많았다. 단치히에서 상인 실습을 시작했으나 무관심했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며 문학, 수학, 역사 등을 독학했다.
1805년(17세)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자살한 걸로 추정됨.
1806년(18세) 아버지 사망 후, 가족이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쇼펜하우어만 함부르크에 남아서 상인 실습을 지속했다. 쇼펜하우어는 몰래 근무지를 이탈하여 골상학으로 유명한 프란츠 요제프 갈의 공개강연을 들으러 가기도 했고 아버지의 희망대로 상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1807년(19세)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한 후에 고타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엄청난 열정으로 학습했다. 고전어를 가르친 교사들은 쇼펜하우어가 미래에 뛰어난 고전학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쇼펜하우어는 1년도 못가 김나지움을 자퇴했다.
폴란드 그단스크(옛 단치히) 쇼펜하우어의 생가.
1808년(20세) 쇼펜하우어는 에르푸르트를 방문했다. 마침 프랑스 황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국제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어느 극장에서 나폴레옹이 주최한 연극들이 공연되었는데 쇼펜하우어는 관람할 기회를 얻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는 나폴레옹에게 욕설을 해대더니 연극이 끝난 후에는 나폴레옹에게 극찬을 해대느라 호들갑떠는 여성관객들(지위 높은 귀족여성들)을 쇼펜하우어는 신랄하게 비난했다.
1809년(21세)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함.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더 흥미를 두었다. 대학에서 화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 언어학, 법학, 역사 등 여러 강의에 적극 참여해서 공부함. 집에 돌아와서도 사색하며 꼼꼼히 공부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학교의 몇몇 천박한 교수들의 강의보다도 이미 죽고없는 과거의 위인들이 남긴 작품들이 더 가치있을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강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과 논평을 많이 썼으며 몇몇 교수들의 의견을 비판하고 논리적으로 박살내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습득한 당대의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1810년(22세) 철학자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Gottlob Ernst Schulze)의 강의를 들었다. 슐체에게 특히 플라톤과 칸트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스승 슐체의 진지한 조언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끼침.
1811년(23세) 어머니가 당시 독일 문학계의 거장인 크리스토프 빌란트에게 쇼펜하우어가 철학 전공을 못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부탁함. 78세인 빌란트는 23세의 쇼펜하우어와 만나서 설득은커녕 쇼펜하우어의 태도에 감명받아 자상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함. 가을에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 베를린대학에서는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생리학, 시학, 어류학, 식물학, 조류학 등 여러 강의를 들음.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당대의 유명 학자였던 셸링, 피히테의 사상을 공부했으나 회의를 품고 이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내었고 일기에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특히 피히테에 대해서는 "대중 앞에서 웅변을 토해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심오한 사상가인 척하는 사기꾼" 정도로 평가했다. 반면에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 잘 통한 일도 있었는데 바로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의 강의였다. 볼프가 주도하는 고대 그리스 역사와 철학 강의에 쇼펜하우어는 존경심을 표했다.
1812년(24세) 플라톤, 임마누엘 칸트 등 여러 사상가를 본격적으로 탐구함.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의 영국 사상가를 깊이 탐구함.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지만 매우 실망하고 말았다.
1813년(25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연합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사이에 전쟁이 재발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을 떠나서 루돌슈타트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이 논문을 예나의 튀링겐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증정했다. 괴테는 이 논문을 보고나서부터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지지하였다. 수개월 동안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에 관해서 연구하고 토론했고 괴테는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괴테는 가끔 쇼펜하우어를 자기 집에 초대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1814년(26세)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우파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를 읽고 탐구했다. 어머니와 쇼펜하우어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이 일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나 편지교류는 가끔했다.
1816년(28세) 괴테와 색채론에 관해 교류하여 얻은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가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실험을 토대로 뉴턴의 색채론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괴테는 제자에게 비판받은 이 일을 베를린의 친구 슐츠에게 편지로 알렸고 약간 언짢았으나 쇼펜하우어를 대견스러워했다.
