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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에게 요청하는 모세
출 5:1-14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6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10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이 나가서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바로가 이렇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11 너희는 짚을 찾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2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13 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
14 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출 5:1-14 / [모세와 바로의 협상] 그 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내보내라. 그래서 이들이 빈들에 가서 나를 기념하는 큰 잔치를 벌이도록 해주어라.' 2) 바로가 대답하였다.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알지도 못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내가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모른다. 그러니 이스라엘도 내 보낼 수 없다.' 3) 모세와 아론이 말하였다. `히브리 사람이 모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빈들로 나가 사흘 길쯤 떨어진 곳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 허락해 주십시오. 여호와께서 전염병을 내리시든가 전쟁을 일으키셔서 우리를 치실까 두렵습니다.'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모세와 아론아, 어째서 너희들이 이 백성이 일하는 것을 멈추게 하려 드느냐? 어서 가서 너희들 일이나 하거라.' 5) 그는 또 이어서 `너희 백성들이 엄청나게 불어났는데도 그들에게 일을 시키지 말란 말이냐?'하고 말하였다. 6) [더 무거워진 강제 노동] 바로는 그날로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는 공사 감독과 작업 반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7) `너희는 이제부터 저 백성들에게 벽돌 만드는 데 드는 짚을 전처럼 주지 말고 가서 알아서 주워 오게 하여라. 8) 그러나 만들어 내는 벽돌의 수효는 똑같아야 한다. 이것들이 일하기 싫어서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고 아우성을 치는구나. 9) 너희는 이들에게 일거리를 끊임없이 주어 힘에 부치게 하고 계속해서 짓눌러라. 그래서 이들을 홀리는 거짓말에 귀기울일 틈도 없게 하여라.' 10) 공사 감독들과 작업 반장들이 각기 공사 현장으로 나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바로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않으리라. 11) 너희는 짚을 얻을 만한 곳마다 돌아다니며 주워 오거라. 그러나 벽돌 생산량이 줄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12)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 땅 전역으로 흩어져 곡식을 거둔 자리에 남아 있는 그루터기를 주워다가 짚 대신 사용하였다. 13) 공사 감독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더욱 심하게 몰아댔다 `너희는 짚을 나누어 줄 때와 똑같이 그날 할당된 노동량을 그날로 채워라.' 14) 바로가 세운 애굽인 공사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이스라엘 사람 작업 반장들을 때리며 다그쳤다 `어째서 너희가 어제와 오늘 만들어 낸 벽돌의 수가 전과 같지 않고 줄어들었느냐?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종 모세와 아론이 애굽 왕 바로와 대면하여 최초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며, 이에 대하여 바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부정적인 반응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1-3)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란 대 사명을 부여받은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애굽 왕 바로에게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바로는 근동지역의 패권 국가인 애굽의 왕이었고 모세와 아론은 비천한 노예 민족 출신이었지만, 그들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구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수많은 위협을 이기고 출애굽과 광야 생활 동안 함께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애굽 왕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하며 모세와 아론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바로에게 하나님은 애굽의 신이 아니요 노예의 신이었으므로 조롱한 것입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이라고 말하며 재차 요구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강조하며, 바로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쉬게 하느냐(4-5)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일하는 것을 싫어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여, ‘너희가 어찌하여’라는 말로 질책하며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고 강하게 명령하였습니다.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이 많거늘’ 출애굽 후 20세 이상인 남자들이 603,550명(민 1:46)이었고 이스라엘의 총인원은 약 2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그 날의 일은 그 날에 마치라(6-14) 애굽 왕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거짓말을 한다고 하며, 바로 그 날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짚을 주지 않고 스스로 짚을 줍게 하며 이전과 같은 수량의 벽돌을 만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말살하고 그들을 영원한 노예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땅에서 짚과 곡초를 거두어 벽돌을 만들었지만, 전과 같은 수량의 벽돌을 만들지 못하여서 애굽의 감독자들에게 폭행을 받았습니다.
적용: 영적인 전투에서 당신은 누구와 협력하고 있습니까? 당신을 때때로 낙심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름 받는 자의 합당한 삶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한 삶을 원하면 자신을 어딘가로 돌진하게 만드는 ‘찬란하고 뚜렷한 꿈’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대한 꿈’과 ‘교회에 대한 꿈’과 ‘일에 대한 꿈’은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그 꿈이 깨지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 꿈이 깨집니까? 자연재해나 불의의 사고로 꿈이 깨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 때문에 깨집니다. 그래서 깨진 꿈을 복구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주제가 ‘용서’입니다. 용서가 이뤄질 때 꿈이 회복되고 꿈이 회복되면 행복의 가능성도 크게 높아집니다.
< 설 교 >
예배의 유혹 세 가지
출 5:1-9 / 오창우 목사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높으신 은혜로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허락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자아시죠? 저희 어머니는 피자를 보고 서양빈대떡이라고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젊은 사람들이 참 좋아하죠!! 그런데 세계에 3대 피자회사하면 피자헛, 도미노, 리틀시저스라고합니다. 저마다 특징이 있는데 피자헛은 “다양한 메뉴”, 도미노는 “남보다 빠른 배달”, 리틀 씨저스는 “싼가격”이라고 합니다. 이런 특징이 세계 1, 2, 3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파파존스라고하는 피자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36세의 젊은 사장 슈네트라는 사람이 파파존스라고하는 피자집을 만들었는데 그 매출이 매년 2배이상 오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파파존스가 기존 피자회사의 기대 이상으로 세계적인 피자회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파파존스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파파존스는 “피자의 본질에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피자의 본질이 무엇인가? 두말 할 것없이 맛입니다. 맛으로 승부를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재료, 최고의 맛, 최고의 영양가, 재료나 맛이나 영양가에 있어서 최고를 외치는 것입니다. 피자의 본질의 승부가 소비자들을 감동시키고 미래의 소망이 있다고 얘기를 했어요.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생각해보았어요. 우리의 신앙생활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신앙생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일까? 이제는 다양한 메뉴라던가 빠른 배달, 싼값이라는 것은 다 기본이 된거에요.
마찬가지로 우리교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일이 많이 있지만은 그 주변 것을 다 정리하고 한마디로 정리를 하면 무엇일까? 예배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을 지칭하는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은 높고 사람은 낮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예배 아닙니까? 여러분 예배가 교회의 본질이고 신앙생활의 기본이라는거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도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거에요. 이사야서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예배드리게 하려고 우리 사람을 만드셨어요. 이 예배에 대한 거부가 죄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만남을 거부한 이유가 마귀의 유혹, 그리고 “너 자신이 하나님이 되라”고하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거부한 겁니다. 이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리잖아요. 이 자체가 죽음입니다. 지옥입니다. 반대로 구원은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이유가 뭐냐 말이에요. 여러분 천국은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데 있는 건 단하나 하나님을 믿게 하는 거에요. 천국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저 천국!!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거에요. 지옥은 예배가 없어요. 거기에 생명이 있고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4장에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 중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누구를 찾으시느냐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예배는 창조의 회복이고 바로 천국의 역사다」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본질은 예배다.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는 낮아지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우리가 높아지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 반대로 하나님을 낮추는 것 바로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 바로 예배에 대한 도전과 유혹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말씀은 출애굽의 상황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소리와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애굽의 노예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됐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바로를 찾습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보내달라.” 그 이유가 뭡니까? 자유를 달라! 빵을 달라! 아닙니다. 휴식을 달라 그것도 아닙니다. 뭡니까? 예배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다는 겁니다. “내 백성들로 광야로 가서 예배하라.”예배하러 가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었다는 거에요. 여러분 모세의 제안에 대해서 바로가 순순히 응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유혹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세마디를 합니다.
첫 번째는 '이 땅에서 제사하라’ 순종에 대한 유혹입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마라’ 신앙계승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는 '제물없이 제사하라’ 헌신에 대한 유혹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속에는 순종과 신앙계승과 헌신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겁니다. 이것을 하나라도 뺄려고 하는 바로의 마음이었다는 겁니다. 오늘 바로가 예배를 예배답지 못하게 하는 그런 유혹 세 가지를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 예배에 이 세 가지를 다시 한번 정립시키고 하나님 앞에 바로설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순종의 유혹입니다.
출애굽기 8장 25절로 27절까지 있는 말씀을 우리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아멘
여러분! 바로가 유혹합니다.
“제사를 꼭 광야에 가서 드려야 하냐 사흘길을 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냥 여기서 제사를 드려라.”
바로는 바로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니다. 그 말은 부당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광야에 가서 제사 드리라 했습니다. 여러분 예배 속에는 순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있습니다.
미국 이민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집사님이 예배당은 안오고 골프장에만 가요.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데요.
