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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 11-15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하나님께서 어떤 때, 어떤 방법, 그리고 누구를 통해서 포위하게 하시고 옥죄어 오게 하시든지 각각의 목적이 있으십니다. 택하신 자들에게나 유기된 자들에게 각각 다르십니다.
다 포위하시고 조이신 후에 최후 통첩으로 장기판에서 ‘장 받아라’ 이든지 바둑판에서 ‘아달이’라고 하든지 그 목적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며 그 닥친자의 반응도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유기된 자들은 멸망을 향하여 맥진 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의 자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1. 본문 11절은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입니다.
범죄와 심판에 대한 확증을 받은 가인은 형벌의 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은 땅이 그에게 복수를 하도록 설정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마치 사악하고 무시무시한 존속 살인으로 하나님이 모독을 받으시고 마치 ‘네가 범한 그 살인죄를 나에게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무감각한 땅 자체가 너의 형벌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듯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이것으로 그 범죄의 극악성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에서 하나의 전염성을 지니고 있는 오염이 계속 땅에까지 흘러가는 것처럼 점점 극악스러워지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형집행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상상을 보면 잔인성이 여기서는 땅에 전가되고 있다고 하며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그 땅을 야수들에 비유하고 계신 것처럼, 땅이 그의 동생 아벨의 죄를 삼켜버렸으니까 그 잔인성이 땅에 건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상은 진정한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관대한 조치가 의인화되어 그 땅에 돌려지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염을 증오하고 있는 그 땅이 입을 벌려서 형의 손에 의하여 흘려진 피를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장 혐오를 사는 것은 이 사람의 잔인성입니다. 그는 이웃의 피를 흘리면서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땅이 그 피를 받는 그릇이 되어 그 이웃의 피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피가 마치 땅이 평상시에 없었던 현상을 일으켜 그 피를 흡수한 것처럼 어떤 기적적인 것으로 상상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인데 사람 자신에게보다는 땅에 더 많은 인정이 서려있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가인이 지금 그전에 아담이 받았던 것보다 더 강력한 말씀으로 저주를 받고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에게는 인류를 아끼시려는 의도에서 아량을 베풀어 다루셨으므로 그렇게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은 무언가 그들의 의견에 색칠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담은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 는 말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복수의 망치가 가인의 인격에 대항하여 전율(戰慄)을 주고 있으며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잠정적인 형벌이 시도되고 있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네가 ‘하늘’에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땅’에서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여 가인의 후손들이 구원의 소망에서 끊겨서 더 담대하게 그들의 저주로 줄달음질쳐 가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것은 일시적인 형벌이라고 하는 그들의 의견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만족스런 확증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땅에 위임되고 있으니 그것은 가인이 하나님의 심판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올 필요도 없으니 그 이유는 땅이 그 자체로서 복수자로서 형벌을 주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2절은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입니다.
1) 이 구절은 전자의 것을 다시 부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땅에서 저주를 받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 이를테면 땅에 경작자가 열심히 수고하여 지은 결과에 대하여 기만한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이 형벌이 전에 아담 안에서 모든 죽게될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진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들어서 반론을 제기한다면 우리도 이렇게 답변합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복의 어떤 것들이 이 살인자에 관해서는 더 삭감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인 자신이 개인적으로 땅이 자기에게 적개심에 찬 것으로 느껴지도록 하신 것이라는 면에서 우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태양을 뜨게 하셔서 선한 자나 약한 자나 다 골고루 비치게 하시지만(마5:45)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분이 좋다고 생각하실 때마다 죄를 징벌하시며 때로는 한 민족 전체를 징벌하신가 하면 때로는 일정한 한 개인을 징벌하실 때에 비와 우박과 구름으로 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미래의 심판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데에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예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대적하시고 분노하시면 아무리 막강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초개와 같다는 사실을 세상에게 충고하시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최초의 살인에서 하나님은 모든 세기에 걸쳐서 길이길이 기억에 남아있도록 특이한 저주의 본보기를 보여주시려고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2)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형벌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가 어디로 가든지 절대로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두 가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말들이 각각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전자의 말은 (노아)에서 유래된 말인데 그 뜻은 ‘방랑하다’ 라는 것이며, 다른 말은 (나닫)에서 유래되었는데 ‘도망가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 외에는 비슷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구별하고 있는 이 말의 차이점은 (나)라는 말은 전혀 정착된 거주지가 없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드)라는 말은 그가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를 알지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증되고 있는 결함과 같이 그 차이점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인이 어디에 가든지 그가 ‘정착하지 못한다’ 는 말이며 마치 강도들이 흔히 하고 있는 생활과 같이 조용하고 안전하게 쉬는 곳이 없는 자들과 같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대하게 되면 강도들은 마음 속에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피해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은 언제나 무서운 고독을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살인자에게는 절대로 적당치 않은 형벌인 것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보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들의 작정된 상태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세상에서는 자신들이 나그네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불만을 털어놓기를 그 자신과 같이 동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처할 곳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4:11). 