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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25편)*
구도 장원공 율곡 이이 선조가 왕 노릇을 하던 16세기에 걸출한 학자들이 여럿 출현했다.
구도 장원공 율곡 이이, 성리학의 태두 퇴계 이황, 실천적 성리학자 남명 조식, 실학의 선구자 토정 이지함 등이다
율곡이 태어나던 날 밤!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는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 하여,
율곡의 어릴 때 아명은 '현룡'이었다
시문, 서화에 능통했던 신사임당은 율곡의 성장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율곡은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8세 때 시를 지었고,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였다 (워~매! 이런 아들만 두면 사교육비는 끄~읕!)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율곡은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교에 귀의했었다
그러나 곧 다시 하산하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한 율곡은 성주 목사로 있던 장인에게 들렀다가 후학을 가르치고 있던 35세 연상의 이퇴계를 만나게 된다
성리학의 두 거두가 우연히 만난 것으로, 이 만남은 조선의 성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황은 젊은 율곡의 재능을 인정했고, 율곡은 노학자의 학식과 경륜을 존경하여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성리학에 대한 토론을 해나갔다
(흐음~세기의 만남!)
이이는 29세 때부터 벼슬길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는 각종 과거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 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듣게 되었다.
조선의 과거는 대략 3년에 한 번씩 치루어 지는 경우가 많던데 그럼 도대체 몇년 동안이나 과거를 본거임?
하여간 장하다
확실히 천재는 천재였다.
이이는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국방대책인 '시무 6조'를 올렸다.
또 율곡이 경연에서 '십만양병설' 을 주장하였다 하나 이는 《선조실록》 에는 기록이 없고,그의 문인 김장생의 문집에만 실려 있는 내용이므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이가 죽은 몇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선조가 율곡이 건의한
'시무6조'만 제대로 수용했어도
그런 참혹한 전화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의 정자는 파주시 임진강변에 있는 '화석정'이다
율곡이 어렸을적 부터 노닐던 곳으로 율곡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수시로 이 정자의 나무에 들기름을 많이 먹였다.
율곡이 죽은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피란을 가던 중
이 화석정을 불에 태워 임진강변을 밝히자,
선조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나라의 환란을 예감하여 대비한 이이의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이야기이다.
(왜~~~그랬어? 걍 선조가 물귀신 되게 냅두지~)
서인에 속했던 이이는 편당을 들지 않고 화해에 힘을 기울 였으나, 그의 성격 자체가 원만치 못하여 남을 포용하기 어려 웠으므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이는 학자이자 청렴한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그의 후학들인 김장생, 조헌, 이귀, 황신 등은 조선후기 정치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
조식과 이황은 둘 다 16세기를 산
인물로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이다.
진주가 근거지인 조식은 경상우도,
안동이 근거지인 이황은 경상 좌도를 이끌었다.
이 둘의 학풍은 서로 달라 퇴계의 학풍은 학문으로서 '인'을 숭상 하고,
남명의 학풍은 '의'를 숭상했다.
또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학문은 태산처럼 높다 했다.
(헉! 소지섭이당~ㅎ)
퇴계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인물 이었으나, 남명은 '경의검'이라는 칼과 '성성자'라는 방울을 차고 다녔다.
특히 '성성자'라는 방울은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서 잡념을 없애 성인의 길에 도달하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는 과격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당시 조정을 뒤집어 놓은 인물이었다.
퇴계와 남명은 50여년 간의 사화기를 겪으면서 출사보다는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적에 대한 입장에서도 둘은 달랐다.
퇴계는 회유책을 주장한 반면
남명은 강력한 토벌책을 주장 했다.
남명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적이 설치면 모가지를 확 뽑아
버려야 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런 영향을 받아 외손녀 사위 곽재우(흑표곽순태 31대손ㅋㅋ)는 뛰어난 의병장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을 통해 가장 많은 의병장들이 남명 문하에서배출되었다.
