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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에게 요청하는 모세(2)
바로 앞에 선 모세 - 사명을 감당하려면
출애굽기 5:1-9, 14 / 이상호 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면서 갖은 학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보다 강하고 숫자가 많아지니까 이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 외세와 연합해서 애굽을 망하게 하지 않을 않을까 하는 불안이 애굽 통치자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더 강해지기 전에 고역을 시키고 고통을 주어서 애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중노동을 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이 가중 될 수록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이런 환경과 고통 가운데서 해방시켜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 백성을 구원코자 하신 내용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라고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겠느냐" 바로는 보낼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다시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3일쯤 광야길을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렵습니다."(3절)
처음보다 강한 메시지로 전달했습니다. 그 결과 바로는 거절하면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일하기 싫어서 3일길 광야로 나가서 제사 드리려고 한다고 생각하여 과거보다 더 중노동, 즉 짚을 주지 않고 예전과 같은 수량의 벽돌을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바로와 같이 한마디로 거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유익케 하기 위해서, 즉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건강을 주시기 위해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보다 높은 수준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바쁜 세상에 좀 어려움이 있으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신앙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보냈더라면 열가지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유월절 재앙으로 짐승의 첫 새끼 장자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불안의 요소였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연스럽게 해결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시련은 시련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당하고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게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보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보내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창세기3장) 하나님께 부끄러워 뵐 수 없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서로 변명하는 불신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고 여자는 해산의 수고와 평생을 남편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일시적인 안일한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엄청난 시련이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7:1.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이 사람들이 전쟁을 했는데, 패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통곡하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원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탐욕 때문에 물건을 감추었던 아간을 그가 훔친 물건과 아들과 딸들과 소와 나귀와 양들과 장막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아간은 자신의 소유와 함께 돌무더기 속에 들어가는 비극을 당했던 것입니다.(여호수아7장)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행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세계적인 복을 명하고 있습니다. 좀 이해가 더디 되고, 환경 조건이 여의치 못하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순종하는 자에 따르는 고통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역을 더 중하게 하니 도리어 큰 화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을 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재료를 주지 않고 예전과 똑같은 양의 벽돌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땅에 흩어져 곡초와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벽돌을 만들려고 하니 예전보다 일은 두 배, 세 배 늘어나는 반면 양은 적어진 것입니다.
바로의 간역자들이 이스라엘의 패장들을 때리면서 전과 같이 양을 채우라고 독촉합니다. "이것이 바로와 애굽의 수치라고 해도 너희가 게으르기 때문에 여호와께 희생 드리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여러 소리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패장들은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바로에게서 나올 때 모세와 아론을 만났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 신하들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로 죽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21절)하는 지탄과 공격을 받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자기들의 안일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야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명령 따라 한 것 뿐인데,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저주와 지탄과 공격을 받을 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모세는 하나님께 여러 가지 변명을 하면서 자기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억지로 자기를 뽑아 세우고 일하게 하셨는데,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했는데, 백성은 백성들대로 고통을 당하고 사명자는 사명자대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순종하고 사는 자에게 전혀 고통이 오지 않고 괴로움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오늘 본문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고통당하고 시련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폴리캅 교부가 화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한번만 예수 모른다고 하면 살려준다고 형관이 말합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지금까지 한 번도 예수님이 날 모른다고 하신 일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하면서 화형장으로 끌려가 사라졌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믿음 지키다가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시련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니엘도 믿음 지키다가 사자굴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죄 없으신 분인데, 사명 감당키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쇠못위로 걸어갔습니다. 믿음을 지키다가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계획 따라 행하다가 일시적으로 당하는 고통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명 감당하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은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참았습니다. 믿음을 지키다 오는 고통은 영광으로 바뀌게 됩니다. 승리의 시간이 오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케 됩니다.
사명 감당하다 당하는 고통은 영광의 고통이요, 소망 있는 고통이요, 축복을 예비하는 고통입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와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수치의 고통이요, 영원히 부끄러운 고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미래가 보이는 고통이고, 축복을 예비하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원망과 시비 그치고 참아야 합니다.
