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29일 발생한 ‘서해교전’ 1주년을 맞아 당시 국군수도병원에서 부상장병들을 치료했던 군의관 이봉기(34)씨의 회고가 큰 관심을 모았다.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라는 그의 글은 지난 4월 의료전문지 ‘청년의사’가 주최하는 ‘한미수필문학상’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이 글은 그 후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울렸다.
조선닷컴 독자 황조연씨는 “이봉기 선생님께서 백마디 말보다 확실하고 가슴에 와 닿는 추모사를 써주셨다”고 했고, 독자 송진영씨는 “눈물이 솟는다. 이런 장한 용사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3일 밤 서울아산병원을 찾아가 이 병원 심장내과 임상강사로 근무하고 있는 이봉기씨를 만났다.
- ‘서해교전…’ 글로 유명인사가 됐는데.
“방송에서 인터뷰도 하고 일간지에 글도 실렸지만 정작 아내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집에 못 들어간지 2주 됐다. 임상강사 생활이 그렇다. 9개월된 딸아이 얼굴도 못 보고 산다. 아내는 ‘집에도 안 오면서 신문에 나면 뭐해’라고 하더라. (웃음) 서해교전 때 국군수도병원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쏟아졌다. 그렇지만 정작 나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변한 것도 없다. 오늘도 오전 6시30분에 병원에 나와 회진 돌고, 8시간동안 심장내과 시술을 했다. 밤11시 넘어야 퇴근할 것 같다.”
- 글이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말 잘 모르겠다. 사실 그대로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것 뿐이다. 국군수도병원에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사회에서의 그것과는 딴판이다. 우리는 부하·상관 관계이기도 하고, 형·동생 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우(戰友) 같다. 서해교전 당시 30여명이 병원에 후송됐을 때 우리 군의관들은 너무 열 받아서 북한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새파란 젊은이들이 팔 다리가 절단난 채 들어오는데 정말이지 눈이 뒤집어지더라. 그 때의 느낌이 글에 조금이나마 녹아있어서일까.”
- 서해교전 당시 군의관들의 심정은 어땠나.
“우리 손에 장병들이 들어온 이상, ‘우리 품 안에서 죽는 애들은 없게 하자’ 수천번 수만번 다짐했다. 사실 의사생활에서 군의관은 일종의 휴식 기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레지던트 때는 수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지만 군의관 생활을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 때는 달랐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자발적으로 꼬박 밤을 새웠다. 의무병들도 모두 한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대통령은 축구를 보러 갔고 온 나라는 월드컵 이야기 뿐이었다. 병원에 찾아온 사람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분노했다.”
- 부상병들의 상태는 어땠나.
“한마디로 처참했다. 기관장은 장병들을 살리기 위해 엔진을 최대로 돌려 적선으로부터 달아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그는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상병을 기억 하나.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 있었다.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을 입었고…. 전신에 총상을 입었다. 의무병이었던 박 상병은 여기저기 쓰러져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멋진 녀석이었는데….”
- 홈페이지에도 글을 쓰고 있던데.
“군의관 생활 첫해(2000년)를 강원도 철원 백골부대에서 시작했다. 그 때 웹디자이너인 동생의 도움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군 생활을 담담하게 써 내려갔다. 심심풀이로 쓴 글인데도 조회수가 하루 50여건씩 나왔다. 누군가 내 글을 읽는구나 싶어 열심히 썼다. 아프리카 서부 사하라에 UN평화유지군 군의관으로 파견갔던 경험도 담았다. 이후 대한의사협회에서 발행하는 ‘의협신보’에도 글을 연재하고 있다. 언론에 홈페이지가 공개된 후 내 홈페이지는 하루 7000여건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 서해교전 이후 본인에게 뭔가 달라진 것이 있나.
“우리 같은 생각없는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이 그 사건 이후 ‘반(反) 정부’로 돌아섰다고나 할까. 우리 젊은이들이 그렇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동안,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울화통이 치민다. 그 와중에 딸 유진이가 태어났다. 서해교전 이후 위로 휴가를 받아, 딸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훗날 딸 아이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 이 글을 쓰게 됐다. 이런 아저씨들 덕분에 네가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거라고.”(박민선기자 sunrise@chosun.com)
지난 6월 21일 ‘6·25 국민대회’에 참석한 [곽진성 하사]와 [고경락 병장]을 만나 서해교전 후 1년 동안 그들이 겪은 일들에 대해 들어봤다.
최근 월드컵 1주년 기념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TV방송사들이 앞다퉈 감동적인 골인장면을 모아 방영해 국민들이 또다시 월드컵으로 흥분해 있을 때 서해교전 부상자들은 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나 TV조차 켜지 않았다고 한다.
곽 하사는 교전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가 북한 경비정과 대치 상태에 있을 때 북한군의 얼굴표정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었어요. 그때 전 M60 사수였는데, 북한이 선전포를 쐈을 때 ‘이게 현실인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른쪽 팔에 탄두가 관통해 몸이 튕겨져 나갔고, 옆에 있던 황창규 중사가 병기장 안(배 안쪽)으로 저를 옮겼는데 갑자기 85㎜ 포탄이 터져 다시 가판 위로 옮겨졌죠. 순간 오른쪽 어깨가 모두 (떨어져)나갔으면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했는데 다행히 (어깨가)붙어 있었어요. 황 중사는 생명의 은인입니다”
북한 경비정의 기습포격을 받을 때 곽 하사는 직속 상관인 조천형 중사와 황도현 중사가 불에 타죽고 파편 맞아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또 부사수가 불에 타고, 서후원 중사의 심장에 탄두가 관통해 그가 죽어 갈 땐 정말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물을 너무도 싫어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원했다는 고 병장에게 전사자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고 병장은 “모두가 친했다”며 한참 후 “더 친한 사람을 말하자면 황도현 중사와 박동혁 병장이 많이 생각난다”며 말문을 열었다.