개혁 사상가 였던 조식은 당시 썩어빠진 양반들을 비난하며,백성들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 선각자였다.
다양한 학문에 개방 적이었던 조식은 외세의 침입을 예견하고 제자들 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조식님~다시 환생하시구료!
오셔서 기호 몇번 하실라우?)
*기인 토정 이지함 *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이지함은 조선시대 실학의 선구자였으며, 기인이었다.
그는 이색의 후손으로 명문가
출신 양반 이면서도 목에 힘을 주거나 위선을 떨지 않았다.
행색도 나막신을 신고서 머리에 솥을 뒤집어 쓰고 돌아다녔다.
딱 보면 상한 사람이지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솥을 뒤집어 쓰고 다닌 이유는 당시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하고,
또는 이지함이 전국을 유랑하는 것을 좋아해 어디서든 밥해먹기 편하도록 머리에 솥을 쓰고 다녔다고도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 각자 알아서 판단하기로..하여간 쓰고 다녔다.
이지함은 학문에만 조예가 깊은 것이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산수, 소리에 능했다.
뿐만 아니라 관상, 신방, 비결 등 통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박식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지함은 '농촌 경제에만 묶이지 말고 상업, 수공업,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통해 전반적인 국가의 부를 창출하고 그 혜택이 백성들의 생활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실학사상을 주장했다.
상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지함이
찾아간 곳이 화담 서경덕 문하 였다.
서경덕을 중심으로 모인 인물들은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문을 수용했던 개방적 학풍의 지식인 그룹이었다.
조식, 이지함, 서경덕, 정여립 같은 대어들이 줄줄이 나타나던 시대 였으나 아무도 뜻을 펼쳐보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으니 오호~통재라!
이지함 자신도 탁월한 장사꾼 이었다. 그는 수완이 좋아 장사를 할 때마다 매번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이지함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번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사를 해서 번 돈을 곡식으로 바꾸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흐음~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군! 멋져부러~~)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능하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와 1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로 지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저술했을 수도 있고, 그의 이름을 빌린 것일 수도 있다.
이지함은 16세기를 살았는데 '토정비결'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유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 밝혀 지지는 않았으나 '토정비결'에는 이지함의 사상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지함은 사화가 난무하는 것을보고 출사를 단념 했었으나, 잠깐동안 경기도 포천 현감을 하면서 남긴 기록이 있다.'
포천현의 형편은 어미가 없는고아 비렁뱅이가 오장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고혈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나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 입니다'
한양에 가까운 경기도의 형편이
이랬으니 다른 곳은 얘기할 것도
없었다.
이러한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접한 이지함은 조정에 땅이며 바다를 따질 것 없이 개발하여 국부를 늘리고 백성들을 자급하게 하는 것만이 깊어진 병통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얼뜨기 같은 임금들과
썩어빠진 관료들은 그의 주장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왕조 내내 이렇게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런 놈의 나라가
왜 존재했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아마 공부가 모자라는가 보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26편)*
비겁하고 간교한 소인배 선조 최초의 방계 출신 왕, 선조
선조 이균은 중종의 손자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으로 인종, 명종과는이복 형제 사이였다.
명종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왕이 되었으니 조선최초로 방계 출신의 임금이 왕이 된 것이다.
그것도 아홉 번째 서자의 세 번째 아들로 왕실 족보 대로라면 왕위는꿈도 꿀 수 없는 하찮은 신분이었다.
왕위를 이은 선조의 가장 큰 약점은 방계 승통이었으니, 그래서 그가 그 콤플렉스 때문에 다른 왕들보다 더 못되게 굴었는지 모른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명종은 창빈 안씨의 소생들인 3명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친히 벗어 써보라고 하였다.
하성군(훗날 선조)의 두 형은 차례대로 익선관을 써 보는데,막내인 하성군은 쓰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명종이 그 연유를 물으니 "임금님이 쓰시는 것을 어찌 감히 신하가 쓸 수 있겠습니까?"
