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0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마태오 9,18-26
세상 사람들이 바라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회당장의 딸과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어 곡을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물러들 가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나 회당장의 희망은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기 딱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 동행하며 세상이 비웃을 일을 희망하지 않는다면 진정 그것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일일까요?
영화 ‘킨’(2018)은 고아로 한 가정에 입양되어 자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년 엘라이가 그 주인공입니다.
엘라이는 양아버지를 돕기 위해 방과 후에 고철을 찾아 파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고철을 발견합니다.
엘라이가 그 고철을 만지자 총으로 변합니다.
그 총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고 지구의 것이 아닙니다.
이때 6년간 감옥에 있다가 지미라는 아들이 출소합니다.
지미는 갱단에게 돈을 빌렸었는데 6년 동안 6억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갱단은 그 돈을 갚지 않으면 지미의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죽습니다.
엘라이는 지미와 도망치며 지미를 돕겠다고 합니다.
아이가 무슨 힘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에게는 총이 있습니다.
희망은 능력이 주어졌음을 믿을 때 생깁니다.
그리고 희망이 없다면 능력이 주어졌음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미가 총으로 형을 구하고 있는 동안 외계인들이 도착합니다.
외계인들은 엘라이가 지구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종족이기 때문에 총이 작동하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엘라이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지구상에서 자신만이 총을 다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희망은 믿음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옆에 두고 희망하지 않는다면 믿음도 증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도끼가 있다면 나무를 찍고 싶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나무를 베고 싶어진다면 그 사람이 보지 않아도 톱을 가졌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저희 집은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과 후의 차이는 매우 컸습니다.
전기로 불만 밝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밥도 지을 수 있고 빨래도 할 수 있고 TV도 볼 수 있고 컴퓨터도 살 수 있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자 바랄 것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꿈도 꿀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고 있다면 전기가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비웃을만한 것들을 바라게 됩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은 당시 말도 안 되는 아주 큰 병원을 시골에 짓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병원이 지어졌습니다.
지금도 그 병원은 존재만으로 비오 성인이 하느님과 동행하고 있었음을 믿게 하는 표징이 됩니다.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하늘 나라를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하겠다고 꿈에서 베드로 성인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선교회를 보며 많은 이들이 마데 데레사도 하느님과 동행했음을 믿게 됩니다.
가장 큰 선교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밖에 나가 주님을 믿으라고 전하고 다니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선교의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만한 것을 바라고 그것을 이뤄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나고 하혈병이 고쳐지는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된 것처럼,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희망할 수 있는 일을 희망하는 것이 더 큰 선교의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마태오 9,18-26
돌아보니 죽은 회당장의 딸이 바로 저였습니다!
치유면 치유, 소생이면 소생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예수님 공생활의 절정기가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회당장의 딸을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완전 절명한 그녀를 소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묵상하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치유사화, 소생사화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궁극적인 가르침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권능으로 소생된 회당장의 딸은 물론 생명과 젊음과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인지는 모르지만 남아있는 생애를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3~40년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또다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생이 무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소생보다는 영원한 주님 나라에서의 영생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생사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필멸(必滅)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근원적 결핍과 모남과 나약함으로 인해 틈만 나면 여기저기 상처입고 영혼의 피를 흘리던 저였습니다.
피투성이 인생에도 불구하고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혈루증 여인처럼 솔직하고 용기 있게 주님께 매달리지 못하는 제가 더 심각한 중증의 환자였습니다.
어떻게서든 혈루증 여인처럼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옷자락 술에 내 손길만 닿으면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간절한 믿음을 지니고, 주님을 향해 손을
뻗어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죽은 회당장의 딸이 바로 저였습니다.
육신은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로, 허깨비처럼, 좀비처럼 흐느적 흐느적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숨만 겨우 쉬고 있지,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삶을
마지못해 연명해왔습니다.
다시금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손길에 온전히 의탁함을 통해, 그분께서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고, 나를 온전히 차지하게 하시게 되도록 청해야겠습니다.
내 안에서 나는 점점 사라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더 커지시는, 그래서 잠시라도 참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를 완전히 비워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2023. 7. 10. 월)(마태 9,18-26)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 9,18-19.23-25).”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생명의 주님’이라는 말은, 인간의 목숨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만 하시고, 죽이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데도 받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생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즉 멸망을(영원한 죽음과 소멸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생명을 받기를 거부해서 잃게 됩니다.
<얻으려고 하면 얻을 수 있는데도, 노력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은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이제 곧 소녀를 살리겠다고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긴 잠’일 뿐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라자로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1-15)”
라자로의 경우에는, 그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머무르신 다음에(요한 11,6), 즉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 그에게 가셨습니다.
회당장의 경우에는,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딸이 죽은 다음에 예수님에게 온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왔고,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마르 5,22-23; 루카 8,41-42).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 때문에 멈추게 되었고, 그 사이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습니다(마르 5,35; 루카 8,49).
표현만 보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데, 전후 상황을 보면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원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마태 8,5-13), 굳이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즉 말씀만으로 회당장의 딸을 바로 고쳐 주실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의도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라자로의 경우에는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에게 라자로의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믿음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해석됩니다.
회당장의 경우에는, 당신이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계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신 이야기인데, 사실 이 이야기도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사실상 죽은 것과 같은, 또는 죽는 것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루카 8,43).”
그 여자의 병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여자는 완전히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라도 하나의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르코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르 3,10).
분명히 여자도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직접 간청하지 않고 몰래 옷을 만진 것은, 그 병의 특성 때문에, 즉 수치심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 직접 간청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은 믿지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 미신이 되어버립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믿음이 기적의 원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더욱 굳은 믿음으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 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에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