“왜 주일에 집사님이 예배당 안오고 골프장에 가시냐고 ”그랬더니 이 집사님이 말하길
“내가요.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골프장이 머릿속에서 그냥 왔다갔다하는데요, 볼을 치는 것, 퍼팅하는 것이 머리속을 왔다갔다해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몸은 예배당에 와있지만은 마음은 골프장에 가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골프장에 가니까 몸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지만은 이 마음은 계속 예배당에 예배드리는 모습이 자꾸 상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깨달은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그래서 나는 골프장 가기로 했습니다. ”
말이 됩니까? 안됩니다. 얼마나 성경도 잘 들이 대는지..예배는 순종입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만 순종이 예배속에 있습니다. 이미 순종에서 승리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울과 다윗, 이 두 임금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디에서 하나님이 복주시고 어디에서 하나님이 벌주셨어요? 예배입니다.
사울임금이 많은 이스라엘 가운데 높임을 받았어요. 왕이 됐어요. 얼마나 대단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제사를 드려야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은혜받고 전쟁터에 나가야하는데 제사장이 안와요. 사무엘이 빨리안와요. 그러니까 사울임금이 그럽니다.
“자! 기다려도 안오니까 내가 제사드린다. 번제와 화목제 가져와”
자기가 제사장의 몫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분명히 드렸습니다. 사무엘이 이 사실을 알고는 책망을 합니다.
“이건 당신일이 아닙니다. 그건 내게 맡겨진 일입니다. 당신은 나라를 다스리고 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사명입니다. 근데 어떻게 그것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그 후에 아말렛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고 하셨어요. 순종하나 안하나.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는데 조건이 있다. 전리품을 절대로 가지고 오지 말라. 사울이 전쟁을 하다보니까 아말렛에 너무 좋은 제물들이 있어요. 아깝거든요. 그래가지고 좋은 소와 양을 가지고 왔어요. 그때 사무엘이 얘기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하기를 전리품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가져왔습니까?”
라고 하니 하는 말이
“이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려고 한다”
그때 사무엘이 얘기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제물이 없어서 배고파하십니까?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은 예배속에 순종을 보십니다. 순종을 보신다는 겁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살인죄를 범한사람입니다. 그전에는 간음죄도 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자기 아들에게까지 배척을 당해가지고 쫓겨나 피난갔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면서 조롱을 합니다
“아이고 자식에게 쫓겨나고는 이 나쁜놈, 나쁜놈”
그중에 시무이라고 하는 얼마나 욕을 해 대는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잘못을 지적하면 “예! 잘못했습니다.” 밤을 세워가면서 회개를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남이 돌을 던지면 그 돌을 던지는 것에 대해서 원수 삼을 수 있지만은
‘아니야!! 하나님이 저로 하여금 나에게 돌을 던지게 하시는 구나’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내놓고
‘아니 자식도 나를 버리는 데 남이 나한테 이럴 수도 있지...’
여러분 기독교의 영성 가운데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는 거에요. 어떠한 상황이 내게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속에서 내가 낮아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겁니다. 이게 예배에요. 순종이라는 거에요. 다윗이 그렇습니다. 성전건축 하겠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안된다. 피를 많이 흘려서.. ” 내가 헌신하겠다는데 하나님의 거절 앞에도 “예!! 알았습니다.”순종할 줄 압니다. 성전건축이 했다 안했다가 문제가 아니에요. 순종하는 마음이 있느냐...예배 속에는 순종이 있어요.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행할 때에 어떻게 합니까? 원수를 갚을 기회가 있다고 원수를 갚습니까? 왜? 부하들에게도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은 내가 어찌하랴.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예배의 관계, 그중에서 순종이냐 아니냐로 구분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고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 중심을 보는 것은 다윗 때문에 나온겁니다. 다윗의 마음은 언제나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복 받을 증거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복과 은혜를 주시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는 일요일을 일요일이라 하지 않고 주일이라고 하고 성일이라고 합니다. 성일이 뭡니까? 거룩한 날입니다. 거룩은 뭡니까? 하나님의 날입니다. 이날은 공휴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이다. 하나님의 날에 순종 할 줄 알면
“내가 성일에는 하나님 앞에 가야지..”
순종입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성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물건입니다. 하나님의 것!! 귀하죠. 귀하게 써야지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도 귀한 것 드려야 해요. 아주 좋은 것으로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순종이 그 마음에 있는 거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받았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교회학교 교사, 찬양대, 구역장, 권찰 하나님의 교회가 주신 직분은 성직이다. 왜? 하나님의 것이니까. 이거 귀하게 잘 감당해야죠. 순종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는지 하나님이 보시는 거에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성’자만 들어갔으면 귀하게 여기는 마음 그게 순종이에요. 하나님의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말입니다.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직분- 하나님이 맡긴 직분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물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순종을 잘 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기적의 첫 번째는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도 순종하는 일꾼들이 있어서 그랬어요. 오병이어의 기적도 판단하는 빌립이 아니라 순종하는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던 거에요. 예배속에는 순종이 있어요. 주일날 되면 성일이라. 하나님 전으로 찾으러 온 여러분에게 하나님 큰 은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승리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면 귀함 받고,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면 존귀함을 받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하나님이 경멸하시고 주의 날 귀하게 성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분 다시 한번 큰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신앙 계승의 유혹입니다
신앙계승의 유혹!! 바로는 말입니다.
“뭐 얘들까지 제사 하는데 데리고 가냐. 장정만, 어른들만 하나님한테 제사 드리게 하지 ”
이렇게 요구를 합니다. 그러면서요 참 재밌는 얘기는 어린애들까지 같이 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니까 안된다고 그러는 거에요. 출애굽기 10장 8절부터 11절까지 함께 보겠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뇨 모세가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찌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아 멘
어린아이들은 가지 말고 어른들만 가라는 것이 바로의 유혹이고 그것이 신앙의 도전입니다. 여러분 아이들도 예수믿고 아이들도 예배드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들 하시죠? 꼭 그렇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미래를 불안하게 느끼는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노령사회의 증거입니다. 사람나아 65세이상이 되면 노인이라고 일컸는데 노령화 사회는 전인구의 7%는 노령화사회입니다. 그런데 인구의 14%가 되면 노령사회로 진입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2000년도에 이미 노령화사회가 됐고 2020년에 가면 노령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급속하게 노령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입니다. 프랑스는 115년, 스웨덴은 85년, 미국은 71년이 걸렸는데 우리나라는 20년이 안되는 시간안에 노령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노령사회가 무슨 문제가 있느냐 소수의 생산인구가 엄청난 노인들의 생계문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겁니다. 연금문제 가지고 한참 얘기가 있잖아요.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으로 연급 지급 불능이라는 문제가 올거라는 겁니다. 불안하지요. 경제 생산성이 떨어지고 살길이 막막하다는 그러는 거에요.
대안이 뭐가 있냐?? 노인들의 사회의존도를 낮춰라 다시 말하면 연금, 이런 혜택같은 것들을 낮추라는 말입니다. 미국은 이런 것에 대한 대안을 연금으로 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라 그렇게 방향으로 나간다고 그러지 않아요. 두 번째는 더 많은 생산성 인구를 세대를 길러내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자식의 의무를 강조해라. 이게 대안입니다. 과연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미래의 불안은 기러기 아빠를 양성해서 조기유학을 시킵니다. 기러기는 암컷이 자식을 떠나면 수컷이 자식을 키웁니다. 그런 동물입니다. 우리나라에 엄마와 아이들은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아빠는 자취생활을 하면서 유학비 생활비대고 보통 힘든게 아닙니다. 그런니까 자살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뿐만 아니라 결혼 기피현상과 출산률 저하, 대안으로 내놓은 모든 것들이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이 나라를 자꾸 떠나잖아요. 젊은이들이 말이에요. 농촌을 떠나듯이 나라를 계속 떠납니다. 여기는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애국자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어저께 조선일보를 보는데 책을 소개하는 코너가 토요일에는 꼭 있습니다. 그런데 책소개하는 곳에「인간은 기후를 지배 할 수 있는가 」윌리암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가 가뭄과 홍수와 폭설과 폭풍과 쓰나미 이런 모든 것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이 기후를 지배해야만 한다. 기후협약하는 교토협약사가 발간이 됐습니다만 이 책은 이겁니다. 인간이 기후를 지배할 수 있느냐 “없다”는 거에요. 대안이 뭐냐? 대안도 “없다”는 거에요. 이게 우리의 대안이냐? 없는게 우리의 대안이에요.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어요? 누가 이 나라의 삶을, 우리의 삶을 누가 이 지구의 기후를 책임지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대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안을 내 놓아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안은 딱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유럽이 한창 세계적으로 가장 잘 사는 나라, 아주 사회 복지가 참 잘되고 그러던 때가 있었습니다. 몇십년전 일이죠. 오슬로에서 청년대회가 열렸습니다. 정말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의 청년들은 무슨 고민이 있겠나. 그런데 이곳에 청년들도 고민이 있었어요. 너무 잘 먹고 잘 사니까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절망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자살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복지정책이 잘된 나라일수록 그렇다는 거에요. 사람은 일을 성취하지 못해서도 절망을 하지만 성취하고 난 다음에도 절망하는게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도 예외가 없습니다. 잘 먹으니까 잘 입느니까 이들의 관심이 어디 가있습니까? 얼마나 잘 입고 얼마나 잘 먹겠어요?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자라면서 굶고 자란 세대속에는 지금은 젊은이들이 천국같겠지만 좀더 살기 힘들다는 거에요. 왜? 꿈이 없어요. 소망이 없어요. 대안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소망이 생깁니다.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소망입니다. 그런면 살수 있습니다.