1818년(30세) 일생의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다. 자신의 책이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던 쇼펜하우어는 1년 동안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자신의 책을 몰라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동시대 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차올랐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며느리(오틸리에)와 친분이 있던 자기 여동생의 편지를 통해 괴테가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직접적으로 칭찬하지는 않았다. 책 출판을 기념삼아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1819년 봄에는 나폴리를 방문했다. 나폴리에서는 영국 청년들과 교류했다. 쇼펜하우어는 영국을 평생 동안 동경했으며 영국인들조차 쇼펜하우어가 영국인인 줄 알 정도로 완벽한 영어발음을 구사했다. 어머니가 파산위기에 처하자 속히 귀국하여 도와주웠으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낭패를 겪고 말았다.
1819년(31세)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강사직을 지원했다.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희망했다.
1820년(32세) 채용 여부가 결정되는 시범 강의에서 통과함. 당시 50살이었던 노련한 헤겔이 쇼펜하우어와 강의 중에 약간 논쟁했다. 강의 계획은 1820~1822, 1826~1831년까지 수립돼 있었지만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끝남. 이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은 강단학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몽상적인 이론을 퍼트려서 대중을 속여먹는 저열한 사기꾼, 대중들의 두뇌를 해치는 넌센스 삼류작가, '철저히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이라며 비난했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는 자기 책에서 독일 젊은이들과 자기 세대 사람들이 헤겔의 이론을 공부하느라 두뇌를 손상시켰고 인생을 허비했다며 매우 한탄하고 있다. 더군다나 헤겔의 이론은 당대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하며 정치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라는 것을 대학교에서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여겼고 교수들의 파벌 자체를 증오했다.
1822년(34세)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이탈리아의 문화, 예술, 환경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서 배우고 기록했다.
1823년(35세)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옴. 여러 질병과 청각장애를 겪었는데 가장 울적한 시기를 보냈다. 뮌헨에서 겨울을 보냈다.
1824년(36세) 가슈타인(스위스), 만하임, 드레스덴에서 체류함. 쇼펜하우어는 "멀쩡히 잘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나와 수준이 대등하다고 여기는 인간들과 가급적 사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일기에 쓰며 고독한 심정을 드러냈다. 겨울에 데이비드 흄의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등을 번역할 계획이었으나 도와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악평이 좀 나오기도 했으나 작가 장 파울은 호평했다.
1825년(37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우울한 나날 속에서 스페인어를 열심히 학습해나갔다. 번역가로서 스페인어책을 번역하기도 함. 언어능력만큼은 나날이 좋아졌는데 예전에 익힌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외에 스페인어에도 매우 익숙해졌다.
1831년(43세) 이 해에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833년(45세)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정착함. 유행이 지난 옷을 항상 입고 다녔으며 애완견을 데리고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고 혼잣말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의 희한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쇼펜하우어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쯤에 쇼펜하우어는 여동생과 어머니와 편지교류를 했고 작품활동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1835년(47세)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세상을 떠난 괴테를 위해 기념비 건립 계획을 세웠다. 쇼펜하우어는 당국에 괴테 기념비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인류를 위해 온몸으로 활동한 정치인들, 군인들, 개혁자들같은 위인들을 기념하려면 전신상으로 해야하지만 머리를 써서 기여한 문학가, 철학자, 과학자들을 기념하려면 흉상을 제작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완성된 괴테의 전신상 기념비는 매우 볼품없었고 훗날 미술사학자 프란츠는 이 기념비에 대해 '국가적 재앙'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1836년(48세) 자연과학이 증명해낸 것과 자신의 학설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 매우 꾸준히 학문에 매진했다.
1837년(49세) 쇼펜하우어는 <순수이성비판> A판(1판)을 B(2판)판보다 중시하여 칸트전집 출판에 개입했다. 칸트전집 출판에 관여한 로젠크란츠 교수는 쇼펜하우어의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1판 원고를 실어 출판했다.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8년(50세) 모친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72살의 나이로 사망함.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9년(51세) 현상논문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함.
1840년(52세) 현상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를 가지고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으로 지원했지만, 학술원은 '이 시대의 대단한 철학자들'인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당한 판정을 했고 수상하지 못함. 이후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판정'이라 취급했고 이 판정에 반론하는 글을 추가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헤겔을 심각하게 비난한 것은 인정하지만 헤겔이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1841년(53세) 두 현상논문을 묶어서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함.
1842년(54세) 여동생 아델레를 20년만에 만남.
1844년(56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판이 완성됨. 제1판의 재판과 함께 출판함.