가인은 그의 개인적으로 추방을 당하는 형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가혹한 형벌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는 불안하고 두려움에 차있는 마음을 가지고 편안하게 거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원래 ‘놋성벽’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대로 그와 같이 백개의 성벽을 쌓고 수많은 요새를 가지고도 그 불안에서 악한 자를 해방시켜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도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그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시적인 안정된 주거를 가지고 향유하고 있습니다. 흔히 필요에 따라 공급을 받고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지독한 대소동이 그들에게 닥쳐오는 곳에라도 지금도 동요되지 않고 침착한 마음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소가 계속 변화되어도 그들은 자기들의 길을 달려가서 이 세상을 통과하며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지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안전이 악한 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 자체는 아직도 아주 난폭한 채로 남아 있어서 그들을 편히 쉬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가인이 자기의 처소를 옮기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고정시켜 놓으신 그 공포감을 절대로 떨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가 한 도시를 건설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가 그토록 불안한 상태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잠자리에서까지 그 불안을 떠날 수 없었으며 거기에서 풀려날 수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본문 13절은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입니다.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이것을 자포자기의 절규라고 하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겁에 질려 불안에 차 있는 가인은 그것을 사죄 받을 소망마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버림받은 자들은 절대로 그들의 죄악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급기야는 그들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패망이 그들을 완전히 덮칠 때까지 그렇게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죄인은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부리면서 하나님이 참으시는 것을 비웃고 있다가 그가 도저히 치료책이 없는 무서운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정말로 죄인이 뒤늦게나마 회개하는 적절한 보상입니다.
즉 만약 죄에 대한 어떤 증오심이나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려는 소원도 없이 맹목적으로 형벌에 대한 놀란 공포심이 회개를 초래한다면 죄인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적절한 보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유다도 공포에 질려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 놀라움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부터 되도록 멀리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버림 받은 자들이 중간 매개체가 없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해이함이 허용만 되면 그들은 천하태평으로 낮잠만 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압박할 때에는 그들이 교정되기보다는 아주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그들을 채찍질하여 저주와 영원한 멸망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들이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 데에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온; 죄벌)이라는 말을 그것의 본래의 의미로 이해하며 그리고 (나사)라는 말은 ‘감당하다’ 라는 말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너무 중한 죄벌이 저에게 내려졌나이다”라고 하는 뜻으로 봅니다. 이런 방법으로 가인은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모든 간계에서 탈피되게 하셨으나 아직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가혹성에 대하여 불평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그것과 같이 또한 마귀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정당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계속 하나님에 대하여 분을 품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심판자를 대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잔인하다고 공격하는 것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이런 말로 변명을 늘어놓고 있으니 “당신이 나를 땅의 표면에서 쫓아내셔서 당신의 얼굴을 피하여 숨어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 표현에서 가인은 하나님에게 간청하기를 자기는 공정하지 않게 너무 심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며 그에게 조금이라도 정상을 참작한다거나 관대함을 베풀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분명히 이렇게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니 “만약 이 세상에서 안전한 처소가 나를 받아주지 않고 거절하면 그리고 당신마저 저를 돌봐주시지 않으시면 저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렇게 천신만고 죽을 고생을 계속하면서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당장 죽어 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말에서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버림받은 자들은 제 아무리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분개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조급함과 격분으로 경쟁하는 상황을 계속하며 마치 그들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이 너무 심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부채질하게 된다는 식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과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방랑하는 상태나 모세가 방금 묘사했던 추방의 상태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하나님이 그에게 이 땅의 어느 한 구석이라도 전혀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편하게 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게 인간의 일반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그는 마침내 이 땅의 지면에서 쫓겨났다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이 그를 받아들여 정착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결국은 도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강도같이 정당한 권리로 소유하지 못하고 불법으로 점유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리니’ 라는 말은 절대로 하나님이 아예 그에게서 관심을 떼신다는 말이며 또한 하나님이 지금까지 지켜주신 돌보심으로 그를 보호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불경건한 살인자에게서 실토되게 하신 고백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복종하지 않고서는 인간들에게 절대로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들이 그분의 돌보시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긍정하지 않고 빗겨나가면 결코 그들에게는 화평이 없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인간의 모든 삶은 그분의 통치 하에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이 세상에 배치 받은 사실을 시인하고 간주할 때에 그들은 조용하게 하나님의 모든 복을 누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한치 땅도 발붙일 곳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악한 자들은 얼마나 비참하며 그들의 불안정한 상태가 얼마나 처절하겠습니까?