3. 사명자는 고통을 극복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원망이 심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조석으로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고통이 좀 더 중해졌다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해하려고 합니다. 언제는 애굽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눈물로 부르짖으며 기도해 놓고 하나님이 그 기도로 들으시고 민족 해방을 시키기 위해 오는 잠시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해 하나님의 종들을 모해하려고 하는 것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를 당할 때가 많습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쓴 약을 먹어야 하고 아픈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수술도 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건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 사람들의 박해 멸시 속에 살아오던 백성들이 민족적 해방을 위해 일시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참지 못해 지도자 원망하는 것은 장래를 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앞의 일만 보고 사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들은 항상 남의 밑에서 멸시나 받고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주의 종들이 사명을 감당하다 시험 당하고 원망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지 말고 감당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방해하는 사람도 있고 핍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위적인 방해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지장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참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경건을 다할 때입니다. 이사야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모세가 중차대한 사명을 수행하려다 진퇴양난에 놓일 때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는 것처럼 모든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왕과의 첫 대면
출 5:1-9 / 피영민 목사
서 론
오늘은 본문의 주요 등장인물인 모세와 아론, 그리고 바로 왕의 대화를 중심으로 그들이 나눈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신교에는 많은 교파와 분파가 있습니다. 구교의 뿌리는 ‘천주교회’와 ‘동방정교회’이고, 개신교의 뿌리는 마틴 루터를 중심으로 시작된 ‘루터교회’(Lutheran Church)와,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그리고 영국의 국가교회인 ‘성공회’(Anglican Church), 마지막으로 신령주의자들로 일컬어지는 ‘재침례교도’(Anabaptist)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단들은 모두 이 여섯 가지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침례교회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혹자는 침례교회의 기원이 ‘재침례교’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상 최초의 침례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의 국교화를 반대하고 나온 청교도들 중에서도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침례교도의 조상은 신자의 침례를 믿는 청교도들이라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개신교 가운데 가장 많은 나라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개혁교도들을 ‘위그노’(Huguenot), 영국에 들어간 성공회 가운데 개혁교도들을 ‘청교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독일에 들어간 개혁교도를 ‘독일개혁교’, 네덜란드에 들어간 개혁교도를 ‘화란개혁교’, 스코틀랜드에 들어간 개혁교도가 ‘장로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교는 개혁교회의 한 분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존 낙스(John Know)라는 사람의 지도로 1560년에 장로교를 국가교회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로마 카톨릭과 단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존 낙스는 12년 만에 죽게 되었는데, 그를 이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멜빌이 교회 지도자가 되었을 때, 당시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제임스 6세였습니다. 원래 장로교회에 우호적인 사람이었지만 왕이 된 이후 장로교회는 장로들로 구성된 모임으로 개교회 자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교회를 지배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장로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제임스 6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국왕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다보니 장로교 목사들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 앤드류 멜빌과 국왕 제임스 6세는 이런 갈등 속에 서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596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임스 6세가 앤드류 멜빌 목사를 불러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느냐?” 이 질문에 대답한 멜빌 목사의 유명한 연설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이시여, 이 나라에는 두 분의 왕과 두 종류의 왕국이 있나이다. 한 분은 정치적인 왕이신 폐하이시고, 또 다른 한 분은 영적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왕국은 폐하가 다스리시는 정치적인 왕국(Political Kingdom)이고, 다른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영적인 왕국(Spiritual Kingdom)입니다. 그리고 폐하가 정치적인 왕국에서는 머리가 되시지만 영적인 왕국에서는 한 시민에 불과하고, 한 어리석은 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민적인 의무에 관해서는 폐하에게 순종을 하겠습니다만 영적인 영역에 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폐하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도 없거니와 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빼앗을 권리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앤드류 멜빌 목사의 판정승이었습니다. 제임스 6세는 자신을 한 어리석은 종(One Silly Servant)이라고 표현한 멜빌의 말에 속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1603년부터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하나가 되면서 제임스 1세로 스튜어트왕조의 첫 번째 국왕이 되었습니다. 물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정치적으로 합쳐진 것은 1707년(Acts of Union)입니다. 그러나 한 명의 왕이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1603년 제임스 6세가 영국 잉글랜드의 왕을 겸임하면서 제임스 1세가 된 시기부터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국교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감독을 세워서 감독의 통치를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장로교회는 왕이 지배할 수 없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도 감독을 파견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앤드류 멜빌이 계속 저항하자 1606년에 그를 런던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투옥되었습니다.
제임스 1세의 치적이 별로 없지만 다른 건 몰라도 1611년에 King James Version(흠정역)을 번역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앤드류 멜빌 목사와 국왕 제임스 1세와의 갈등은 결국 누가 교회를 다스려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며, 사람은 누구를 경배해야 하는가?”라는 이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북한의 일명 ‘백두혈통’이라고 불리는 김일성 가문은 21세기인 지금도 백성들로부터 경배를 받고자 합니다. 김일성이 죽은지가 언제인데 아이들로 그의 동상 앞에 절을 하게 만듭니까? 백성들은 그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Badge)를 달고 다닙니다. 그래서 한 번은 제가 왜 그런 배지를 달고 다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북한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분은 내 마음 속에 영원토록 살아계십니다.” 북한에서 백두혈통은 이미 신적인 위치에 올라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김정은의 상태를 보니 하나님이 백두혈통을 흔들기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침례교회의 기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침례교회는 물이 많아서 침례교회가 된 것이 아닙니다. 침례교회는 국가교회 제도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므로 국왕이 교회를 지배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침례교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교회를 자유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국가교회’(Established Church)는 하나님의 교회를 국가에 소속된 교회로 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침례교회는 자유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국왕이나 통치자가 교회와 성도의 신앙을 지배할 수 없다는 확신이 침례교회의 정신이고, 이런 점에서 장로교회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국왕의 지배를 원치 않으면서도 국가에 종속되어 있으니 당연히 국왕이 다스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국가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간섭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신앙의 규범은 성경이고, 우리를 다스릴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심을 믿는 것이 침례교회입니다.
역사 속에 앤드류 멜빌 목사와 제임스 1세와의 대립과 같은 갈등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통치자들과 정치가들은 언제나 교회를 지배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갈등의 시작은 바로 출애굽기 5장의 모세와 바로의 갈등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미 80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나이 40세 때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으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바로는 투트모세 2세였습니다.