막내이지만 하성군의 기지가 남다름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명종이 "임금과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중요한가? 라고물으니 하성군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임금과 아버지는 다르지만, 충과 효는 본래 하나입니다"명종 입장에서 보면 어린 하성군이 얼마나 기특하고 예뻤을까
(흐음..어릴때는 제법 쓸 만 했군)
선조는 조선의 27명의 왕 중에서
4번째로 즉위기간이 긴 왕이다.
영조는 약52년, 숙종은 약46년
고종은 약44년, 선조는 약41년
멍청이 선조와 얼뜨기 중종!
둘의 재위간이 거의 1세기 가까이나 되는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조선 꼴이 어땠겠는가?
(두번 말하면 잔소리여~~)
조선 왕조사에서 가장 참혹한 시기가 근대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대이다.
또 조선 역사상 최대의 옥사가 벌어져 아까운 선비 1,000여명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선조는 자신의 치세 때 시작된 당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향후 조선이 당쟁의 폐해로 쇠퇴 하도록 방치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도망만 다녔다.
* 선조의 잔머리 양위선언 *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는
급한 대로 둘째 광해군을 세자로
세워 분조를 맡겼다.
이때 광해군이 눈치 있게 업무를 대강 수행했으면 되었을 것을!
열심히 수행한 덕분에 선조의 눈 밖에 나버렸다.
이런 판에 명나라 또한 선조의 무능에 짜증이 나서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선조는
잔머리를 굴렸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양위선언을 하는 것 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그것도 자그마치 10여 차례나!
이 빌어먹을 양위선언은, 당사자인 왕은 양위할 생각은 눈꼽 만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백관들은 그 선언을 취소하도록 수도없이 상소를 올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모두들 왕 앞에 나아가 양위 취소 선언이 있을 때까지 엎드려 통곡하면서 죽치고 있어야 하는 한심한 상황을 연출해야 했다.
물론 거기에 빠졌다가는 천하의
불효자가 되니 무릎이 아픈 것을
꾹 참고 광해군도 같이 엎드려 있어야 했다.
국력을 모두 기울여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 이게 무슨 등신같은 짓이냐 말이다
이걸 선조는 재위중에 자그마치 15번이나 함으로써 신하들의 충성심을 유도하고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방편으로 삼았다.
물론 선조는 실제로 양위할 생각은 벼룩의 등짝 만큼도 없었다.
(이룬 쩝쩝..이 시점에 전쟁중에도 헌법을 야매로 개정하려 했던 이X만이 생각나는 이유는?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 하지 않던가?)
정유재란이 끝난 후인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2년 뒤 51세 되던 해
19세였던 김제남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았으니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 이다
그런데 국혼 4년 후에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조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55세에 씨앗이라 ..대단혀요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고 말고.)
당시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과
둘째 광해군은 공빈 김씨 소생이었고,
셋째 아들 의안대군과 넷째 신성군은 인빈 김씨 소생 이었다.
그리고 인목왕후가 낳은 영창 대군이 바로 선조가 기다리던 정비소생이었으니, 이때부터 선조의 마음이 광해군 에게서 떠나기 시작했다.
선조가 재위 41년을 맞으면서 병세가 심해졌다
가망이 없음을안 선조는 전교를 내리기 위해 세정승 들을 불렀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 겨우 2살 이었다. 아무리 정비의 아들이라 하여 예쁘더라도 세자의 직무를 16년이나 잘 수행해 온 34세의 세자가 있는데
이를 폐하고 두 살배기를 세자로 책봉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 했다.
선조의 죽음에 대해 북인이 기록한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왕비 인목대비가 지켰다고 했다.
그런데 서인측의 기록인 '광해군일기' 에는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광해군이 찹쌀떡을 올렸는데
선조가 먹고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에서 남계집을 인용해 선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전하는데 그에 따르면 입시했던 선비 의원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 소문이 헛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선조는 그때 잘 죽었다.