여러분 에드워드 모추라고하는 케비넷 제조공이 있습니다.35살입니다. ‘내가 이 나이가 들도록 뭐했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원망, 불평하면서 망치나 두들겼다고 그래요. 그런다가 이분이 예수를 믿었어요. 과거에는 세상만 보고 살았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사니까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케비넷을 만드는 망치소리가 달라졌다고 그래요. 뭘 만들었느냐? 과거에는 사람이 쓰는 물건을 만들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물건을 만들었어요.
“주여! 이 케비넷이 만들어져 쓰는 사람마다 예수 믿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받게 해주소서.”
예수를 믿으니까 사람이 달라져요. 인생의 목표.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
“예수님처럼 되야지 ”
과거에는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목표였지만은 이제는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게 목표가 됩니다. 과거에는
“언제쯤 저렇게 큰 집사나” “언제쯤 대우받나”
이것이 목표였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나라 언제쯤 건설해야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가정이 하나님 나라가 되고 내 직장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거에요. 그래서 이분이 찬송가도 짓고 하나님의 교회도 건축해서 하나님께 바쳤어요. 예수 믿으니까 달라지더라는 거에요. 찬송을 지어서 불렀어요.
이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주 예수 뿐일세
우리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 이시니 그위에 내가 서리라
그위에 내가 서리라
할렐루야!
아 멘
하나님의 꿈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습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있고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게 하고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있을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헌신에 대한 유혹입니다.
재물 없이 제사하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10장 24절을 보겠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룰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찌니라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화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면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 아멘
여러분 바로가 우리게게 요구하는 것은 제물없는 제사입니다. 헌신없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기차 여행중에 같이 앉은 사람들끼리 얘기를 하다보니까 서로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아구 어느 교회 나가느냐고 서로 인사를 하고 가는데 점심시간이 되가지고 한사람은 도시락을 준비해가지고 와서 먹고 있고 다른 한사람은 도시락을 준비를 못했어요. 도시락 갖은 사람이 도시락뚜껑을 여니까 그 안에 샌드위치가 있어요. 얼마나 맛있게 생겼는지... 정말 맛있게 먹더래요.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그리스도인이 혹시 샌드위치하나 안주나 기다리고 있는데 안주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를 썼어요.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도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에 보니까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그랬다고 그러네요” 그랬어요. 그랬으면 하나 줘야 할 것 아니에요. 무슨 뜻인줄 알고 정색을 하면서 하는말이
“선생님! 성경에 보면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라고 하더라구요”
행함이 없은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주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므로 헌신을 해야 합니다. 크래머신학자는 교회의 본질은 봉사에 있으며 봉사하지 않으면 아웃사이더가 된다고 했습니다.
무디목사님은 설교를 했는데 배움이 적었기 때문에 언제나 문법이 많이 틀렸습니다. 하루는 문법학자가 찾아와서는 많은 사람이 있는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다음부터는 설교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연설입니까? 문법하나 제대로 맞지 않는 그런 연설 듣기 거북합니다.”무디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 예, 저는 배움이 적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해도 실수가 많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요 어떻게 해서라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는 헌신하는 마음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세요. 그런데 박사님에게 교수님에게 한마디 묻습니다. 박사님은 그렇게 좋은 능력을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십니까? ”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얼마나 주를 위해 헌신을 하느냐 하나님이 우리 예배속에서 보고 계십니다. 한국교회가 이만큼 부흥한데에는 교인들의 헌신이 있었음을 빼놓을 수가 없어요. 오늘보다 과거의 교회들이 얼마나 믿음생활하고 헌신생활하기가 힘들었겠습니까? 갖은것도 적도 배운것도 적었어요. 그러나 어떠한 모습이라든지 헌신하려고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렛다과부의 마음, 과부의 동정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사랑하셔서 이 나라, 이교회를 이렇게 축복하신게 아닙니까. 저는 이 얘기를 듣고 이런게 있었구나. 헌금을 못하니까 우리는 헌일을 하겠습니다. 날일 자에요. 무언가 자세히 봤더니“나는 돈이 없어서 하나님께 바칠게 없습니다. 대신 나는 시간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시간내서 전도하고 시간내서 교회와서 청소라도하고, 시간내서 심방을 하고, 시간내서 교회참석 못하는 사람 찾아가서 교회나오라고 하고..
여러분 한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당 나오실 때에 여러분 이외에 다른 사람한테 연락을 해서 같이 예배당가자고 말 한사람이 있습니까? 결혼식 할 때나 찾지 말고 주일마다 여러분들 구역에 있는 식구마다, 남선교회, 여선교회식구들한테 다 연락을 해가지고 예배당가자고 하세요. 그건 누가 하는 일입니까? 따지지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하나님이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복입니다. 그 속에는 순종이 있습니다. 신앙의 계승이 있습니다. 미래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헌신이 있습니다. 이런 진실된 예배속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연단받는 사람
출 5:1-9 / 오창우 목사
여러분, 하늘을 한번 쳐다 보십시오. 새가 보입니까? 하늘을 날라다니는 새 가운데 왕이라고 하는 새가 뭐지요? 독수리예요. 독수리가 새 중의 왕입니다. 독수리는 독수리이기 때문에 왕이다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독수리 아버지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독수리고 새 중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 새끼로 태어난다 할지라도 훈련을 받지 아니하면 절대로 새 중의 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독수리 부모는 독수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높은 하늘로 올라가서 독수리를 떨어뜨린다 그래요. 그리고는 그것을 내려가다가 퍼득거리면서 올라오고 퍼득거리며 올라오고 이런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새 중의 왕인 독수리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이 훈련을 감당치 못해서 죽는 독수리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는 독수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독수리입니다. 독수리는 자기의 새끼가 힘이 약하다고 해서 그 새끼를 참새로 키우지는 않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독수리로 살다가 독수리로 죽어라 그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신앙인은 신앙인으로 살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순교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훈 목사님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그래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배신한다고 하는 것은 비극이에요. 우리는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어느 교인의 말이 자기를 자판기에 가서 커피 뽑아먹는 즐거움이 있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날은 더 큰 즐거움이 있었다고 싱글벙글 하더라구요. 왜냐하면 자판기 앞에 갔더니 150원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뽑아먹었잖아요. 세상에 공짜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요.
막 기분이 좋아가지고 커피를 마시면서 몇 걸음 옮기다가 자기의 머리 속에 딱 떠오르는 게 있어 `아차` 돌아서서 가가지고는 200원을 도로 넣었대요. 그거는 고급 커피값입니다. 자기는 200원을 넣어놓고 돌아서서는 더 즐거워하는 거예요. 누가 와서 즐거워하겠지.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보든 안보든 자기의 길 가는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멋있고 이런 사람이 신앙인이 되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선진국 사람들은 뭐가 다르다는 사실을 가끔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물들을 먹는데 지하수 끌어올려서 좋은 물 먹으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10미터와 20미터 사이에서 물을 뽑아먹는다고 그러더라구요. 100미터, 200미터에서 물을 뽑을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10미터, 20미터 그 밑으로 내려가서 먹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래요. 그게 뭐냐면 20미터까지는 우리들이 먹을 물이고 100미터 이상부터는 후손들이 먹을 물이다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선진국민이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서 멋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예수님이 멋있는 이유가 뭡니까? 인물이 좋아서요? 누구보다 오래사는 장수 때문예요? 아니면 그가 부자였습니까? 아니면 권력자였습니까?