투트모세 2세는 모세를 양자로 삼은 이복누이 하쳅수트라는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투트모세 2세가 모세를 죽이려고 해서 미디안으로 도망가 버렸는데, 그 후 1년 만에 투트모세 2세는 자식을 보지 못하고 요절하고 맙니다. 그래서 투트모세 2세의 양자이며 나이 어린 투트모세 3세와 양어머니 하쳅수트는 함께 애굽을 통치하다가 투트모세 3세가 장성하여 단독통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종으로 투트모세 3세 앞에 서서 말을 하고 있고, 이들의 대화를 들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앤드류 멜빌 목사는 ‘스코틀랜드의 사자’(The Lion of Scotland)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국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자처럼 증거했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별명은 ‘이스라엘의 사자’(The Lion of Israel)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자들은 모두 유다지파의 사자(The Lion from the Tribe of Judah)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모세와 바로,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와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모세와 아론의 첫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
모세와 아론은 바로를 향해 첫 번째 하나님의 메시지(Opening Statement)를 선언합니다. 출애굽기 5장 1절에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 말씀이 얼핏 보기에는 간단한 말씀 같아도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 말씀의 주체는 모세 개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여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인간이 인간에게 수평적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투트모세 3세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구절은 바울의 말이고, 저 구절은 디모데가 한 말이고, 또 다른 구절은 솔로몬이나 다윗이 말한 것이라고만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영원히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하나님이 수직적으로 위에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영혼이 은혜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둘째,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권은 너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하나님의 것을 네 것인 양 차지하고 있다”는 질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의 장자인데 네가 나의 장자를 네 것인 양 차지하려 하면 내가 네 장자를 빼앗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출애굽기 4장 22~23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목사에게 있을까요? 장로나 권사에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소유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핏값을 지불하고 사셨기 때문에 교회의 소유주이십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셋째, 내 백성을 보내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를 예배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를 경배해야 할 사람들도 아니고, 애굽의 갖가지 신들을 예배해야 할 사람들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할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밖에 없다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성경이 사람의 말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여지를 두는 사람 역시 바로와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이사 아구스도도 신적인 위치에 올라가서 백성들의 경배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주’(Lord)라 하면 잡아 죽였습니다. 가이사가 ‘주’인데, 예수를 ‘주’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스스로 예배의 대상이 되겠다고 하며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으려 하는 자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려는 ‘하나님의 영광 도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책을 다 요약하면 다섯 글자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공짜는 없다’입니다.” 공감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이 공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제사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공짜라고 뭐든지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도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면 정작 홀로서야 할 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용돈도 벌어봐야 합니다. 그렇게 독립심을 기른 아이들이 나중에 잘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Adversity makes men, and prosperity makes monsters”(순경은 괴물을 낳고 역경은 인간을 만든다). 역경을 통해 자생력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와 아론은 이 말씀이 위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수직적인 메시지고,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입니다.
Ⅱ. 바로 왕의 반응
바로는 하나님을 향해 대단히 교만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출애굽기 5장 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Who is the Lord?(여호와가 누구냐?) 그는 지금 여호와가 누군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교만합니다.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해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자는 바로 나 자신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배를 받을 자는 바로 나 자신인데 여호와가 누구길래 나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느냐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는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내 백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라고 하시니 바로가 대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놔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서 벽돌이나 만들라고 합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벽돌을 만들어야 할 존재이지 가서 예배나 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이익을 채워줄 도구나 착취의 수단으로 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의 이기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는 지금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교만함과 이기심을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독재자인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가난한데 그의 은행잔고는 돈이 넘쳐난다면 그는 무조건 독재자입니다. 그는 부정축재한 독재자인 것입니다. 후진국에 가보면 통치자들은 모두 부자입니다. 1년에 한두 번도 가지 않을 개인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지만, 백성들의 가난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도로도 지저분하고, 치안도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종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향해 교만하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벽돌 만들기 싫으니까 종교를 핑계로 노역에서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유기된 존재를 대변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인간이 있을까요? 성경은 바로 이외에도 가룟 유다나 아말렉 족속과 같이 유기된 존재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하나님은 버리실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바로는 인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대표적인 인물이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마귀를 예표하는 존재입니다. 바로는 불신자를 대표하고 마귀를 예표합니다.
Ⅲ. 하나님이 바로 왕과의 전쟁을 오래 지속하신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왜 바로의 거절을 지켜만 보고 계셨을까요? 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그 자리에서 처단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래서 “바로는 할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주었더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얼마나 통쾌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열 번이 넘도록 모세와 아론을 바로 왕에게 보내셨고, 재앙도 열 번씩이나 내리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속전속결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등학교 1학년생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1학년을 특별과외해서 6학년으로 졸업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1학년은 1학년이 배워야 할 것을 공부해야 하고, 해당학년의 공부를 마치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해서 대학교에 입학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에게 열 번 넘도록 보내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 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각 학년에 해당하는 절차를 밟기 위함입니다. 지나친 월반은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열 가지 재앙까지 내리면서 훈련을 시켰는데도 그들은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열 번을 공부하고 십년을 공부해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중보자를 통해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인간이신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받은 구원은 정치적인 구원이지만 인간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구원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구원이고 훨씬 차원 높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 마귀로부터의 구원,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구원,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결 론
여러분, 오늘 말씀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할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한민국 대통령이 입대를 하라고 하면 군대에 가야하고, 납세의 의무를 지우면 세금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민적인 차원의 순종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예배해야 할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찾으십니까?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살겠다!”라는 확신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
출 5:1-7:13 / 이동휘 목사
1.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3:9-10)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의 이같은 말씀에 “만일 그들이 나를 믿지 않으며 내 말도 듣지 않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모세가 ‘지팡이입니다.’ 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대로 땅에 던지자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그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시자 모세가 그 꼬리를 잡자 모세의 손에서 그 뱀이 지팡이가 되었습니다.(출4:1-4) 그 지팡이는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던 지팡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그 지팡이를 통해 하나님의 이적과 권능이 나타나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사양합니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못합니다.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이후에도 내가 그러하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을 누가 만들었느냐? 누가 사람을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되게 하며, 사람에게 밝은 시력을 주고 맹인이 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나 여호와가 아니냐? 자, 가라! 내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네가 할 말을 가르치리라.” 그러나 모세가 “주여, 제발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라며 극구 사양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출4:14-17)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이렇게 해서 모세는 가족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을 향해 떠났습니다.