4. 본문 14절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상해를 받고 폭행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결론적으로 귀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정확하게 추리(推理)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만이 많은 위험들 가운데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한 가닥의 실에 매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날 때부터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겪는 이 덧없는 생명에 이미 돌입해 있는 것이라고 말한 자들은 그들이야말로 아주 신중하게 언급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여기서 자기 자신은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매정한 살인죄에 대하여 복수하도록 하나님이 그를 목표로 정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 생명을 해칠까 염려하여 그토록 두려워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자연히 모든 사람들이 상호교제를 원하는 것과 같이 그가 누구든지 만나게 되면 살인자는 무서운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 자체가 확실히 무서운 사실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5. 본문 15절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입니다.
1) 가인이 계속적인 위험으로 초조해지지 않으려고 가인은 단번에 곧 죽는 것을 원하였으며 또한 그의 생명이 연장된 것은 하나의 형벌로 허락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가 납득할 만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훨씬 더 애매함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유대인들은 그 문장을 절단하여 불완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절에서 그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은 비유용법이라고 합니다. 그것에 의하여 표현되지 않은 특이한 것이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고 있으니 가인에게 내려진 것의 ‘일곱 배의 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의미에 대하여 서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라멕에 관하여 물고 늘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 말을 제7대에 일어난 대홍수에 관한 문장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단순히 한 가족에게 속한 개인적인 형벌이 아니며 인류에게 내려진 공통적인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이 때문에 일곱 배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원인을 제시하는 단어 (레콘)이란 말은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고 쉽사리 덥치는 것을 막아 주시는 일에 배려하시겠다’ 는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살인자를 지지하셔서 그런 특권을 설정하시거나 또는 가인의 기도를 들어주시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자손을 감안하시고 그를 죽지 않게 보호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질서는 무참하게 어겨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격분이 난폭한 손에 의하여 제지를 받지 않았다면 인간의 사악성과 무모함이 점점 더 증가하여 장래에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만약 여기에 대한 치료책이 재빨리 적용되지 않는다면 사단이 우리에게 악한 본보기로 얼마나 치명적이며 무서운 독소를 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누구든지 가인을 흉내내는 자는 가인처럼 절대로 용서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욱 더 비참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들은 가인의 인격으로 그들의 죄악성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지독한가를 깨달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변명하는 것을 습관적으로 계속 호소할 때에 하나님의 노여움이 완화된다고 추측하고 있는 자들은 완전히 기만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그런 자세로 말미암아 더욱 더 악화된 노여움을 받게 됩니다.
2) “가인에게 표를 주사” 에서 조금 전에 말했지만 가인에게 유리한 것은 지금까지 전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장차 그가 잔인하고 옳지 않은 폭행을 배격하도록 주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지금 말하기를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표를 가인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피를 흘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이 내려진다는 것을 거울을 보듯이 빤히 볼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슨 표를 주셨는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주석가들은 상상하기를 그의 몸이 겁에 질려서 전율(戰慄)에 차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는 자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해치려는 마음과 무모함을 억압시키는 가시적인 표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우리에게 만족스런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