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16-1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1. 본문 16절은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입니다.
여기에서는 가인이 하나님에게 소속되어 있는 처소로서 땅에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유배자처럼 하나님 앞에서 제거당하여 그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확실히 이것은 다른 것보다 가능성이 희박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가인이 정죄를 받을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서있는 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임재에서 해방되어 그와 말하는 것을 중지하시자 그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다른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서 급히 서둘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
놋 땅은 틀림없이 그 명칭을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낙원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그곳에서 우리는 전에 언급된 것에 대하여 사실들을 추론해 낼 수가 있으니 그곳의 즐겁고 풍부한 과실로 다른 곳과는 분명하게 구별된 곳이 아담에게 주어져서 거기에서 거주하고 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당연히 제한되었을 것이니 거기는 세상의 여러 지역들에 대하여 정반대의 양상들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7-18절은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입니다.
1) 이 문맥에서 우리는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이기 전에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세가 지금 그의 결혼에 관하여 몇 가지를 기록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의 누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자기 오빠를 죽인 피로 더럽혀진 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도 공포를 느끼거나 주저함이 없이 그 사람의 손에 그녀 자신을 맡기는 누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도록 그것을 기록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유 선택이 그녀에게 주어졌다면 자기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보다 오히려 추방당한 자며 도망자인 그를 따르는 것을 더 자진해서 선택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는 전에 언급했던 공포를 가인이 다 털어버리고 자녀를 갖는 것에 대하여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가능성을 분명한 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의 원수도 그만큼 많아진다는 것을 상상한 나머지어설프게 외따로 떨어진 고독한 곳에서 자신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괄목할 만한 일입니다. 또한 그가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반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가가 그래도 어느 쾌락이라도 누릴 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자연에 상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전에 가인이 자녀를 보았는지에 대하여서는 정말 우리에게는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여기서는 그 범죄가 저질러진 후에 낳은 자들에 대하여 특별하게 언급되고 있다고 말하는 데에는 애매한 점이 전혀 없으며 피흘리는 기질을 완전히 갖게된 혐오스런 자손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의 야만적인 방법들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되었다고 말하는 데에는 전혀 모호한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들과 남자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이 해설 내용에서 생략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의도는 오직 가인의 자손 가운데 한 계열만을 추적하려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그는 마침내 라멕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가문은 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것보다 더 번성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곧 추가하려고 하는 라멕의 잊을 수 없는 역사 때문에 그는 후손들 가운데 오직 한 계열에게 언급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후손들에 대하여는 그냥 지나가고 있습니다.
2) “가인이 성을 쌓고” 라는 이 말은 얼핏 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앞에서 설명되어진 판결 이 두 가지 사실에 대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고정된 거주지를 주셨던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가 오두막에서 생활을 하거나 또는 노천에서 지내기도 하고 나무 밑에서 불안정한 숙소를 찾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망자로서 배회하고 다니라고 명령하신 가인은 개인 집으로 만족하지 않고 손수 한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해 주는 양심의 가책으로 압박을 받으면서 자기 집의 성벽 안에서 자신의 안전을 생각한 그가 새로운 방어를 고안했을 것이라는 점은 있을 법한 일입니다. 아담과 그 나머지 사람들은 여러 들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그것은 다른 이유보다는 그들이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이 나머지 후손들로부터 떨어져 사는 것을 목적으로 자기도 한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것을 생각했다는 사실은 마음이 혼란해 있으며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그러나 그의 꺾인 자신과 걱정으로 착잡해진 그 교만은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는 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가지각색의 감정들은 악한 자들이 마음 속에서 서로 겨루게 되고 다투게 되는 것이 일쑤입니다.
그의 허물의 결과인 두려움은 한 도시의 성벽 안에다 그를 가두고 말았으며 그렇게 하여 그는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방법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요새화 하여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만한 허영심이 폭발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는 자기의 이름이 영원히 매장되도록 그렇게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저주에서 사용되는 것 외에는 어떻게 그에 대한 기억들을 자손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망이 그를 충동시켜 그의 도성의 이름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기념비가 되어 전해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이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오직 그는 그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팽배해 있는 외고집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버티어 볼 목적으로 형벌에 대하여 그 자신을 굳게 하여 버티었다는 것 밖에 말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도시들이나 요새들을 재무장시키고 강화하여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합법적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기원된 것을 참고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교정시키는 바로 그 치료 방법들에서 우리의 허물들을 본다는 것이 언제나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헐뜯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질문하기를 가인이 자기의 도시를 건설하려고 어디에서 건축가들과 일군들을 데려왔으며 어디서 그곳에 살 사람들을 불러 데리고 왔는가 라고 트집을 잡습니다. 거기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반문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도시가 네모난 돌들과 놀라운 기술로 그리고 그토록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면서 건설되었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게 믿는 무슨 권위 있는 근거가 있는가 라고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건설하는 것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공사였다고 믿는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습니다. 모세가 제시하고 있는 설명들 가운데서는 전혀 다른 암시는 찾아볼 수 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만 가인이 원시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성벽을 쌓아서 자신과 그의 후손들을 에워쌌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그곳 거주인들에 관련되어 있으니 즉 인류의 생산이 시작되는 그 시초에서부터 그의 자손이 제4대 후손에 이를 때에는 인구가 굉장한 숫자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 도성의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