요대목에서 잠깐!!!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가 떡을 먹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설이지만,
역사적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관계를 정리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록에 기록된 사인*
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1608년 2월 1일, 고질적인 질병(종기, 천식 등)이 악화된 상태에서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승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하 직전의 상태는 매우 위중했으며, 특별히 '떡'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떡'과 관련된 야사(野史)*
선조가 떡을 먹다 죽었다는 이야기는 주로 민간의 소문이나 야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광해군과의 갈등*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과 선조의 사이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광해군 측에서 올린 떡을 먹고 체했거나 독살당했다는 식의 음모론이 덧붙여진 경우가 많습니다.
*급체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찹쌀떡 같은 음식을 급하게 먹다가 기도가 막히거나 급체를 하여 손을 쓸 새도 없이 승하했다는 설이 구전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역사적 배경*
선조는 승하 전 몇 달 동안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지병으로 인한 합병증이나 심부전 등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앞으로 돌아가서!!!
* 도로묵 을 아시나요?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피란을 가게 되었다.
피란을 떠날 때 먹을 것을 충분히 가지고 간 것도 아니고 피란지에 맛난 먹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왕이라도 초라한 수라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딱한 소리를 듣고 한 어부가 동네 앞 바다에서 잡은 '묵' 이라는 물고기를 왕에게 바쳤다.
선조는 이 물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고,
그 이름을 물어보았다.
'묵'이라고 하자 그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즉석에서 '은어'라는
근사한 이름을 하사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환궁한 뒤 피란지에서 맛 보았던 '은어'가 생각나서 선조는 그 물고기를 다시 찾았다.
다시 먹어 보았더니 옛날의 그 감칠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조는 "에이, 도로(다시)묵이라 불러라!" 라고 했단다.
이로부터 '도로 묵' 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이를 일컬어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 했는가?)
선조에 대해서 저와 다른 생각이 있는 분들이 계실듯 합니다만.
이 내용은 백성편에서 바라본 왕들에 대한 평가라 관점에 따라 다를수 있음을 참조해 주시기를.....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27편)*
* 비범한 인재 정여립 *
정여립(1546~1589)은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무예와 활쏘기에 뛰어나고 총명하여
한 번 배우면 잊는 일이 없었다
밤을 새워 책을 읽을 만큼 책을 좋아하여 제자백가의 학문에 두루 능통했으며,
글씨와 시에도 능해전주 일대에서는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난 호남인 데다 성격은 사리를 분별함에 있어 논의가 강직하고 비굴하지 않았다.
정여립은 드문 인재였던 것이다.
정여립은 선조 3년 24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를 했다.
조선시대 평균 급제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성공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도성으로 올라간 정여립은 서인 이이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이의 문하에는 인재가 넘쳤으나
그 중에서도 정여립은 논의가 높고 격렬한 데다가 재기가 뛰어나 다른 사람 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이는 그의 재주를 아껴 기회가 닿는 대로 조정에 천거했다.
1584년 서인의 거두 이이가 사망했다.
이이는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그리 넉넉한 편이 못 되어 경솔하고 편견과 아집이 있었다.
생전에 이이를 신뢰했던 선조도 이이가 죽고 나자 그에 대한 신뢰감이 점점 사라져갔다.
동인들은 이이를 탄핵하러 나섰고, 이이를 공격했다
귀양갔던 박근원이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자 정여립은 서인을 버리고 동인 편에 서기 시작했다.
이이의 추천으로 조정에 발을 디뎠던 정여립이 스승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유는 확실치는 않다.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죽음 직전의 이이가 한사코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와 그의 기질이 동인의 영수인 이발과 좀 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이는 겉과 달리 속으로는 정여립의 과격성을 걱정한 듯하다.
(하모~하모..나라도 스승이 그리했으면 서운했을끼야~~)
이조전랑 자리에서 미역국을 먹고 1년 후 조정에 다시 들어온 정여립은 경연에서 서인들을 공격 하기 시작했고 스승인 이이를 '나라를 망친 소인'이라고 혹평 하고 스승을 배반 했다는 것이 공론화되연서 당쟁은 격화되었다.
