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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는 내가 기갑의 대 선배이신 원로 선배님에게 들은 그 분은 6.25사변 때 한국군이 전차대신 장비했었던 M36 90미리 90미리 M36 . 전차 같이 보이지만 자주포다. 상판 장갑은 국내 제조다. 처음에는 이상적인 사거리인 1,500미터 정도에 사격진지를 잡고
그랬더니 자신들의 주포인 90밀리 포는 그 장거리에서 적의 토치카나 갱도 입구나 밀집한 보병들을 명중시킴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었다. 그러나 적의 76미리 포는 그 뒤에 30여 차례나 도둑 고양이 같은 포격을 했었지만 한 발도 자기 소대 전차를 명중시키지를 못했다라고 말했었다. 이 사실 하나로만 보아도 그날 한강 변의 북한군의 사단포들은 불가능했던 거리에서 쓸데없는 사격을 해서 자신들의 위치만 노출 시켰던 것 같다. ----------------------------------- 아마도 별다른 전차전 경험도 없었던 사단포의 포수들은 전차가 쏘니까 같이 어울려 포문을 열었다가 별 성과는 못 보고 위치만 노출하여 적 전차부터 해치운 미 전차들에게 떼죽음을 한듯하다. M 26 전차 ------------------- 미군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은 먼저 한 발도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했던 북한군 전차 쪽의 문제에서부터 한 번 살펴보자. 첫째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미군 전차들과 한강을 두고 맞붙은 T34전차 85미리 포의 영점을 제대로 못 잡았거나 엉터리로 잡아 놓았을 가능성이다. 전차포도 소총과 같이 포탄의 탄착점과 조준경의 십자선이 일치 하도록 영점을 잡아놓고 포수들은 이를 항상 유지 하도록
그러나 이 북한 전차들은 실전에 투입한지도 삼 개월이 되어서 미리 잡아놓은 영점도 변화가 있을 듯하고 미군이 인천에 나타났다는 영점 사격을 하려면 정확히 1,500야드 정도의 영점 사격을 할
두 번째로 가능성으로서는 북한군이 낡은 전차 포신의 전차포는 포강(砲腔)의 마모가 심하다. 전차 포신의 생명은 일천 발 내외다. 크롬 도금이 포강 내부에 되어 있으나 수명이 다하면 여기 저기 깨진 곳이 보인다. 이 정도 되면 포신을 교체 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전차마다 나는 한국 전쟁의 후반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대 원로 선배로부터 전투가 심할 때는 90미리 포신을 한 달에 한번씩 교체해주었다는 말을 듣고도 좀체 실감이 가지 않았었다. 열차 수송중에 박살난 T 34 ---------------------------------- 그렇게 포신의 마모가 심할 수가 있을까하고 반신반의 했었는데 한 전투사를 읽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바꾸어 먹었다.
한국전 피해전차의 60%가 대전차 지뢰에 당한 것이다. --------------------------------------------------------- 한국 전쟁 마지막 단계인 1953년 7월 24일 중공군은 마지막 미군의 방어 고지가 중부 전선에 있었다. 중공군은 집중된 병력을 동원해서 이 고지를 마구 공격을 해댔다. 미군은 이에 M46 전차 30량을 동원해서 치열한 화력으로 전차 1량당 발사 탄수를 평균 내보니 하룻밤에 발사했던 전차 포탄만 160발이나 되었다. 심한 전투라면 열흘 사이에 이 전투는 나에게 들려준 선배의 말씀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하겠다. 북한군은 미군의 심한 폭격으로 보급에 대단한 제약을 받았으므로 제대로 포신을 교체했는가는 의문이다. 낡은 포신으로 포격을 하면 포탄은 명중은 커녕 제 멋대로 날아간다. 이런 포로는 그런 정교한 조준이 필요한 장거리 포사격전이 세 번째로 가능했던 것은 북한 전차가 포격을 해서 미군 전차를
그러니까 85미리 탄이 명중했지만 탄이 관통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미 해병대 쪽을 보자 북한군이 가질 수 있었던 이 세 가지 문제점을 미해병대는 가지지 않았다고 본다.
진동 방면 전투에서 부터 영점 관리를 하는 용의주도함이 보인다. 부산에서 창원역으로 수송된 M 26전차는 창원역에서 인근 산의 작은 바위를 표적으로 영점을 확인하고 전투에 돌입했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사진 -여름이고 전차들이 열차 수송에 맞지않게 포신을 우측으로 돌리고 있고 좌측 아래에는 이미 발사한 포탄 케이스들과 포탄 박스들이 쌓여있다. 이 사진이 바로 창원역에서 영점을 잡는 장면이 아닌지 모르겠다. --------------------------------------------- 인천 상륙 작전 출발전 출발지인 일본에서 영점 사격도 충분히 했을 것이고포신도 새것으로 교체해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해병대 전차포에 맞은 북한 전차가 포탑이 날아갔다는 사실 가공할 독일군의 88미리 포와 성능이 비슷한 미군의
대전차 고폭탄[HEAT]을 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에 파견 된 해병 전차대는 신형폭탄인 고속철갑탄[APDS]을 사용했었다. 오봉리 전투에서 이 고속 철갑탄은 T34 전방사수석 기관총구 아래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포탑 아래를 관통해서 엔진실을 뚫고 그대로 차체를 통과, 해병 전초 기지가 있는 전방 능선에 명중해서 해병들로 부터 왜 우리에게 포를 쏘냐고 항의를 받기도하였다.
있어 포탑이 날아갔다는 사실을 보면 고속 철갑탄이 아니라 대전차 고폭탄[HEAT]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전차 고폭탄은 거리에 상관없이 적 전차에 맞으면 폭발하면서 고열을 내뿜어 적 전차의 장갑을 녹여 깨고 전차 내부로 고열을 철갑탄을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다고 해서 물리탄이라고 불리지만 대전차 고폭탄은 화학적인 힘을 사용한다고 해서 화학탄이라고 한다. [대전차 고폭탄은 보병들이나 차량을 공격하는 고폭탄[HE]과는 대전차 고폭탄은 고열을 내므로 차체 내부에 화재가 발생함은 물론 앞에서와 같이 내부 포탄들의 유폭[誘暴]을 발생시킨다.
위의 피탄 전차가 포탑이 날아갔다는 것은 철갑탄이 아니라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한 미 육군 7사단 전차 대대의 한 중대는 서울로 가지않고 수원경유 남하 오산에서 매복해서 북상하는 북 전차들을 기다렸다.
야간에 T-34 중대가 나타나자. M26 전차가 이것들을 HEAT탄으로 격파했었다. 해병대도 인천 상륙작전때는 철갑탄이 아니라 고폭탄을 지급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참전 미군들은 철갑탄보다 대전차 단지 이 HEAT탄은 생김생김이 탄도 비행에 적합하지 않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전차끼리의 또 다른 사격전이3개월 뒤에 있었다 1951년 1.4후퇴 후이다. 1951년 2월 영국군의 센투리온 전차대는 서울로 침투시킨 미군 정찰대를 한강 남안에서 엄호 중에 강북 철교아래에 나타난 영국제 크롬웰 탱크를 포격해서 이를 파괴하였다. 파괴당한 것이다. 시청 옆을 통과하는 T 34- 이때가 제일 좋았던 시절이었다. ------------------------------------------------------------- 62년전 전차전이 있었던 용산역 근처는 요 근래에 들어서서 8억원의 엄청난 가격에 호가되고 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한때 이 지역에 부동산 광풍이 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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