2. 드디어 모세가 애굽 왕 바로 앞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섰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보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기념하는 명절을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바로 왕이 ‘도대체 여호와가 누군데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야 한단 말이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 자손도 보내지 않겠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모세가 다시 한 번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3일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무서운 질병이나 칼로 우리를 죽이실 것입니다.”며 좀 더 강하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째서 백성들이 일을 못하게 하느냐? 가서 너희 일이나 하라!’ 며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욱 더 가중시킵니다. 이러한 일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오히려 심각한 원망과 원성까지 듣게 되어 이렇게 하나님께 하소합니다.
(출5:22-23)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렇게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출7:1-5)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그리고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출7:9)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그래서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 자기 지팡이를 던지자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그때 바로가 애굽 최고의 마법사들을 불렀습니다. 그들도 마술을 써서 각자 지팡이를 던지자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렸습니다.’(출7:10-12) ‘아론의 지팡이’는 본래 ‘모세의 지팡이’(출4:2)였지만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면서 아론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아론의 지팡이’로 불리운 것입니다. 그 지팡이를 모세의 지팡이로 부르든, 아론의 지팡이로 부르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용되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 “(출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그 지팡이를 들고 애굽으로 향해 갈 때 ‘하나님의 지팡이’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출4:20)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때 이적과 권능이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팡이’로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지도하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권력을 위임받은 자로서 그 손에 지팡이를 들고 백성을 지도합니다. ‘지팡이’는 위임받은 지도력을 의미합니다. 비록 양떼를 치던 지팡이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권력이 함께 할 때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팡이’는 ‘전지전능하신 권능의 지팡이’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 르비딤을 지날 때 아말렉 족속이 공격해왔습니다. 이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출17:9)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는 직접 전선에 나가 싸우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섰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팔이 피곤해서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붙들어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여 결국 아말렉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출17:12-13)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들어 올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간구하는 호소, 기도를 뜻합니다. 모세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관이시며 승리의 근원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모세를 향해 원망 불평을 쏟아내자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출17:5-6)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이렇게 모세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대로 그 지팡이로 반석을 쳤을 때 반석에서 물이 터져나와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갈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광야에 이르렀을 때 물이 없어 또 다시 모세를 원망하자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앞에 나가 엎드려 기도합니다.(민20:6)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민20:8-9)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너희는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팡이를 잡고 “(민20:10-11)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그러자 물이 터져 나와 온 백성과 가축들이 해갈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말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는 이 말은 마치 자기들이 기적과 능력을 베푸는 것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손에 잡았지만 ‘자기 지팡이’로 반석을 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경거망동한 행동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의 능력으로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온 것으로 경탄하며 그들을 경배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20:12)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신32:49-52)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신34:4-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비록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을지라도 마치 자기가 권력과 능력의 주체인양 착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토록 소망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너무나 안타까워 하나님께 재고해주실 것을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시며 모세의 간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신3:23-28)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을지라도 권력과 능력의 주체가 오직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고 기억하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3. 모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내 백성을 보내라.’며 애굽 바로 왕에게 말하지만 거듭 거절당하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만 더욱 가중되자 모세가 그 앞에서 지팡이를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 ‘하나님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이에 바로 왕도 온갖 마술사들을 불러 마술로 지팡이를 뱀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권력이 세상 왕권과 통치력을 제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애굽의 왕들이 착용하던 왕관에는 코브라 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뱀은 왕권과 왕의 통치력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 앞에 세상의 권세가 감히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세 번째 재앙부터는 감히 애굽의 마술사들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통해 나타나는 이적을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출12:29-33)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당대 세계 최고의 애굽의 권력도 ‘하나님의 지팡이’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부자도, 영원한 권력도, 영원한 나라도 없습니다. 그 근본 이유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망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여기 “음부의 권세”란 사망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는 세상 역사가 종말을 고할지라도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의 영원한 승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뿐입니다. 노아 당시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때 살아남은 것은 오직 노아의 방주뿐이었던 것처럼 역사 최후에도 승자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노아의 방주인 교회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대학자가 어느 날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꽤 넓은 강이라 배를 타는 시간이 길어지자 무료해진 학자는 사공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사공 양반,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을 아시오?” “아이구, 제가 그런 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요? 플라톤의 철학을 모르는 당신은 인생의 절반을 잃어버린거나 마찬가지요. 그는 대단히 훌륭한 철학자였어요. 그럼 프랑스라는 나라가 어디쯤에 있는지는 아시오?” “웬걸요. 그런 것을 제가 알 수 있나요.” “참으로 안됐군요, 당신은 나머지 인생의 4분의 1을 잃어버렸수. 프랑스는 유럽에 있어요. 예술의 나라죠.” 계속 모른다는 사공에게 학자는 자꾸만 난감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좀 아십니까?” “학자 어른, 전 그런 것 다 모릅니다.” 계속 질문을 퍼붓던 학자는 불쌍하다는 듯이 사공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배가 강어귀에 다다랐을 때 쯤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 때문에 그만 배가 뒤집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물에 빠진 사공은 허우적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학자에게 소리쳤습니다. “학자 어른, 수영할 줄 아십니까?” “어푸 어푸, 난 수영 못해요.” “그렇다면 학자 어른은 목숨을 잃어버린 거예요”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도 교회를 모르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 즉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모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어도, 건강이 없고 세상에서 힘이 없어도 예수 믿고 교회의 성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사람은 영원한 인생의 승자인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하나님의 지팡이’가 함께 하는 교회의 성도로서 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28:18-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께서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인생의 승리자, 역사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 권세를 삼켜 버린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 갈릴리 출신 유다라는 사람이 ‘하나님만이 유대인의 통치자’라는 구호 아래 납세 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로마로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예수께 납세 문제를 물어봤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세금을 내야한다고 대답하시면 민족의 반역자로, 반대로 납세를 거부하면 로마 당국에 고발해서 그들 눈에 가시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22:21)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철저히 구분지었습니다. 세속권력에 대해 복종해야 할 의무와(롬13:1), 하나님 말씀에 복종해야 할 책임(행5:29)을 철저히 구분하신 것입니다. 정치와 종교,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지었습니다. 교회는 사랑과 용서로 다스려져야 하고, 세속국가는 칼과 정의의 힘으로 다스려져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 악한 자들을 정의로 다스리기 위해 세상 권력에 칼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 말씀, 로마서13:1-7을 보겠습니다.