1845년(57세)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쓰기 시작함.
1846년(58세)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우어를 만나 제자로 지냈는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열혈 추종자다. 특히 법조인들이 열혈팬이 되었는데 이들은 <관념론의 잘못된 근거>에 "세계가 후회의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번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올 것"라고 썼다. 쇼펜하우어는 판사 요하네스 베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을 글로 쓰지 않았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냄.
1847년(59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 번역을 비판하며 가급적 해설서도 참고하지말고 그 나라 언어를 배워서 원서를 볼 것을 강조한다.
1849년(61세)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남. 여동생 아델레가 사망함.
1851년(63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수 년간 집필한 끝에 출간함.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은 얼마못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고 많이 팔려나갔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1853년(65세)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인 존 옥센포드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소개하여 최초로 영국에 쇼펜하우어를 알림. 독일의 여성 언론인 린트나가 이를 다시 독일어로 번역하여 베를린의 포스신문에 발표하였다.
1854년(66세)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헤겔의 '교수 파벌' 때문에 독일 철학계가 오염되었다고 엄청난 비판을 하며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려는 것은 인생낭비에 불과하니 자신의 사상과 칸트의 사상을 공부하라는 충고를 한다.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40여년 간 독일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기극을 사람들이 눈치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칸트 이후에 등장한 간사한 사기꾼들이 써낸 철학서적들과 한심한 논쟁들을 통해 하나의 진리라도 밝혀졌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하찮은 철학교수라 불렀던 셸링이 사망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니벨룽겐의 반지'의 헌정본을 보냈다. 쇼펜하우어가 바그너를 알게 됨.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게 혹평을 받고 냉대받았으나 개의치않고 기뻐했다.
1855년(67세)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가 '쇼펜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상 과제를 제시함. 여러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함.
1857년(69세)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가 본대학교와 브레슬라우대학교에 개설됨.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이 영국, 프랑스에 번역됨. 쇼펜하우어는 이 시절의 심정을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8년에 이 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박람회를 구경했다. 유럽에는 매우 드문 오랑우탄 한 마리가 전시되었다. 자주 찾아가서 관찰했으나 관찰할 기회를 너무 늦게 만났다며 한탄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오랑우탄을 볼 기회를 꼭 잡으라고 촉구했다.
1858년(70세) 쇼펜하우어 70살 생일 파티가 열렸고 신문 기사에도 생일파티 소식이 실렸다. 유럽 각지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를 뒤늦게 회원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1859년(71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출간됨.
1860년(72세)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폐렴 증상을 겪었고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사망했다.
1815년 청년기의 쇼펜하우어
인식론
충족이유율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논문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인 충족이유율(충분근거율이라고도 불린다)의 종류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선 쇼펜하우어는 옛 철학자들이 인식이유와 원인을 혼동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특히 그는 이 혼동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의도적으로 범했는지 상세히 설명한다. 데카르트는 원인이 요구되는 곳에 인식이유를 밀어넣어서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길을 만들었고, 스피노자는 이 혼동을 범신론의 기초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충족이유율이 모든 학문의 핵심원칙이라는 것을 최초로 제시했지만, 이유율의 두가지 의미를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두 이유율의 차이를 처음으로 설명한 것은 크리스티안 볼프다. 그러나 볼프는 인식의 충족이유율과 원인작용의 충족이유율의 차이를 명백히 규정하지는 않았다. 칸트가 "모든 명제는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한다"는 인식의 논리적 원칙과 "모든 사물은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선험적 원칙을 구분할 것을 강조한 이후에 비로소 인식이유와 원인이 정확히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식이유와 원인간의 구분 외에 두 가지의 이유를 더 구분하여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네 가지 충족이유율을 제시한다. 충족이유율은 표상(Vorstellung)으로서의 세계가 따라야 하는 법칙이다. 