그 예수님이 멋있다고 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완전한 삶을 살았지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멋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세계를 정복합니다. 그런 예수님이 오늘날의 역사까지도 지배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야 됩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 살다가 죽어야 됩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그분은 참 예수였다` 그렇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독수리가 독수리일 수 있었던 이유가 독수리가 훈련을 받았기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신다는 겁니다. 오늘 성경에 바로 그 사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우리 말에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아요. 사람의 가치를 언제 알 수 있습니까? 어려울 때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리잖아요, 우리 나라도 출전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16강입니다. 아니 한번이라도 본선에서 승리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훈련하잖아요. 하체훈련, 체력훈련도 하고 전술훈련도 하고.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실력을 모르거든요. 그래서 평가전을 하는 거예요. 외국팀하고도 하고 외국의 골드컵에 나가서 출전하기도 하고. 그 이유는 실력을 알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예요. 이런 실전의 과정을 통해서 이들의 실력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훈련시키시는 거예요. 그 첫째는 자체훈련입니다. 체력훈련, 전술훈련이지요.
하나님은 그래서 모세를 광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론 우리도 광야로 이끌어 내십니다. 그 광야는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고 질병의 고통일수도 있고 대학진학의 실패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일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할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루이스라고 하는 사람은 `광야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확성기와 같다` 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을 떠나서 정말 아무도 없는 공허한 자리에 있는 바로 그 실패의 자리,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인간의 약함을 깨닫고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시간 은혜받은 내용입니다.
오늘은 실전에의 투입입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갑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광야의 목자입니다. 애굽의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노예의 대표일군입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애굽의 바로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당시의 최고의 나라라고 하는 애굽의 임금을 만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습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이런 일 하라고 시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남들이 볼 때는 변변치않는 신분이지만은 내 마음 속에는 민족을 품고 있어요,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마음을 갖게 만드는것이 하나님이세요.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시잖아요. "세상으로 가라" 나 비록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 민족을 가슴에 품게 만드시는 거예요. 신앙만이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만이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런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 그런 말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갔지만은 바로라고 암초에 부딪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바로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하시요` 그랬더니 바로는 뭐라 그럽니까? `여호와가 누구냐? 나 모른다. 너희 일 안할려고 게을러서 그런 말 하는구나` 하고 큰 고역을 백성들에게 안겨줍니다.
이럴 때 백성과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20절, 21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을 보고 `왜 우리를 미움받게 하느냐 너희 잘못을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는 것 너희는 정말 잘못됐으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예요. `주여 이 백성이 왜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하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왜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 않느냐 하느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를 변화시키던지 아니면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서 바로를 이기던지 왜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 않느냐 그런 얘깁니다.
지난 주일에 출애굽기 4장에 보게 되면 이 모세는 하나님께 얘기합니다. `저는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해요. 10절에 말씀에 `저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이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런 얘길해요.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불렀습니다. `너를 지도자 삼겠다` 모세가 하는 말이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로 가며 이스라엘로 가리이까` 그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어요. 수퍼맨이 될 줄 알았지요. 그래서 오늘 얘기하는 거예요. 나 못가겠다.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주신 다음에도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이 앞에 이렇게 얘기해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보낼 만한 자를 보내라 아니면 나를 보낼 만한 자로 만들어달라 그런 말이에요. 수퍼맨 만들어달라 그 말이에요.
그 전에는 말 못했는데 이젠 말 잘하고요, 그 전에는 극히 인간이었는데 이젠 좀 하나님처럼 능력있게 해달라 그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이런 요구했어요. 그것 때문에 선악과 따먹었어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해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내가 수퍼맨이 되기를 원해요. 목사님도 수퍼맨, 나도 수퍼맨 다 수퍼맨 되기를 원하거든요.
그러다 안되면 당신이라도 되야 될 것 아니냐 하고 이렇게 요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하나님의 사람을 수퍼맨으로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가 되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쓸만한 자가 되라는 겁니다. 내가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가 사람의 입은 지었느냐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 아니냐`
있는 모습 그대로 벙어리면 벙어리, 눈먼 자면 눈먼 자 그대로 내가 만들었다는 말이에요. 문제는 내가 눈먼 자를 통해서 역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꾸 보낼만한 자를 얘기하고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게 뭐예요? 하나님 의지하는 겁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에요. 수퍼맨이 아닙니다. 예수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더 하나님 의지하고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더 드러내는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교만하지 마세요. 겸손해야 되요.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같지만은 바로라는 암초에 그냥 부딪치는 거예요. 그저 하나님께서 다 아세요.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 자신에겐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신앙이거든요. 우리가 어려움을 만날 때 이 어려움 속에서 이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 어려움 속에 신앙 고백을 하십니까?
저는 어려움을 당할 때일수록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어냐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라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 알렉산더 왕이 유대나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유대 왕이 하는 말이 "우리에게 은금보화 있는데 얼마나 드릴까요?" 그랬더니 알렉산더 왕이 하는 말이 "나 은금보화는 많다 그런데 너희가 지혜의 나라라, 민족이라 그러는데 너희가 생각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얘기해 봐라" 그런 얘기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유대 왕이 정의를 설명을 해요.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폐품더미를 샀다는 거예요. 필요해서. 폐품더미를 싸게 사가지고 집에 와서 폐품더미를 풀려보는데 그 안에 커다란 금덩어리가 있었어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금덩어리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 이 사람이 깜짝 놀래가지고 그 장사꾼에게 찾아갔어요. "여보시오, 내가 폐품을 샀는데 이 안에 금덩어리가 있어요. 나는 폐품을 샀지, 금덩어리를 산 게 아니니까 이 금덩어리를 당신 겁니다" 줬다는 거예요.
장사꾼이 그래요 하고 받아드렸으면 얘기할 게 없는데 이 장사꾼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폐품더미를 팔 때 금덩어리까지 같이 팔았습니다. 그러니 이거 당신 겁니다."했다는 거예요.
두 사람이 이만한 금덩어리를 놓고 니꺼다 니꺼다 이러고 다투다가 유대의 랍비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이거 해결해 주십시오. 해결이 되요, 안되요?
그러면 그거 내가 가질게 그러면 되는데 랍비가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당신에게는 결혼할 나이의 아들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결혼할 딸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 " 러면 이 두 젊은이를 결혼 시키십시다. 사돈 맺으십시다. 그리고 그 금덩어리를 결혼할 새 가정에 주십시다." 합의를 하고 줬다는 거예요.
유대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의 정의입니다. 알렉산더가 뭐라 그랬겠어요? "우리는 힘있는 사람이 정의인데 너희는 그게 정의이구나" 감동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구원이에요. 예수 믿고 구원, 그러나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뭡니까? 주안에서 하나 되는 거거든요. 교회가 뭐예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잖아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 그랬잖아요. 그러므로 이 손과 발이 따로 놀면 안되거든요. 서로 협력하는 거거든요. 하나되는 거예요. 이게 신앙의 목표예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목표예요. 성도와 성도가 하나가 되고 성도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삶, 이것이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해요.
여러분 고린도교회는 은사를 참 많이 받은 교인들이 있어요. 그러나 시끄러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그 은사를 가지고 내 은사가 크냐 네 은사가 크냐를 다투라고 주신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을 가지고 서로 한몸 되도록 힘쓰라는 거예요.
그래 믿음, 소망, 사람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은 연합, 서로 사랑으로써 내 제자인 줄을 알이라 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우린 그렇게 살아야 되요. 그러기 때문에 나와 성도간의 하나, 나와 하나님간의 하나 되기를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해롤드 쿠스노 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중에-최근에 쓴 책이에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쿠스노는 랍비에요. 자기 회당에 모이는 사람이 2,500명이 되거든요. 이 쿠스노에게 어떤 일이 생겼느냐 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병이 있는 거예요. 알아 보니까 빨리 늙는 조로증에 걸렸어요. 그래서 아이가 크면서 머리가 생기는 듯 하더니 다 빠지고, 왜 늙으니까. 주름이 생기고 그래 12살이 되던 해에 이 아이가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랬어요. "하나님, 내가 나쁜 한 것도 없는데, 내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나한테 이런 나쁜 일이 생깁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신앙의 고백을 책에 썼어요.
그 책에 결론은 이거 더라구요. `하나님은 선하시다` 욥의 고난을 보면서 욥의 말이 옳으냐, 욥의 친구들의 말이 옳으냐 이것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왜 우리가 부자가 선이고 반대로 거지가 되는 것은, 가난한 것은 저주예요? 건강한 사람은 축복이고 병약한 사람은 저주입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합해 가지고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일 많이 있어요.