(롬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예수 믿는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었지만, 몸이 살아 있는 한 세상 나라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두 세계,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조만간 종말을 고하게 될 세상 나라에 모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세상 권세에도 복종해야 하고, 하나님의 권세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써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세상 나라의 시민으로써 세속 법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을 실현하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로마서13:4 말씀대로, 세상 나라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선을 베풀기도 하며 정의의 칼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세상 권세는 악한 자를 칼과 정의로 다스려 창조 질서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팡이’가 함께 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사랑의 뜻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로마서 13:1에서,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나라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시기도 하시고 폐하시기도 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세상 권세 위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상 권세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우리가 비록 세상 나라 권세 아래 세상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거슬리는 법과 통치자에게 복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권력 행사를 허락하셨지만 권력을 남용하는 죄까지 허용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한 시민으로써 통치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울러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설령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성도들이 취해야 할 자세로써 폭력적인 투쟁을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박해를 가하는 사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B.C.605년경,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멸망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포로들 중 왕족과 귀족 출신으로 신체적인 결함이 없고 잘생겼으며 지능 지수가 높고 다방면의 지식을 가졌고 이해력이 빠르고 왕궁에서 섬길 자격이 있는 소년들을 바벨론 언어와 학문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바벨론 왕은 또 자기가 먹는 제일 좋은 음식과 포도주 가운데서 날마다 그들에게 일정한 양을 공급해서 3년 동안의 수련 과정이 끝나면 왕 앞에서 섬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뽑힌 소년들 가운데는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유다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왕궁에 선발된 소년 포로들은 모두 왕이 베푸는 궁중 음식을 먹어야만 했는데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감히 궁중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당시 궁중 음식은 모두 바벨론에서 숭배하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들이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에 따르기 위해 궁중음식을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대신 우상 앞에 바치지 아니한 채소와 물만 먹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여 이 네 소년들에게 학문과 그 밖의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꿈과 환상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왕이 정한 3년 동안의 수련 과정이 끝나자 궁중 대신은 그들을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데리고 가 시험한 결과 바벨론 출신 소년들보다 월등히 우수하여 왕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 마침내는 바벨론의 총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년이 지난 B.C.585년경에 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만들고 누구든지 그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만약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이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라는 준엄한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단3:5-7)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의 명령이 엄한 줄 알면서도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즉시 고발했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소환되어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왕은 즉시 처형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재들이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노라면서 이렇게 회유합니다.
(단3: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시여,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입장을 변호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뜨겁게 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진다고 해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 용광로에서 구해 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내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또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이니 왕이시여, 그런 줄 아십시오.’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잔뜩 화가 나서 평소 때보다 용광로의 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지시하고 또 건장한 군인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단단히 묶어 뜨겁게 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 사람은 꽁꽁 묶인 채 뜨겁게 타는 용광로 속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라 일어서면서 자기 보좌관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묶어서 불에 던진 자는 세 명이 아니었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그런데 어째서 네 사람이 불 가운데 걸어 다니고 있느냐? 저 사람들은 묶여 있지도 않고 상한 흔적도 없으며 더구나. 네 번째 사람은 그 모습이 신들의 아들과 같구나.’ 그리고서 느부갓네살 왕은 무섭게 타오르는 용광로 앞으로 다가가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이리로 나오너라.’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불 가운데서 걸어나왔습니다. 그래서 총독들과 지방 장관들과 군사령관들과 왕의 고문들이 모여 이 세 사람을 보니 화상을 입지도 않았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으며 그들의 옷도 상하지 않았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그때 느부갓네살 왕이 말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 자기를 신뢰하는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않으려고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기꺼이 자기들의 목숨까지 내놓았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명령하노라. 어떤 민족이나 백성을 막론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에 대하여 좋지 않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몸을 갈기갈기 찢고 그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려라.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신은 천하에 없도다.’ 그리고 왕은 바벨론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보다 높은 직책을 주었습니다.(단3:19-30)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보여준 신앙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왕궁의 산해진미를 거절한 다니엘의 신앙,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생명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세 친구의 신앙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생활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세상 권력이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벗어난 것이라면 그 세상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나라 권세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 권세를 자기의 뜻대로 주시며 지극히 천한 자로 세상 권세자로 세우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훗날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서도” 권력의 교만을 피우다 하루 아침에 “(단4:32)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들짐승처럼 7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벨사살 왕은 자기 부친이 권력의 교만으로 7년동안 짐승처럼 살았던 것을 망각하고(단 5:21)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의 기물들을 술잔으로 삼아 연회를 즐기다 그날 밤으로 죽임을 당하고 나라는 두 쪽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단5장) 세상 나라 권세가 아무리 크게 보이고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진 모세와 아론이 겨자씨처럼 작고 천하게 보여도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세상의 지팡이를 삼켜버렸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세상 모든 권력 앞에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을 세상에서 구원하신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레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성도 여러분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 항상 모든 행실에, 어떠한 금권이나 권력, 그 어떠한 관습과 풍습 앞에서도 거룩한 자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벧전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어려워지면 정상이다
출 5:1-9 / 이규현 목사
본문은 모세와 바로가 마주치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바로 앞에 갔습니다. 애굽의 바로와 모세의 첫 대면입니다.