선조는 정여립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떫게 보았으며, 정여립이 임금에게 건의할 때 눈을 똑바로 뜨고 따지고 들던 것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정여립은 선조가 아둔하고 부덕한 임금이라는 사실을 진작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격이 호방하고 과격했던 정여립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귀천의 씨가 따로 없다
천하는 백성들의 것(공물)이지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는 없다.
누구든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을 흔히 했다.
(흐음~멋져부려! 그 사상)
선조가 자신을 꺼리자 정여립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고향으로 돌아간 정여립은 자기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체제에 도전하고 평등한 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반상의 귀천과 사농 공상의 차별,
남녀의 차별도 없는 '대동계'를 만들어 누구나 조직에 들어오게 했다
정여립은 그 당시의 정치 이념이자 사회통념인 유교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천하는 만민의 것이라는 대동사상을 내세웠다
대동계의 '대동'이란 대동소이, 대동단결, 태평성세의 의미로 쓰인다
즉 아무차별이 없고 모두 같이 잘 사는 이상사회의 의미인 것이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그저 양반의 수탈 대상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양반은 천민을 죽여도 큰 문제가 안 되었으니 말하자면 천민은 말하는 짐승이었다
이런 🐕같은 사회를 엎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선각자 정여립에게 당연히 있었을 것이며,
그래서 그의 사조직을 대동계라 이름했던 것이다.
전라도 일대에서는 정여립이 비범한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어!정여립의 청탁이 있기만 하면 곡식과 돈, 그 밖의 각종 생필품 들을 바리바리 실어서 보내 주었다
정여립은 전라도에서 일종의 (사교 교주) 역할을 한 것 같다.(개인생각 )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전주 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선조 20년 ! 전라도 해안지방에 왜구가 쳐들어왔다.
당시 전주부윤이던 남언경은 여러 고을에 병력파견을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자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정여립은 즉시 기백 명의 대동 계원들을 집합시키고 믿을 수 있는 무사를 장령으로 임명한 다음 출진시켜 왜구를 물리쳤다
뒤에 남언경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는데, 그는 대동계를
왜구를 대비한 지역 방어조직으로 보았고, 허약한 국가의 방위체제를 보안하기 위하여 사병을 양성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이게 화근의 씨앗이었던게야?)
진보 지식인이었던 정여립은 풍수와 천문지리,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주자학에서 볼 때 모조리 이단 이었다
거기다 대동계 계원들 까지 수 백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서인들이 보기에는 영 꺼림칙 했으므로 역모로 몰아 죽인 것이다
결국 정여립은 기존의 신분질서에 도전 하고 백성중심의 정치체제가 구현될 길을 모색하다가 정치적 희생을 당한 불운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그 시대에 왕권 세습에 문제 제기를 했다는 것은 그가 지나치게 시대에 앞선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단재 신채호의 정여립에 대한 평가를 보자! 정여립은 400년 전에 군신 강상론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으로, 《민약론》을 저술한 루소와 견줄 만하다
하지만 루소와 같이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정여립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아까운 인물 하나가 죽었다
*서인의 역모조작 기축옥사 *
기축년(1589) 10월,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웅인 등이 고변을 했다
정여립이 전라도에서 역모를 꾸미는 것을 안악에 사는 조구가 밀고했다는 내용이었다
찌질이 선조는 즉시 금부도사를 보내 정여립을 체포 하도록 했다.
그 무렵 황해도 안악에 있던 변승복은 조구가 정여립을 고변했다는 말을 듣고 금구까지 나흘만에 달려가 정여립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변승복은 별명이 '호랑이'라고 알려질 만큼 용맹한 인물로 정여립의 측근이었다
소식을 들은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 그리고 박연령의 아들 박춘룡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망쳤다.