여러분 우린 물 없이는 못 살잖아요. 물은 산소와 수소가 합해 이루어져 있어요. 산소는 마시면 좋지요. 그러나 수소 먹으면 죽는 거예요. 그러나 산소와 수소가 합해 지니까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될 물이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어떤 집이 좋은 말이 있었답니다. 아주 좋은 말이에요. 아주 자랑스런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어느 날 우리 문을 박차고 없어져 버렸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실종됐지요. 그래 이 말을 잃어버렸다 하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집 정말 재수 없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웬걸요, 한 1년쯤 지났는데 이 말이 새끼 말을 데리고 돌아온 거예요. `야, 그 집 재수 좋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주인이 하는 말이 `두고 봐야지요`
그 집에는 외아들이 있었어요. 몇 대 손입니다. 몇 대 외아들이에요. 얼마나 귀하겠어요. 그런데 이 아들이 데리고 온 망아지를 타다가 떨어져 가지고 다리를 못쓰는 장애자가 되고 말았어요. `아하, 좋은 줄 알았더니 이게 재앙이구나` 하고 사람들은 손가락질은 했어요. 그런데 주인이 하는 말이 `두고 봐야지요`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전쟁이 일어났어요. 마을의 젊은 청년은 전쟁에 가서 다 죽었는데 이 집 아들은 장애자이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대를 이을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또 얘기했어요. `아, 저 집은 정말 복 받았다` 주인은 뭐라 그랬게요?
여러분, 당장 일어나는 일 가지고 좋다 나쁘다가 아니란 말이에요. 세상살이가 그래요. 저는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느껴지는 게 뭐냐면 두도 봐야 한다는 거예요. 더 이것이,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 망하지 않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꺼꾸러뜨림을 당해도요, 망하지 않아요. 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예요. 이게 사도 바울의 신앙이고 신앙의 선배들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쳐라` 재앙이에요, 축복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은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를 않아요. 그냥 순종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냥 순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던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뭐라 그랬어요?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너희 민족을 창대케하고 자손대대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겠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어요, 거절하셨어요? 거절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이에요. 그런데 거절을 해요.
우리도요, 주의 일 한다 할 적에 때론 거절당할 때도 있어요. 섭섭해요, 안해요? 어떤 사람은 교회도 떠나더라구요.
그런데 말이죠, 이 다윗은 아무 소리 안해요. `예 그렇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묻지 않아요. 왜? 하나님은 선하시니까.
우리는 내 생각대로 되고, 내 신념대로 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야 축복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줄로 알지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절을 받아들일 줄 아는 신앙, 그건 딱 하나예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그렇다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그 자손대대로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어요. 두고 봐야되요.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연단과 시련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어요. 첫째는 기다림의 축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유안진이라고 하는 시인이 쓴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어요.
제목 :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나는 조금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지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얼마나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두면서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고
더 지긋이 채워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될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의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베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는 유안진 시인의 시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다릴 줄을 몰라요. 좀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파란 신호등이 계속될 때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 대단하지요.
그런데 저는 요즘에 빨간 불에 서는 즐거움과 기쁨 속에도 삽니다. 얼마나 그 때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저는 자동차를 오래 타는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차를 바꾸자고 그래도 내가 거절을 몇 번씩이나 했습니다. 새차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차가 튼튼하기 때문에 그래요.
한 10년쯤 되면요, 차 엔진소리도 좀 이상해지거든요. 난 서있을 때 차 엔진소리를 듣습니다. 괜찮나? 엔진소리를 들으면 난 기술자는 아니지만, 차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겠더라구요. 평소보다 다른 소리가 나면 빨리 병원에 가야지요. 또 그거 다 끝나면 주유소에서 준 휴지가지고 차 내부 청소도 못하는데 그 때 닦습니다. 라디오도 한번 보면서 점검도 해보고 또 테잎도 바꿀려고 한번 보기도 하고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말하는 것만 복이 아니고 가는 것만 복이 아니고 서는 것도 복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잖아요. 너희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 일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기다릴 줄 아는 축복도 알고 두 번째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돌아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는가 말씀 위에 서 있는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가 동역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란 말이에요.
여러분 아무리 잘 돌아가는 기계라고 할지라도 가끔 돌아봐야 해요. 이물질이 낀 것은 없는지, 이물질 하나만 끼어도 기계가 돌아가는데 문제가 생기잖아요.
오늘 우리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완벽하고 바르게 사는 것 같아도 사탄이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요. 세상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깨끗함, 말씀 위에 든든히 서가는 이 모습을 보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해석을 받아야 되요. 우린 다 성령의 사람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에서 만나실 때 불붙는 가시떨기를 통해서 만나셨어요. 여러분 불붙는 가시떨기는 불이 붙지만 타지 않고 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것을 통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를 불붙는 가시떨기가 되게 하리라`
내게 성령의 불이 있지만 성령이 내게 불을 태우는 게 아니에요. 나를 그냥 불덩어리도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붙는 가시떨기처럼 재가 되지 않고 늘 항상 힘있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 좀 하다 보면 재가 되는 사람이 있어요. 일 좀 하다 보면 재가 되는 사람이 있다구요. 일을 했는데 뭔가 허탈해요. 누가 나 알아 주지고 않고 섭섭하지요. 그것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나는 게 아닙니다. 일을 했는데 성령의 힘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항상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의 힘으로 주의 일에 충성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승리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면서 우리를 실전의 현장으로 몰아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의 실력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를 완전한 신앙인으로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 당할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기쁘게 여기세요.
여러분, 깨끗한 물이라도 모아두면 썩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이 가지고 나간 물은 한 달이 되도 썩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한가지이에요. 파도에 물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아무리 좋은 믿음이라고 하나님이 연단하지 않으면 우린 깨끗함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우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이것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기억하고 원망, 불평, 우리가 실족하거나 실패하는 신앙인 되지 말고 주 의지하고 주 안에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예배
출 5:1-3 / 조재진 목사
오늘은 우리교회가 창립 54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지난 54년 동안, 하나님은 우리교회역사의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한 교회에 모여서 같은 지체로 예배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은 성도들이 매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불교신자들은 일년에 한번, 사월 초파일 하루만 가도 되는데, 왜 그리스도인은 매 주일 가는지 참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일주일에 한 번, 주일 예배만 드리면 되지, 무슨 주일저녁, 수요일 저녁, 새벽기도, 금요심야기도회에 까지 나가냐? 적당하게 해라’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 교회가 무엇인지. 예배가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교회의 목적과 기능을 말할 때 제일 먼저 말해야 할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만약 교회가 예배를 잃어버린다면 그 교회는 단지 건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예배가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과 하나님의 백성됨의 본질은 다 예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령이 임하는 예배가 사라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것이 믿음생활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가 지겹다’ ‘예배 때문에 피곤하다’라고 말합니다. 또 ‘간단히 예배드리자’ 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은 예배가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예배가 끝나는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시계를 보게 되고, 찬송가가 4절 짜리만 되어도 신경 쓰입니다. 실제로 그런 교회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어느 교회 설교단에 조그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고 하지요. “설교를 짧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다시 이 강단에 청함을 받을 것임이요”
제자 훈련 교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40대 남자가 60대 어머니에게 예배드리러 가기 싫은 3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째 늦게까지 잠자고 싶기 때문에. 둘째 성가대의 불협화음이 듣기 싫어서, 셋째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서,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래도 교회가야 하는 이유 3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예배는 사람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러 가는 것이기에, 둘째 예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셋째 너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참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왜 가인이 실패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예배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벨이 믿음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은 예배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비밀이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에 대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합니다. 에서가 실패한 것은 윤리적인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를 합니다.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더라”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의 명분이란 재산권 이전에 예배를 드리는 권한을 말합니다. 반면 야곱은 인격적으로는 좀 문제가 있었어도 예배드리는 부분, 즉, 하나님에게 복받아야 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생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에서으이 실패와 야곱의 축복의 분기점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서는 것이 출애굽의 본질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애굽에 도착하여 드디어 바로 앞에 서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메시지는 우리가 기대했던 그런 대단한 메시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내 백성을 그만 탄압하고 자유케 하라” 좀 이 정도는 말해야 하는데,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메시지입니까? 1절을 함께 보십시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지요?.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내 백성을 내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메시지는 출애굽의 어마 어마한 사건과는 좀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바로 앞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겉으로 다른 이유를 내세운 것으로 모세가 정직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모세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했고, 모세는 그 말씀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광야에 나가서 절기를 지키도록 내 보내달라고 말하게 했을까요? ‘내 백성을 내보라.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서 한 나라를 이룰 것이다. 안보내면 그냥 안두겠다’ 라고 하지 않고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내보내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오늘 모세의 이 요구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의 요구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예배의 특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달라’고 하지 않고 ‘예배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대한의 자주 독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정치적인 자유도 그처럼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유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게 해 달라’고 요구하게 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관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진정한 이유는 정치적인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애굽에 수많은 신들이 있고 제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것을 섬기거나 우상에게 절하는 그런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는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백성을 내보내어 예배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게 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해방되었다고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변화는 제도의 변화나 사회구조의 변화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배, 섬기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섬기는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배가 바뀌는 것이 운명과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상을 절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삶의 변화이고 가장 큰 축복입니다. 출애굽의 궁극적인 비전과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에서 사람을 섬기는 노예가 아닙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들을 두려워하는 자도 아닙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예배의 대상, 섬김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섬기는 대상이 바뀌어지는 것이지요.