역사적인 만남이지만, 사실은 거대한 충돌입니다. 세상의 왕권을 쥐고 있고, 세속의 힘을 갖고 있고, 절대 왕권을 갖고 있는 바로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모세가 만났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는 애굽의 왕입니다. 그 시대에 애굽의 왕이라면, 신적인 존재입니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를 헤맸던 모세가 지팡이 하나 들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초야에 묻혀 말도 잘 하지 못한다 했던 모세가 애굽의 왕권에 도전한 것입니다.
모세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팡이 하나 달랑 들고 바로 앞에 선 모세가 바로의 눈에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요?
이 장면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린 다윗을 보고 골리앗이 얼마나 웃었겠습니까.
세상에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학교에서 기도회를 합니다. 세상 속에서 몇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데, 학교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문화가 압력을 줍니다. 그 속에서 기도하는 모습은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세는 바로를 만나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갔지만, 바로 앞에 선다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지만, 그런 대로 살아왔습니다. 노예생활을 하며 4백여 년을 지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은 생각하지도 못한 일입니다.
노예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싫고 끔찍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벗어버릴 용기가 없었습니다. 싫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고통이나 불행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이나 불행 속에 오래 지내다 보면 적응합니다. 불행에도 적응합니다.
처음에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서 적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노예 생활이 힘들었지만, 시간에 지남에 따라 그 생활에 적응한 것입니다. 당장 때려치우고 청산하고 싶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문제가 크고 복잡하면, 문제를 해결하려고하기보다는 순응을 배웁니다. 비겁한 순응입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시는 분들을 보면, ‘아,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옛 생활이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과거의 내 삶이 나를 붙들고 있어 거기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살아갑니다.
괜히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살다가 가는 거지. 인생, 별 수 있겠어.’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의 뼈 속까지 노예정신이 스며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노예근성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던 대로 삽니다.. 새로운 삶에 대해 기대하지 않습니다. 출애굽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려나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그냥 묻혀 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오랫동안 찌들려 뼈 속까지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 적응하고 살아갑니다.
애굽에서 나오고 싶지만, 나오지 못합니다. 바로를 넘어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현실의 벽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바로를 만나고 싶었겠습니까.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 건드렸다가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시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살기 원합니다. 물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과거의 삶이 뿌리 깊게 놓여있습니다. 죄의 노예로 살아왔던 과거의 삶이 놓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바로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바로를 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를 넘어야 노예생활에서 풀려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문제입니다. 바로가 가장 큰 장벽입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장벽입니다.
출애굽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출애굽을 많이 들어서 쉽게 생각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을 보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선, 바로를 넘어야 합니다. 바로를 넘어서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내셔서 바로에게 가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5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의 지배와 통치 가운데에 있는 백성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분명한 소속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그늘에 있어야 할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품에서 먹고살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소속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디를 가든 소속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가’라는 소속에 의해 정체성(이 결정됩니다.
연예인들에게는 소속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포츠맨들은 소속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디에 소속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오늘의 교회를 ‘새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도 “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있지만, 직장에 속해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소속사의 사장님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지시를 받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 관리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는 데에는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신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출애굽기 5장 1절에 보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죽을 먹어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돈을 벌지 못해도, 예배를 드리는 삶,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언제 행복합니까? 예배가 살아있을 때입니다. 예배가 예배답게 드려질 때, 신자는 가장 행복합니다.
맛있는 커피를 마셔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맛있는 밥을 먹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출세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때에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될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될 때, 가장 인간다울 수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의 자리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않는다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릎을 꿇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은 노예적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내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백성이다’라고 확인해야 합니다.
세상에 가면, 세상에 눈길을 돌립니다. 세상에 밥줄이 걸려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세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앙이 희미해집니다. 교회를 멀리하고 엉뚱한 것을 예배합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출 5:1)”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고 대답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 말을 듣겠냐. 어떻게 너희들을 보내주겠느냐”고 했습니다. 바로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극이 출발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바로처럼 삽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마음대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방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심을 바로가 알았더라면, 바로의 반응이 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분이심을 바로가 알았더라면, 바로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바로가 알았더라면, 바로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인간은 별짓을 다 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내 주먹을 믿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상을 보십시오. 난장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심판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성경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어렴풋이 대충 알면 안 됩니다. 확실하게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면,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에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바로가 가장 큰 자입니까? 아닙니다. 바로는 허상(虛像)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방에 날아가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마차와 군대와 모든 것들을 홍해에 수장시켜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가 겉으로는 대단해보이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로는 큰 자가 아닙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시청각 교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속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주눅들 이유가 없습니다. 지팡이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은 많은 것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바로는 마차, 군대, 무기, 갑옷 등 준비한 것이 복잡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가진 것이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양의 똥이 묻은 지팡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옷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초라합니다.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거창한 것을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슨 일을 할 때에 다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됩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를 들고 나아갔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골리앗 앞에 나아갔던 다윗이 무엇을 갖추었습니까? 사울이 자신의 갑옷을 다윗에게 주었지만, 다윗은 그것을 다 벗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갑옷을 뒤집어쓰고 칼을 갖추고 있었는데도 벌벌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다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8)”고 하니 그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갈멜산상에서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의 전투를 보십시오. 850명은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 등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싸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비대결이 아닙니다. 능력대결입니다. 스펙대결이 아닙니다. 능력대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됩니다.