이튿날 금부도사가 들이닥쳤으나 정여립은 이미 도망친 후였고, 그집에는 승려 지영과 사장 그리고 창고에는 백미 200석과 잡곡 100석 정도가 있을 뿐 이었다
당시 정여립은 동인에 속해 있었고, 동인들은 아무도 정여립의 모반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금부도사가 정여립의 집에서 편지들을 모조리 압수해 한양으로 가져갔다.
(무기가 아니고 편지임을 명심)
이로써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 받은 자들은 모두 역모의 연루자로 몰려 애매한 죽임을 당한 자가 지천으로 생겨났다.
정여립은 변승복에게서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듣고 금구에서 도망쳐 진안 죽도 산골에 들어가 숨었으나 진안 현감 민인백의 포졸들에게 발견되었다
(이룬~어여 홍길동의 축지법이라도 써서 도망가지~)
산골짜기에 들어가 밭가에 마른 풀을 쌓아놓고 그 속에 숨어 있었던 정여립은 관군이 사면으로 포위해 들어오자,
칼을 빼어들고 관군에게 달려들려 했다이에 변승복이 말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자결할 것이지 관군이 무슨 죄가 있소? 우선 나부터 죽여 주시오."
정여립은 변승복을 칼로 쳐서 죽이고 아들 옥남이도 베었으나 칼이 빗나가 옥남이는 죽지 않았다.
민인백이 투항을 권고하자 정여립은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칼끝에 목을 찔러 죽었다.
그런데 그거 참 이상하다!칼을 어떻게 자루부터 땅에 똑바로 꽂을 수 있었을까?
17세기 영조 때 남하정이 당쟁에 관해 쓴 책인 《동소만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여립이 변승복의 꾐에 빠져 진안군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두들겨 죽이고는 자살했다고 아뢰었다"
정여립의 시체는 한양에 도착하여 능지처사 되었으며, 한 토막씩 잘린 다음 8도에 돌려졌다.
선조는 정여립의 집터를 파헤치고 숯불로 지져 그 맥을 끊고 연못 으로 만든 다음 제왕의 기운이 있다고 전해 오던 정여립의 조상 묘터를 파헤쳐 유골을 꺼내어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렸다
(어휴 겁쟁이 나쁜선조)
버럭 ! 연산군때 유행했던 쇄골표풍을
요기서 써먹음
잠깐 요대목에서!!!!
*쇄골표풍*
조선 시대 연산군 때 행해졌던 가장 참혹한 형벌 중 하나를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시신을 다시 베는 '부관참시'보다도 훨씬 강력한 처벌로, 죽은 사람을 한 번 더 죽이는 것을 넘어 아예 세상에서 흔적을 지워버리는 형벌이었습니다.
*역사적 맥락과 의미*
이 용어는 주로 연산군일기와 같은 실록이나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사서에서 발견됩니다.
*행위*
이미 죽은 죄인의 무덤을 파내어 시신을 꺼낸 뒤, 뼈를 잘게 부수거나 가루로 만듭니다.
그 후 그 가루를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흩뿌리는 것입니다.
*상징성*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신체발부 수지부모(몸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라는 원칙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뼈를 가루로 만들어 날려 보낸다는 것은 고인이 사후에 쉴 곳(무덤)을 없애고,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대상 자체를 소멸시키는 영원한 죽음 과 가문의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 주요 사례 *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을 숙청할 때 이 형벌을 남발했습니다.
윤필상, 한치형 등: 연산군은 갑자사화 당시 이미 죽은 이들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훼철한 뒤 쇄골표풍하도록 명했습니다.
*어리니(봉보부인 백씨)*
성종의 유모였던 백씨는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쇄골표풍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1584년부터 정권을 잡지 못해 울분에 차 있던 서인들은 정여립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동인에서 역적이 나왔다고 손뼉을 치고 좋아하며 서로 축하했다.
(흥~칫 뿡! 난 다 알고 있걸랑?
서인 너희들의 자작극이란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