지난 주에 한 분이 우리교회 나오면서 집안에 있던 것들, 염주, 부적, 이상한 그림들을 다 버렸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이 집에 심방하고 다 떼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분의 삶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목회할 때 한 가정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을 바꾼 것이지요. 이 분들은 종로 4가에서 금팔찌를 세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돈을 잘 벌었는데 점점 힘들어 지기 시작하자 이들은 섬길 자를 찾았습니다. 누굴 찾아갔는가 하면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부적을 몇 백만 원짜리 사서 집안에 부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섬긴 것은 헛된 우상에 불과했습니다. 점을 치고 묻고, 그리고 굿을 하고 액운을 없앤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은 엄청난 빚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힘드니까 날마다 술 마시고 폐인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입니다. 하루는 주일 예배를 마쳤는데 이 사람의 누나가 우리교회 집사였는데 자기 동생을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이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지를 말했습니다. ‘예수 믿어야 될 6가지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날 이 분들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섬기던 것을 바꾸기로 결단한 것이지요. 그리고 집안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부적들, 은가시나무, 북어대가리(?)와 실뭉치를 다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후 이 집에 놀라운 축복을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너무 중요합니다. 살아있는 예배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꿉니다. 한 민족의 역사를 바꾸고, 삶을 치료합니다. 이스라엘의 변화는 바로 섬기는 것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배는 이스라엘의 본질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 만나는 살아있는 예배가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에 생명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창립 54주년 기념 주일을 보내면서 예배를 새롭게 회복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본문에서 제일 먼저 보아야 할 단어는 “광야”라는 단어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어 예배하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광야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신앙의 모티브입니다. 지난 수요일 심야기도 시간에 오정석 선교사가 간증을 하면서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선교사의 생활에서 광야를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요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험한 장소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체험한 장소가 바로 광야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보다 그리고 애굽에 있을 때보다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하나님 체험의 장소였습니다. 바로 왕은 단순히 예배드리는 일이면 애굽 땅에서 해도 되지 않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굳이 광야로 나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왜 하필 광야입니다. 왜 애굽 땅에서는 예배가 안됩니까?
혹시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은 알 것입니다. 광야는 황폐한 땅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적막한 광야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야만 계속됩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니 그들이 할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농사도 못 짓고, 장사도 못했습니다. 놀러갈 데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오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 하나님께로 자신의 삶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출5:1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애굽이라는 문명의 한복판, 세속의 한복판에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힘듭니다. 애굽에서 여전히 물질의 노예로 살면서, 세속의 노예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서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벗어나서 적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예배가 바로 광야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속의 한복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광야처럼 비우고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다가 만나가 내리는 것을 경험하고, 그러다가 바위가 터져서 샘물이 솟아나는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속 한가운데서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바로 그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구름기둥이 나타나고 불기둥이 나타나서 그들의 삶을 인도했습니다.
동시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광야와 같은 상황, 앞뒤를 둘러보아도 소망이 없고, 많은 문제들만 있는 환경에 처한 분이 있다면, 그래서 삶이 광야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적막하고 힘들다면 기억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그런 상황에 들어가면 자살하려고 할 것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상황에서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광야를 만나거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절기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절기’라는 단어입니다. 계속해서 1절을 보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예배에 대한 다른 말입니다. 절기는 다른 말로 축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기를 지키라는 것은 축제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절기의 의미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언제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지향적인 의미입니다. 과거 지향적이란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말하는 것이고 미래 지향적이라는 것은 과거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감사와 미래에 대한 기대가 바로 절기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의 구원에 대한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동시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래에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호하고 지켜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사와 기대는 기쁨과 찬양으로 표현되어 졌습니다. 절기 때만 되면 그들은 기뻐서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 당신의 백성에게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가 그들의 가슴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란 감사와 찬양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보통 한국 교회의 예배에 대한 이미지는 거룩함, 경건함입니다. 눈 지그시 감고, 옆 사람 쳐다보지 않고, 심각하게 인상 쓰고, 굳은 표정으로 예배드립니다. 아멘도 크게 해서는 안되고 조용조용하게 예배드립니다. 예배 마치고 교회를 걸어 나올 때도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거룩한 예배라고 우리는 생각해 왔습니다. 아마 이런 것은 유교적인 영향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오늘 성경은 예배를 축제라고 말합니다. 조용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축제에는 웃음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배에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의 눈물, 통회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웃든지 울든지 해야 참 예배입니다. 그 감동의 물결에 도둑과 강도들이 회개하고 가정이 바뀌고 술집이 문을 닫고 도시에 깡패들이 사라지고 창녀들이 없어지고 역사가 완전히 변화되는 일, 이것을 우리는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월드컵 때 우리나라가 4강 신화를 이루자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고 소리 지르고 난리 났습니다. 감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얼싸안고 기뻐 뛰었습니다. 옆에 사람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좋았습니다. 어떤 분은 온 가족이 함께 축구구경을 하다가 한국이 골을 넣고 승리하자 옆에 있는 사람 붙잡고 뛰었는데 알고 보니까 시동생을 붙잡고 뛰었다나요? 더 놀라운 것은 범죄율이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강패들도, 강도들도, 도둑도 다 사라진 것 같습니다. 교통사고도 줄어들었습니다. 온 국민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 국민이 함께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속으로부터 폭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격과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도 사라지고, 미워하는 자고 사라지고, 원수도 없고, 그냥 누구나 붙들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함께 축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어느 선교사님의 간증에 보면 한번은 한 흑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도저히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보다 청중들이 더 많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 한마디가 끝나면 여기 저기에서 "Amen, praise the Lord, O, Jesus Christ, Halleluah, Thanks God...“ 등등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다 앉아있었는데,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이 사람이 일어나고 저 사람이 일어나고, 일어서서 같이 떠들고... 이 선교사님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어떻게 설교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예배가 절기,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희생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세 번째 단어는 ‘희생’입니다. 3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 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기에 보면 희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예배에 필요한 제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배 때마다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주로 어린 양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피를 뿌려 죄 사함을 받았고 번제로 그 제물을 태워 삶을 헌신하는 예표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어린 양이라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제단인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전 인류를 위한 거룩한 대속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마다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보여 져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성막에 대해 배울 때, 제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향단에 대해서 배울 때였습니다 그것은 분향단에 향을 피울 때 반드시 번제단, 즉 희생제사가 드려진 바로 그 번제단의 불로 향을 피워야 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향을 피우다가 그만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서 두 사람을 태워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희생을 의미하는 번제단의 불로 향을 피워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예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중요한 요소가 우리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물로, 마치 어린양처럼 우리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희생으로, 곧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산제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음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TV앞에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컴퓨터 앞에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몸과 내 삶을 제물로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를 단지 설교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설교시간 시작 전에만 오면 안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그냥 나가버립니다. 아닙니다. 예배에 있어서 설교도 너무 중요하지만 헌신하는 것, 헌금을 드리고 우리의 삶을 드리는 희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헌금이 있고, 헌신과 결단의 기도를 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교회 예배가 축제가 되고 희생이 되고 있습니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참된 예배를 경험한 사람들, 그들이 역사를 바꿀 수 있고,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배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슴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에는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54주년 기념주일에 우리 교회는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예배드리는 교회, 그런 예배자들이 모인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로의 도전과 모세의 시련
출 5:1-23 / 임덕순 목사
모세는 형 아론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으며 애굽으로 가서 바로 앞에 섰습니다. 손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권능의 지팡이를 들고 섰습니다. 과연 모세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요?
1. 바로와 모세의 첫 대면 (1-5)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여호와가 누군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니, 가기를 허락해서 여호와의 재앙이 우리를 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의 태도가 좀 이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니 당장 해방시키라." 고 하는 요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한 것은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놓으라는 당당한 요구였으며, 온역이나 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릴 것이 아니라 바로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애굽땅에 내릴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가 말을 듣지 않는데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시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말을 바로에게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왜 그렇게 했을까요?
모세의 판단에, 내 백성을 내놓으라고 말해서는 어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바로는 대 제국 애굽의 왕인데, 내가 가서 아무리 강하게 나온다고 해도 왕이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고 나만 잡혀가서 고된 고문을 당할 것 아니냐, 그러니 왕이 이해가 되도록 말하자.’ 이것이 언제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말한 것입니다. 사흘 길 쯤 광야로 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해 놓고, 허락해 주면 광야로 갔다가 거기서 멀리 도망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닌데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분석해보고,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은 믿지 않을 거야, 그러니 믿을 만한 말로 바꾸어 말하자. 전도를 해도 그렇고 봉사를 해도 그렇고 항상 자기 생각대로 분석하고 변경해서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안하십니까?
