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에서 / 엄현옥
청량리역을 빠져나왔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경적을 뒤로 한 채 들어섰으나 초입까지 소음이 따라왔다. 도회에서 머지않은 이런 곳에 울창한 수목원이라니 의외였다. 겨울의 홍릉 수목원은 고즈넉했다. 그곳은 다양한 식물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전문 수목원이었다. 식물 유전자원 확보를 위해 조성한 시험연구림이라니 한 그루 한 그루가 범상치 않아보였다.
숲에 들어서니 바람이 등을 밀었다. 한 점 바람조차 걸릴 것 없는 나목裸木 사이로 바람이 분주히 오갔다. 잎을 떨구고도 모자라 스스로 메말라가는 가지들은 초췌했다. 수목은 보이는 것의 성장을 멈추고 뿌리에 집중했다. 마른 줄기와 뿌리만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계절이 힘겨워보였다. 성긴 나뭇가지가 구도의 전부인 맑은 하늘은 청정했다.
침염수림지역을 걸었다. 나무들은 신입생인 듯 번듯한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연두색과 카키색, 베이지 톤의 얼룩이 적절히 배열된 반송의 표피는 디자인이 신선했다. 군복의 얼룩무늬 도안을 반송의 껍질에서 차용했을까. 암갈색 줄기의 숲에서 그녀의 패션 감각은 단연 돋보였다. 군복의 이미지를 본뜬 밀리터리룩(military look)이 잘 어울리는 스타일리스트였다.
마른 잎을 매단 좁은 단풍은 전성기의 영화榮華를 떨쳐내지 못했다.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도록 시든 잎을 매단 채 나목의 간결한 미덕을 갖추지 못했다. 팻말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청춘을 기억해 내기도 어렵겠다. 모름지기 시절에 맞는 행색을 갖출 일이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드러누운 노송은 표피의 안색만으로도 그의 생을 짐작케 했다. 균열을 거듭한 표피에는 온 몸으로 인고의 시간이 화석처럼 박제되었다. 수령 연장을 위해 인간이 뚫은 몇 개의 구멍 자국이 선명했다. 손가락보다 가늘었을 줄기에서 아름드리 거목으로 몸을 키운 나무가 장엄한 생의 마감을 앞두고 길게 누웠다.
노송과는 달리 정결한 흰 줄기로 곧게 서있는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실주의 화가가 넓적한 흰 붓으로 마무리한 것이 분명한 자작나무였다. 만주와 시베리아를 지나 세를 불려 내려왔을 나무는 우아한 자태를 한껏 뽐냈다. 근래에는 강원도에서도 군락을 이루지만 자생으로는 북한이 남방한계선인 셈이다. 시인이 남긴 자작나무에 대한 헌시獻詩가 떠올랐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 같이 단샘이 솟는 막우물도 자작나무다
산너머는 평안도平安道 땅이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백석의 <백화(白樺)>
산골 촌부의 삶의 일부였을 자작나무에 둘러싸인 외딴집 풍경이 그려졌다. 숲을 이룬 자작나무는 얇은 흰 껍질로 혹한을 버틴다. 기름기가 많아 불에 잘 타는 껍질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불에 탄다하여 이름조차 자작나무라던가. 결혼식에 '화촉을 밝힌다'라는 말도 자작나무를 '화樺'라 부른데서 온 말이다. 무리를 이루며 곧게 자라는 나무의 몸피는 가구나 내장재 등으로 쓰이며 펄프로도 제격이라니 찬사가 아깝지 않다.
자작나무는 산불이나 산사태로 빈 땅이 생기면 가장 먼저 자리 잡고 빠른 속도로 숲을 이룬다. 그러나 점차 가문비나무나 전나무 등이 자기보다 더 올라오면, 그들에게 땅을 넘기고 사라진다. 세를 불리거나 세습에 대한 욕망은 사람의 일이다. 세습을 통해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교역자도 있다. 자신이 일구어 놓은 것들을 당대로 끝내는 자작나무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0년 남짓 산다는 자작나무에게 정비석이 수중 공주라는 찬사를 부여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쉼터에 앉아 수목원을 내려다 보았다. 각기 다른 개성으로 제 자리에 선 수많은 나무들의 표피를 담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차를 마셨다. 나무는 세상의 역사와 사람들의 언어를 자신의 몸에 고스란히 기록한다. 나무만큼 시간의 눈금을 정밀하게 채집해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나무들도 저마다 이름이 있고 각각 수피의 무늬와 잎이 다르다. 개성이 다른 반송과 좁은 단풍, 자작나무를 닮은 몇몇 지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흔들리지 않은 자존감으로 누군가에겐 그루터기를 내주고 그늘과 열매를 베푼 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과거와 현재를 꾸려 저마다의 작은 도서관인 양 삶의 역사를 축적한다. 그들은 숲을 이루지 않았으나, 나무를 닮았다.
두어 시간 동안 나무들과의 만남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수목원에는 저마다의 성품과 향기로 자신만의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사람 나무들을 뒤로하고 수목원을 빠져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