바로 앞에 선 모세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가 뒤에서 그를 지킵니다.
본문 출애굽기 5장 3절에 보면,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다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거부합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출 5:4)”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태는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두었으면 나았을 텐데, 괜히 문제를 확대시킨 듯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본문 출애굽기 5장 7~8절에 보면, 바로는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벽돌을 만드는 짚을 주지 말고 스스로 줍게 하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짚을 줬는데, 이제는 직접 짚을 줍게 했습니다. 그리고 벽돌은 이전과 같은 수효대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5장 9절에 보면, 바로는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어려워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보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벌집을 건드린 것입니다. 바로의 심기를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바로는 더 강력하게 압제했습니다. 상황이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모세가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면 다 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다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따라 살면 모든 것이 잘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일이 잘 풀리고, 상황이 좋아져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더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시험에 듭니다. ‘왜 이러지. 나는 믿음대로, 말씀대로 했는데, 왜 이래.’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마음먹으면, 이전에 없던 어려움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옵니다. 특별새벽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고 제대로 살아보려고 하는데,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시련이 닥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오히려 손해를 봅니다. 고의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할 때, 어려움이 몰려올 때가 많습니다. 갈수록 상황이 나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계속 닥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편안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고 결단하면,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순응합니다. 타협합니다. 쉽게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쉽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단하면, 시련과 어려움이 몰려옵니다. 믿음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온전하게 살려고 하는데 어려움이 왔다면,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라고 반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문제를 쉽게 풀지 않으시고 왜 이렇게 어렵게 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당하게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극한점에 도달하기 전에는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익숙하게 배우기가 태생적으로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기도를 배운 사람은 삶의 극한점에서 기도를 배웠을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학창시절에 우리 집안이 위기였습니다. 불교 집안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쫄딱 망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사도 많이 다니고 힘들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고등학생이 1주일 동안 금식했겠습니까. 죽으려고 금식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금식기도도 하고 산기도도 했습니다. 밤에 산에 가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밤을 새우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기도를 해도 느긋하게 기도합니다. 모든 것이 쉽게 풀리고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기도를 참되게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쉽게 항복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출애굽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는 도구로 바로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항복을 받아내기 원하셨습니다. “항복! 하나님,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나님 아니면 우리는 불가능합니다.”라고 하나님께 완전히 엎드리는 자들로 만드시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쉽게 풀리면, 자기가 잘 해서 그렇게 된 줄 착각합니다. 우리는 착각을 잘 합니다.
내가 했다는 소리를 잘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내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쉽게 끄집어내시지 않으십니다. 바로가 점점 더 완악해졌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십니다. 어려움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습니까? 특별새벽기도를 했는데도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고 상황은 더 어려워졌습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권능을 반드시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려울 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작은 일 속에서도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학대했습니다. 처음에는 벽돌을 만드는 일에 필요한 짚을 주면서 하다가 벽돌을 만들게 했지만, 이제는 짚을 주지 않았습니다.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게 했습니다.
초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초 그루터기로 짚을 대신하기도 했지만,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감독인 이스라엘 백성의 기록원들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기록원들이 바로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도리어 게으르다고 책망했습니다. 더욱 압력을 가했습니다.
바로는 갈수록 더 완악해졌습니다.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둘째, 숨어있는 마음을 들추어내십니다.
큰 어려움만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바로의 비위를 맞추며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고리를 끊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애굽은 그들이 오랫동안 묵은 삶의 근거지입니다. 그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삶을 벗어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중에 광야에 가서도 여전히 어려우면, 애굽으로 회귀(回歸)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삶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 풍성한 약속이 앞에 있지만, 죄의 습성은 금방 사라지지 않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죄 아래 살았던 삶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옛 삶에 대한 미련이 쉽게 뿌리 뽑혀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많이 듣지만, 막상 그 길로 가려고 하면, 적지 않은 것들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훈련을 많이 받습니다. 교회에서 훈련 받으면, 그것을 절감(切感)합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훈련 받고 은혜 받았는데, 어느 날 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리로 돌아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내가 은혜 생활하고 믿음 생활하고 말씀을 보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노력하고 새벽마다 부르짖었는데, 이 정도 밖에 오지 않았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옛 삶이 아직도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미련이 아직도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것들이 뿌리내리고 내 삶을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혈육적인 것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애굽입니다. 나의 삶이 더 풍성해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생활 할 때에는 은혜를 받지만, 돌아서면 세상이 좋아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가 좋지 않지만, 애굽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바꾸기를 요구하시지만, 우리는 다른 길을 찾습니다. 바꾸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협을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사이에서 늘 머뭇거립니다.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어야 되는데, 세상과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세상,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니 염려하고 갈등합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죄의 달콤함에 빠져 살다 보면, 거기에서 헤어나기 힘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려운 일들이 밀어닥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압박을 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의 삶을 완전히 단절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애굽에 대한 미련을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머물러있어야 할 곳이 아니고 완전히 떠나야 할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가 점점 완악해진 것은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보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이끌어내시기 위해 바로와 같은 존재를 우리 곁에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세상에 진저리가 날 정도로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이끌어내실 때에 우리가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도록 만드십니다. 다시는 돌아보기 싫게 하십니다. 다시는 미련을 갖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끊어버리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바로를 보내셔서 힘들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놓으라고 하실 때에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보내야 합니다. 애굽을 떠나보내야 가나안이 옵니다.