생성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인과적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이고, 인식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개념적으로, 존재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공간적-시간적으로, 행위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동기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다. 이와 같은 충족이유율을 해명함과 동시에 쇼펜하우어는 이유율이 적용될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에까지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당대의 강단철학, 즉 헤겔같은 학자들의 행태를 비판한다. 이로써 쇼펜하우어는 칸트철학의 본래적 의미가 현실적으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생성의 충족이유율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최초원인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원인은 하나의 변화로서, 인과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은 변화에 선행하는 변화를 무한히 찾는 것을 의미하므로, 변화하지 않는 질료의 최초상태는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초원인(제1원인이라고도 불린다)으로서의 신을 설정하는 우주론적 증명을 칸트가 논파했는데도 "절대자"가 최초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강력히 비판한다. 인과관계에 대한 기존의 광범위하고 애매한 표현은 숨겨진 신학적 의도에서 기인하며, 변화에 선행하는 실체를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에는 신학자들의 의도가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물질과 자연력이 모든 인과관계에서의 본질이라고 본다. 물질은 모든 변화의 담지자이며, 자연력은 모든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인식의 충족이유율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오성(Verstand)에 의해 만들어진 표상을 결합하는 이성(Vernunft)의 역할만을 인정하고 '실재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이성의 능력'을 부정한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선천적인 것은 인식의 형식적 부분에 제한되어 있을 뿐, 인식의 재료는 예외없이 외부로부터, 즉 감각으로부터 시작하는 물체계에 대한 객관적 직관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직관을 개념으로 가공하는 것이 이성이다. 따라서 이성은 전혀 아무런 내용도 갖고 있지 않고 형식을 가질뿐, 내용은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즉 오성이 만들어낸 직관적 표상으로부터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충족이유율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공간과 시간에서의 관계들이 단순한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천적 순수직관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존재의 이유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직관 안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기하학적 명제의 진리가 인식이유에 의존하지 않고, 직관을 통해 인식된 존재이유에 의해 비로소 확증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기하학적 명제는 직관으로 소급되고, 기하학적 증명은 오직 직관에 좌우되는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제시되는 기하학의 증명에서는 정리를 위한 증거로 인식이유가 주어질 뿐, 직관을 매개로 하는 선험적 진리가 제시되지 않음으로써 정리에 대한 확신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행위의 충족이유율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인식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인식하는 주체가 의욕하는 자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자신의 모든 결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왜?"라고 질문할 수 있다고 본다. 행위의 결정에는 행위의 동기가 반드시 선행하며, 동기가 없다면 행위는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이 없다면 생명없는 물체의 움직임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동기도 원인에 속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행위의 동기만이 갖는 특성을 이야기한다. 다른 원인에서와는 달리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는 내부로의 통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원인은 사건의 조건이지만 외부로부터 첨가되는 것이어서 사건의 내부는 우리에게 비밀로 머무른다. 우리는 원인이 필연적으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보지만, 무엇이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지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작용, 그리고 자극의 작용이 그 원인에 언제나 따르는 것을 보지만, 한 번이라도 그 사건을 철저히 이해하진 못하고, 그것을 물체의 성질, 자연력, 생명력의 공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내부로의 통찰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원인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내적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의지작용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동기의 작용이 다른 원인들과 같이 외부로부터 간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직접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동기에 있어서 우리는 전혀 다른 길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원인이 가장 내부의 본질에 따라 작용을 일으키는 방법의 비밀을 경험한다. 인과성은 여기서 전혀 다른 종류의 인식을 위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적용되는 인과성을 쇼펜하우어는 행위의 충족이유율이라고 부른다.