그러나 그게 통하겠습니까?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나 아론의 말솜씨나 재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염려와 방법이 하나님의 일에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라면 말씀하신 그대로 해야 일이 풀리는데, 우리가 괜히 염려가 앞서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아서 말을 바꾸고 방법을 바꾸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내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가 가로막히고 감쇠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이 잘 안됩니까? 해도 해도 길이 안보입니까? 될 듯 될 듯하다가 끝에 가서는 일이 꼬입니까? 그렇게 잘못된 결과만 오는 이유가 혹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에 맞게 수정하며 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옛날에도 통했고 지금도 통하고 영원히 통하며, 그 어떤 시대, 누구에게나 통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제품이고, 지금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바로를 만나는 첫 걸음부터 완전히 잘못 접근했습니다.
2. 바로의 반응 (6-14)
첫째 반응은, “여호와가 대체 누군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나는 여호와를 모르므로 이스라엘도 내 놓을 수 없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신인 여호와가 어째서 애굽 왕인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말인데, 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여호와라는 신은 산골짜기에서 목축하는 사람들이나 다스리는 신인에, 왜 당신의 영역이 아닌 평지 애굽까지 간섭하느냐는 반발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각 지방마다 지배하는 신이 따로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지역마다 지배하는 신이 따로 있다고 믿었습니다. 부엌에는 조왕신이 있고 곳간에는 업신이 있고 물에는 물귀신, 산에는 토지지신, 바다에는 용왕신이 다스린다고 믿었으니, 4,000년 전의 애굽이 전능하시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애굽은 애굽의 신이 다스리고, 가나안 땅은 가나안 신이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페루에는 안데스 산맥이 지나가기 때문에 5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 산길을 갈라치면, 위험한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보이는 위쪽에 개집만한 하얀 집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것은 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을 모셔놓은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왜 저렇게 많으냐고 물었더니, 거기서 보이는 모퉁이를 지키는 예수님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 계신 데가 없는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길거리의 보이는 한 모퉁이나 지키는 ‘모퉁이 수호신’으로 전락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남미의 카톨릭이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에 애굽 사람들이 신에 대하여 무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바로의 말은 그런 무지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또한, 바로의 교만심에서 나온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큰 나라의 통치자들은 예외 없이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천자라고 부르며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고, 일본의 왕은 천황이라 하여 자기를 신으로 섬기게 했으며, 로마의 황제도 자기를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당시에는 애굽이 세계의 최고 큰 나라였으므로 애굽의 왕도 당연히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군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신인데 어떤 신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느냐” 라는 투로 교만한 마음을 나타낸 말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 조금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해서야 되겠습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반응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는커녕 그날부터 더욱 심한 노동을 시켰습니다. 흙을 이겨서 벽돌을 찍어 굽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는데, 진흙에 여물을 넣어서 벽돌을 만들어야 벽돌이 튼튼해집니다. 그동안은 그 여물용 짚은 애굽에서 제공해 주었었는데 그날부터는 짚을 주지 않고 너희가 짚을 구해다가 전과 같은 수량의 벽돌을 찍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지푸라기를 구해다가 같은 양의 벽돌을 찍어내느라고 할 일이 배나 많아졌습니다. 배나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독들이 전보다 심하게 압제했습니다. 일의 감독관들은 모두 애굽 사람들 이었고, 패장이라고 하는 조장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뽑았는데, 감독들은 이 패장들을 채찍질하면서 압박했고, 패장들은 자기 동족의 등에 채찍을 가하면서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고통은 모세가 오기 전보다 훨씬 더 심하게 되었고 그것은 모세에게 심한 낭패였습니다.
3. 패장들의 반항 (15- 21)
패장들은 자신들이 감독의 채찍을 맞으면서 자기 동족의 등을 채찍으로 때리며 일을 시키다가 양심의 괴로움과 육체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서 바로 왕에게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이 같은 고역에 매질까지 하십니까?" 라고 왕에게 호소했더니, “너희가 한 없이 게을러서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잔말 말고 가서 시키는 일의 분량이나 채워라.” 하고 쫓아 보냈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에게서 그런 대접을 받고 쫓겨난 패장들은 모세를 향하여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모세를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구원하려고 사람을 보내셨다고 엎드려 경배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와서 바로와 대결을 하기 시작한 날부터 자신들의 일이 더욱 고되어지고, 채찍에 맞기시작하자, 금새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 일 앞에는 큰 어려움과 수고가 있기 마련이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기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좋은 결과는 바라지만 고난은 당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얄팍한 모습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도하는 일은 크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 일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수고롭게 전도하여 이루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가서 전도는 하지 않고, 총동원주일이 되어도 자기 혼자만 달랑 오는 사람, ‘전도를 하자’ 하면 핑계만 많이 하는 사람이, 우리교회는 왜 이렇게 부흥이 안 되냐고 투덜거리기나 하고, 남의 탓이나 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수고는 감당하기 싫고 영광은 얻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원망한 이스라엘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지 맙시다.
패장들은 모세와 아론을 몹시 원망했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와 애굽인에게 미운물건이 되게 하는 도다! 너희가 가만히 있는 그들에게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한 것이 아니냐?" 라고 원망했습니다.
“위문이 폐문이 되었다”는 말처럼,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화 된 이스라엘을 도와서 구원하려고 갔는데, 오히려 동족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인간적으로 얼마나 미안하고 가슴 아프고 답답했겠습니까?
모세는 동족들에게 미안했을 것이고, 한편, 조금도 참아주지 못하는 자기 민족이 원망스러웠을 것이고, 하나님께도 원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왜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사양했는데도 나를 잡아다가 되지도 않을 일을 시켜가지고 이런 원망과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까? 아마 이런 원망이 모세의 마음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생각하기에 바로는 완고해서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사람이 아니라고 보였던 것입니다.
반면, 바로가 생각하기에는, 모세라는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모세가 오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착한 노예였는데, 모세가 와서 선동하니까 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순종하지도 않고 항의하고 대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작전은 그들의 일을 전보다 훨씬 무겁게 시킴으로서 모세 때문에 해방은 고사하고 괜히 일만 배나 힘들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이스라엘과 모세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바로의 작전은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바로왕의 자비에 기대를 걸었던 모세나, 쉽게 해방을 얻을 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같이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일은 이렇게 꼬여갔습니다.
4. 모세의 원망 (22-23)
22-23 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습니까? 어찌하여 이 백성들로 학대를 당하게 하십니까? 이럴 줄을 알고 내가 오지 않으려 하니까 억지로 가라 하셔서 왔는데,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지만 바로는 우리를 한층 더 학대하기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원치 아니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이것은 모세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들이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보내지도 아니할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여러 가지 재앙으로 그들을 친 후에야 그들이 패물을 너희에게 주며 나가게 하리라.” 3장 19-22에서 아주 명확하게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거나 약속을 위반한 것이 아닙니다. 깊은 뜻이 있어서였습니다. 모세가 아직 모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만약, 내 백성을 내 놓으시오, 하는 모세의 말 한마디에 바로가 얼른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선, 하나님이 미리 말씀해 주신 말씀이 틀린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신 것이고, 더구나 바로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알지도 못하고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그러는 체 하는 분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이 순탄하게 애굽에서 나왔다고는 할지라도 가나안까지 인도해 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애굽 왕이 하나님이 두려워서 이스라엘을 보낸 것이 아니라, 바로의 마음이 좋아서 인심 쓰고 보낸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도 그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해방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의 바로가 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바로가 굴복하고 그들을 석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도 인정해야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쉽게 석방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의 말 한마디에 이스라엘이 석방되었다면, 앞으로 애굽의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낼 뿐 아니라 그들이 거주해야 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먼저 광야에 인도하여 거기서 단단히 훈련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백성들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먼저 심어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두려우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과 두려우심을 보이기도 전에, 모세의 말 한마디에 바로가 인심을 쓰고 당장 내놓은 것이 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서우심은 아무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모세의 첫 번 요구는 거절되어야 마땅했고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미 작정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몰라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면 불평이 앞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몇 번 기도를 하고는 금새 응답해 주지 않으신다고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린 기도가 만일 단번에 응답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응답보다는 우연히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우연히 때가 맞아서 그때 이루어진 것이고, 기도하지 않았어도 일은 거의 다 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권능을 실감 있고 확신 있게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갖은 노력을 다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자기의 능력이 바닥을 다 드러내고,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다가 그것도 지쳐서 완전히 두손, 두발 다 든 다음에 해결되면, 그때는 “아, 이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거야, 이건 세상에 별 방법으로도 안 되는 것이었어, 이건 완전히 하나님이 해 주신거야”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기도하는 첫날 응답을 받게 되면, 오래 기도하고 오래 연단 받은 뒤에 얻는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달라는 것을 언제나 즉시 다 해주어보십시오. 아이들은 부모의 은혜를 모르게 되고, 부모는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한번 안 해주면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 아이는 버릇없는 아이고, 그 사람이 자라면 배은망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당신의 백성으로 키우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모세의 첫 번 요구에 바로가 응답 하지 않게 하신 것이고, 도리어 고난이 심해졌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원망스러운 호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 ; 모세는 일시적이나마 낙심하였습니다. (22,23)
그러나 그는 일을 해가면서 점차 하나님은 강한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참 일군이 되어갑니다.