바로가 완악하게 나오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가 나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불평했습니다. 조용히 살고 있는 우리를 왜 이렇게 고생하게 하고 죽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못 본체 하시는가,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삶 속에서 왜 실현되지 않는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셔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십니다. 아무 반응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합니다. 사람들은 불신앙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 속수무책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손대시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수고와 열심은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원망했습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바로만 보였습니다.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런데 모세는 백성들과 달랐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들은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출애굽기 22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백성들은 괴로워서 소리를 지르고 원망했습니다. 사실 모세도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모세가 앞장서서 일하다가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고난당하는 모습을 보니까 모세 자신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순종한 것 밖에 없는데, 상황이 어렵게 되어 고생스러우니까 모세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접근방식과 전혀 달랐습니다. 모세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갔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소속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누구에게 소속되어있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내가 누구에게 속했느냐를 보여줍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모세는 누구에게 갔습니까?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누구를 찾아가십니까?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때 소속이 분명해집니다. 자기의 신분과 소속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소속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들은 정체성에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어디에 속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겼을 때에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여러분은 어디가 생각나십니까? 기도의 자리가 생각난다면, 여호와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전에는 모세가 그러지 않았습니다. 40년 전, 문제가 꼬였을 때, 그는 미디안 광야를 택했습니다. 도피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생기면 일반적으로 도피합니다. 문제로부터 도피합니다. 문제로부터 멀어지기 원합니다. 문제가 너무 힘드니까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원합니다.
그리고 40년 전, 모세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자기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와께로 돌아왔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에는 성막이나 성전이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제단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돌아왔다는 것은 모세의 마음이 여호와께로 향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존전(尊前)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걸림돌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우리의 마음이 여호와께로 향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절차가 전혀 없습니다.
기도 자리는 그런 자리입니다. 깨어지고 망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여호와께 얼굴을 돌리면, 다시 회복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로 향하면 그곳이 성소(聖所)가 됩니다.
벼랑 끝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벼랑에서 떨어집니다.
우리 인생은 늘 벼랑 끝에 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벼랑 끝에 서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이제 죽습니다. 바로는 그 거대한 권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 합니다. 그때 모세는 여호와께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일들 속에서도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로 향하면 삽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이 생각나게 되어있습니다.
술이 생각나면 안 됩니다. 권력자가 생각나면 안 됩니다. 답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5장 22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평이 아닙니다. 자기의 문제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하나님께 진실 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너무 정돈된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감정을 쏟으시면 됩니다. 질서정연하게 미사여구를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덜 답답하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정직함입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정직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드러내셔야 합니다.
출애굽기 5장 22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세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는데, 상황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모세의 입장이 매우 난감합니다.
바로는 더 완악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단입니다. 모세는 죽을 지경입니다. 잘못하면 돌무더기에 묻힐 판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문의 연속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질문이 많이 생깁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내가 계획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습니다.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어찌하여?”라고 질문합니다.
하박국서가 대표적입니다. 일어난 현상을 보면 도무지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의문을 가집니다.
시편 기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 앞에서 의문을 가지고 의문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어찌하여…”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신앙의 길은 복잡하고 험난하고 어렵습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 보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 어찌하여 내 백성으로 학대를 당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의 이 질문은 무신론자의 기도, 무신론자의 질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무신론자들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라고 질문합니다. 무신론자들도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하나님 바깥에서 허공에 질문을 던집니다. 대답자를 향하여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할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질문은 다릅니다. 모세는 정확하게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정확하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정답을 가지고 계신 분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내가 답을 모를 뿐, 하나님께서는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답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범답안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답만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문제 출제자이십니다. 그리고 문제 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해결자가 되십니다.
출애굽기 6장으로 넘어가면,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모세의 부르짖음,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문제를 어떻게 풀고 계십니까? 누구를 찾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참된 해결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한 현실적인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해결점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마다 그 상황에 집착하고 사람을 바라보다가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은 했지만, 광야에서 다 죽고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빼고….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교훈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수많은 문제들을 만날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면, 상황이 더 악화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생활을 할 때에도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한 번 해보려고 하니 더 나빠졌습니다. 바로가 그냥 미쳐 날뜁니다. 악조건이었는데 더 악조건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될 과정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삶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부르짖음에, 그 질문에 하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문제를 가지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문제가 내 삶을 힘들게 하고 있다면,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말고 절망하지 마세요. 어려워지면 그 다음 페이지에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워질 때입니다. 어려워질 때, 어려운 현실의 문제 앞에 무너지지 말고 그때 주님께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우리의 얼굴을 향하고, 그분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시고 풀어주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나아온 여러분들에게 주께서 응답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어떤 것도 숨기지 마세요. 모세처럼 자신의 있는 것을 그대로 토해내세요. 감정을 숨기지 마세요. 여러분들의 감정을 쏟아놓으세요. 어떤 감정도 표현하세요.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세하고 확실한 응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참된 해결자이심을 믿으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난국을 돌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애굽을 완전히 떠나보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을 거머쥐고, 하나님의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