행위의 충족이유율은 인식하는 주체에 적용되는 이유율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식주체는 자신을 오직 의욕하는 것으로서 인식한다. 의욕은 우리의 모든 인식에서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의욕의 주체는 자기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지 상세히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의욕이 갖는 직접성은 간접적인 모든 것에 빛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과법칙의 선천성과 오성의 직관능력
인과개념의 선천성에 대한 증명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는 서술되지 않은 내용이며 박사논문에 들어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오성의 인과개념이 경험적 직관에서 이미 적용되며 따라서 직관은 오성의 작용이라는 것을 자연과학의 사례를 들어 경험적으로 증명한다. 감각은 직관의 재료들만을 제공하며 감각이 주는 자료를 바탕으로 물체의 형태, 크기, 거리와 성질을 구성해내는 것은 오성의 작업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천성 맹인들이 감각을 갖지 않고도 공간적 관계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는 사실로부터 직관이 감각이 아니라 오성의 작용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 공간, 인과성은 경험으로부터 습득되지 않고 인간의 지성에 그 근원을 갖는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주장 근거로서 시각의 과정을 중점적으로 고찰한다. 쇼펜하우어는 시각이 감각에서 성립한다면, 우리는 대상의 인상을 거꾸로 지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시각의 과정에 있어서 감각이 제공하는 것은 망막의 다양한 자극에 지나지 않는데, 망막에서 객관의 인상은 거꾸로 맺히기 때문이다. 망막에 거꾸로 맺히는 객관의 인상을 다시 똑바로 세우는 것은 오성이 하는 최초의 일이다. 오성은 감각된 결과를 인과법칙에 의해 그 원인과 관련시킴으로써 외부의 객체를 그대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성작용은 각각의 눈에 의해 두 번 감각된 것을 한 번 직관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물체를 열 개의 손가락으로 만질 때 각각의 손가락이 다른 인상을 획득하듯이 우리의 두 눈도 대상에 대해 다른 인상을 획득하지만, 오성이 이 인상들을 총괄적으로 파악하여 하나의 물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상이 이중적일지라도, 오성에게는 그 두 인상의 원인이 하나의 객체로서 간단히 파악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오성작용은 평면으로부터 물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보는 것에서의 감각은 단순히 평면기하학적이지만, 직관에서 입체기하학적인 모든 것은 오성에 의해 최초로 첨가된다는 것이다. 2차원의 감각에 오성이 3차원을 첨가함으로써 대상을 모든 위치와 상황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객체들이 우리로부터 떨어져있는 거리에 대한 인식은 오성의 네 번째 작용에 의해 성립한다. 객체가 놓여있는 방향을 제공하는 것은 감각이지만, 그 거리는 오성에 의해 인과적 규정들로부터 비로소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시각에서 객체는 작고 가까이 있거나 크고 멀리 있을 수 있는데, 오성은 더 먼 거리에 있는 대상이 가까이에 있는 대상보다 시각적으로 작게 나타날지라도 그 크기를 올바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각의 과정에 있어서 오성의 기능을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쇼펜하우어는 직관이 지적이며, 단순히 감각적이지만은 않다는 주장을 했다. 그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오성이며, 감각은 오성에게 자료를 제공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생아에게 객관적 세계는 감각작용이 반복된 이후에 오성작용이 습득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며, 선천성 맹인들도 수술 직후에 빛, 색, 윤곽을 보지만 오성이 인과법칙을 적용하는 것을 그는 상세히 설명한다. 이와 같은 오성의 작업은 인과법칙을 통해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쇼펜하우어는 이 오성작용을 두뇌의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뇌엽을 제거해도 지각만 파괴될 뿐 감각은 그대로 성립한다는 것은 직관의 지적 성질을 증명하는 생리학적 사실이다. 이를 통해 감성은 지성과 다르고, 표상은 감각과 다르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쇼펜하우어는 고대철학에서도 직관의 지적성질이 통찰되었으며, 이 통찰에 의해 고대인들은 동물도 지성을 갖는 것으로 믿었다고 주장한다. 직관은 지성적인 것이므로 지각하는 것은 모두 지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동물은 오성인식, 즉 인과법칙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하며 해파리조차 오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감각과정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을 통해 경험적 직관이 오성의 작품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여기서 오성의 작업은 주어진 작용들의 원인으로 넘어가는 데서 성립한다. 원인은 오성의 작업을 통해 비로소 객체로서 공간 안에 나타나며, 이를 위한 전제는 인과법칙이다. 따라서 인과법칙은 오성 자신으로부터 첨가되며 결코 밖에서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과법칙이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경험주의의 오류를 비판한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처음으로 모든 실재성을 부정하였고, 그래서 데이비드 흄은 인과관계의 실재성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신체의 부분에 대한 의지의 작용과 물체의 저항이 인과개념의 근원이라는 흄의 주장을 쇼펜하우어는 수용하지 않는다. 의지작용과 신체활동은 동일한 하나로서 때로는 의지작용으로, 때로는 신체작용으로 지각된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감각은 인과개념은 물론이고 아무런 직관도 제공하지 않으므로 흄의 두 번째 가설도 틀렸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지각이 인과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므로 흄의 인과이론뿐만 아니라 칸트의 증명에도 틀린 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주장들을 현대 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터무니없어 보이는 점이 있으나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옛 철학자들이 남긴 사상적 유산은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고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