모세는 첫 번째 시련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정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3장 19-22절과 4장 21-23절에서 하나님은 재차 말씀해 주시기를, 바로가 처음에는 반발하며 거절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고 금은 패물까지 주면서 해방 시킬 것이라고 하신바 있습니다. 모세가 조금만 기억을 더듬었어도 주신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모세는 위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바로가 쉽게 항복하리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말 한 마디만 하면, 금방 바로가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광야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와 치열하게 싸워서 바로가 하나님 능력 앞에 항복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모세에게도 그렇게 되리라고 이미 말씀해 주신 바 있었습니다. 그러니 모세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해 주신 말씀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위기의 형편에 있습니까? 말씀을 기억합시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이 없으면 사람은 낙심합니다. 말씀을 모르면 고난 속에서 방황하고 길을 못 찾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함으로 인한 필요 없는 염려와 불안과 고난을 얼마나 많이 당하였는지 아십니까? 말씀을 기억해 내지 못함으로 인해서 곁길로 돌아가는 수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헤아려 보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때때로 필요한 상황마다 거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떠오르고,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지배한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고난 앞에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약속을 의지하고 힘을 낼 수 있으며 결국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경우에도 가장 지혜로운 길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당장의 현상만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큰 일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을 바라보고 붙잡는 사람은 시련 앞에도 무릎 꿇지 아니하고 끝까지 견디어 승리를 하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중심의 삶으로 범사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 요구에 따른 고난
출 5:1-23 / 박덕기 목사
자신은 힘이 없고 무능하며 언변이 없다면서 네 번씩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던 모세가 마침내 결단을 내리어 애굽으로 가는데,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 그를 죽이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던 까닭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이행해야 될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방인과 언약 백성을 구별하는 할례조차 자신의 아들에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례의 신약적 의미는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골 2:11절에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손으로 양피를 베어서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할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수술 칼을 들이대 사 나의 더러운 죄악을 제거해 버리고, 깨끗한 새 영혼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할례를 받지 않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우리의 심령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 백성 중에서 끊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와 같은 위대한 사명자도 할례의 언약을 어겼을 때 그를 죽이려 하셨던 엄위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우리 모두 마음에 할례를 받아 영원한 천국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목숨이 경각간에 놓인 남편을 구하기 위하여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급히 차돌을 취하여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제야 비로소 모세를 죽이시지 않고 애굽으로 갈 수 있도록 놓아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하면서 한사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고 했던 모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의 형 아론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먼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며 이적을 행하였더니, 백성이 그들의 말을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 후 모세와 아론은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다시 바로에게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라고 재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역정을 내면서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령하기를, 다시는 벽돌을 만드는데 필요한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고, 벽돌은 전에 하던 수효대로 똑같이 만들어 내도록 하라고 하면서, 그들이 게으르므로 쓸데없이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간역자들과 패장들은 바로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짚을 얻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간역자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가로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당일 일을 당일에 마치라 하며, 바로의 간역자들이 자기들의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을 때리며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줄 알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은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기가 막힌 모세는 여호와께 고하기를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고 하면서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본문 내용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때 일시적으로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바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전에는 벽돌을 만들 때 소용되는 짚을 주었으나, 이제는 짚을 주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짚을 줍게 하면서 벽돌 수효는 전과 다름없이 만들어 내도록 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다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박해를 당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다보면 박해를 받을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성도는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닥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 박해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 왕 바로가 자기 밑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케 되는 것을 싫어하였듯이, 마귀는 성도들이 자신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들을 핍박하여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처럼 세상이 말씀대로 살려는 여러분을 핍박할 때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세를 꺾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핍박하는 마귀의 권세를 꺾으시고 마침내는 여러분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인하여 핍박을 당할 때 믿음과 인내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인내로 모든 고난을 이겨낸 자를 위해 하나님은 놀라운 상을 하늘에 준비해 두고 계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2. 성도에게는 고난이나 위기도 축복의 방편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가서 희생을 드리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로가 말씀에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져서 이전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핍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갈수록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매우 당황해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불신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로의 마음이 이전보다 더 강퍅해짐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여,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며칠 동안의 희생 제사가 아니라, 영원히 애굽에서 해방을 얻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으로 보기에는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해방이라는 최후의 승리와 축복을 향해 점점 더 나은 상황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우리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려는데, 주변 상황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갈수록 어려워져만 가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거나 낙심을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이해하려는 데서 오는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악화되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승리와 축복으로 인도하는 과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나쁜 상황이란 없습니다. 단지 있다면 더 나은 축복을 얻기 위해 통과해야 할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갑자기 고난이나 위기가 닥쳐온다고 해도 당황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여러분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인하여 기뻐하고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닥친 어떠한 상황도 반드시 여러분을 승리와 축복으로 인도할 것임을 믿고 확신할 때 고난이나 위기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성도가 서로 신뢰할 때 교회가 평안해집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많은 노역을 하게 한 것은, 백성들이 불평함으로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바로는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과 백성들의 사이를 이간질함으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려는 계획을 성사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바로와 같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성도 사이를 이간질시켜 올바른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의 원수 사단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교회에 들어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하여,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이 올바른 믿음생활을 가지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이간하는 자는, 사단의 조종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훼방하는 악한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이 교회를 훼방하고 성도 사이를 이간하는 사단의 도구가 되지 않나 항상 살펴 이간하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남의 험담을 하고 거짓말로 성도들 사이를 이간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겉으로는 성도인 척하지만 사실은 사단의 조종을 받는 자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신뢰하여야 하며, 때로는 그의 가르침과 요구가 힘들지라도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 간에도 서로가 서로를 신뢰함으로써 교회를 하나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평안해지고 성도들도 더욱 굳건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복음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바로의 간역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혹독한 노역을 시키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바로의 간역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애굽에서 나가려고 하는 생각을 막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폭력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로막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폭력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죄악 중에 얽매어 사망의 종노릇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복음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로마의 악한 황제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박해를 가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복음은 더 빨리 전파되어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놀라운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복음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맡은 성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들이 핍박을 하면 어쩌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비웃고 무시하면 어쩌나? 또는 과연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를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살아 역사하는 힘과 운동력이 있어,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과 심령 골수를 쪼개어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복음이 그 마음을 감동케 하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5. 성도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먼저 호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은 바로의 간역자들이 짚도 주지 않고 전과 같은 수효의 벽돌을 만들라고 하며 자신들을 때리고 핍박하자, 바로에게 찾아 가서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패장들의 태도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는 애굽의 절대 권력자로 그의 조치에 따라 현재의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비록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신들에게 어려움과 문제가 생길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하소연을 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을 핍박하는 세상의 지도자인 바로에게 가서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과가 어떠했겠습니까?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바로로부터 게으르다는 책망만 받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이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에 부딪쳤을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합니까? 가장 먼저 자기 부모에게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보다 자식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헌신적으로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는 누구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닥친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도움의 손길을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하나님께 달려가 그분께 모든 사정을 아뢰고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형편을 가장 잘 아시고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고 모든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6.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삶이 평안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패장들이 바로의 간역자들의 매질과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호소할 때, 바로는 간역자들의 잘못을 시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게으르다고 비난 섞인 책망을 하며, 여전히 짚을 주지 않고 동일한 수효의 벽돌을 만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부당한 명령에 불평 한 마디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절대 권력자로 그들의 주인이었던 바로의 처분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처럼 악한 주인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종이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삶의 평안 여부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인간이 두 종류의 주인 중에서 하나를 섬겨야 하는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주인이란 죄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또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기 원하십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죄의 종이라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죄는 자기 종으로 하여금 불의한 일을 하게하고 그 결과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반면, 하나님은 자신의 종으로 영생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불의와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는 악한 주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거룩함과 영생을 얻도록 하는 선한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편안해집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 죄라는 악한 주인을 만나 죽음의 고통에 이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선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심으로 영생의 기쁨을 맛보는 지혜로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올바른 믿음 생활을 할 때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고 그 길을 막은 바로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핍박하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앞에서 너무 나약하고 힘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두려워 떨거나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의 관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핍박자였던 바로가 곧 패배자 멸망당하는 자가 되고, 박해를 받던 이스라엘이 승리자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잠시 잠깐이요, 곧 영원한 승리가 여러분의 것임을 기억하고, 최후 승리를 거두기까지 담대하게 세상을 향하여 굳센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