“황 중사는 맡은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서 해 모범이 됐고, 책에서 읽은 글귀라며 좋은 말도 많이 해줬다. 또 박 병장은 ‘제대하면 친구하자’고 했던 사이다. 제대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해군 반바지를 선물해 줬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박 병장이 생각난다”
이어 그는 “배타기 전에도 장난치고 얘기하고 했는데 지금은 볼 수 없다는 게 가끔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며 어느새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곽 하사는 “우발적 사고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전역을 했기 때문에 이런 말도 할 수 있다”며 “작전 태세에 돌입해 우리도 조준을 준비하고 있었다. 싸이렌이 울리고 북한이 85㎜ 포를 쏘아 불빛이 번쩍했다. 북한은 탱크에서 사용되는 포를 변조했다. 뭐든지 뚫을 수 있는 함포를 쏴 우리 고속정보다 화력이 엄청 쌨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곽 하사와 고 병장에게 서해교전 후 지금까지의 생활에 대해 물어봤다. 고 병장은 제대 후 7개월 가량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몸이 지칠 때까지 컴퓨터를 했어요. 잊기 위해서…. 가끔 전쟁영화 볼 때 폭탄이나 총소리 등이 나면 깜짝깜짝 놀래요. 경제는 알아야겠는데 뉴스 보면 ‘김정일 어쩌고’해서 성질 나고…”
이어 그는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셨어요. 제대 후 집에서 놀란 데 먹는 약 지어 먹이고…. 지금은 전보다 걱정을 많이 하진 않는데, 가끔 눈물을 흘리세요. ‘사는데 지장 있지나 않을까’해서…”라며 한숨을 쉬었다.
곽 하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꿈에 나와요. 전쟁영화도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해요. 포탄 터지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해요.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죠. 너무 끔찍해서…”
‘결혼 후 아이가 아빠의 상처에 대해 물어보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란 질문에 그는 “떳떳하게 얘기할 것이다. 이 나라를 지키다 상처를 입었다고…”라며 미소를 지었다. 웃는 이유를 묻자 그는 “올 10월에 결혼을 한다”며 수줍어했다.
기자는 ‘학교에서 영웅대접을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들은 마치 서로 짠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주변친구들 조차 서해 교전에서 부상당한 게 이들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곽 하사는 “서해 교전이 일어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며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도 가까운 친척들만 병문안 왔다”고 말했다.
고 병장도 마찬가지다. 고 병장은 “전역 후 친구들과 군대 얘기를 하는데 처음엔 서해 교전에 참여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 한 친구가 ‘맞다’고 하자 그때서야 ‘그런 일이 있었냐’며 위로해 줬다”고 했다.
곽 하사는 서해교전으로 인해 오른쪽 팔을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오른쪽 팔에 탄두가 관통했고, 오른쪽 전신에 포탄 파편으로 상처가 깊다. 그는 7개월 가량 병원에 입원했다가 지난 3월 31일 의가사 제대를 한 상태다.
고 병장은 제대 14일을 남기고 서해교전에 참가했다. 유달리 후임병이 들어오지 않아 고생이 심했다는 그는 파편을 맞고 치료를 받다 만기 제대했다. 서해교전 하루 전에 후임병이 들어와 ‘이제 좀 편해지겠다’싶었다고 털어놓는 그는 자신의 피해보다도 “군에 들어 온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아 참전한 이등병이 많이 놀랬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곽 하사는 올 3월에 대구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고, 고 병장도 복학해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곽 하사는 “정말 너무 한다. 나라 지킨다고 싸운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는가”라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정부는 나라를 위해 싸운 전사자들을 위해 유가족들에게 각각 3000만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 외 부상자들에게는 한푼도 지원해 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곽 하사는 “이런 얘기하기가 낯부끄럽다”면서 얘기를 꺼렸다. 그러다 “정부로부터 받은 것은 포장 하나”이며 “언론사 등을 통해 모금된 국민성금 가운데 900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국민성금도 다친 정도에 따라 등급을 메겨져 고 병장은 고작 1400만원만 받았다.
곽 하사는 유공자처리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며, 보훈정책의 잘못된 점들도 지적했다. “유공자 처리를 하기 위해 ‘공무상병인증서’‘진단서’‘전역증명서’등 10개의 서류를 아픈 몸으로 일일이 받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제출했다. 그런데 2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 알아보니 ‘2종류의 접수창구가 있는데 접수를 다른 곳에 했다’는 것이었다. 사전에 접수창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
즉, 모든 기록들이 바로 국방부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개인이 직접 신청해야 해 ‘보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받고, 받기 싫으면 마라’는 게 보훈정책의 현실이다.
곽 하사는 수도병원과 국방부로부터 2차례 부상검사를 걸쳐 7급 판정을 받았다. 부상 정도는 1급부터 7급까지 있어 곽 하사는 아주 경미한 부상에 속한다. 그는 오른손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정상적인 신경을 100%로 봤을 때 10%의 신경만 살아있다는 게 의사의 진단이다. 팔에 난 상처를 내 보일 때 손가락들이 제멋대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팔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활달한 성격이었는데, 요즘은 조금 위축된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곽 하사는 목숨을 담보로 싸우고, 오른쪽 팔을 못쓰는 대가로 당시 월급의 50%인 40만원을 매달 지급 받고 있다.
서해교전 참가자들은 비록 국민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우리들만이라도 상기하자며 ‘서해교전 전우회’를 구성했다. 전우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인터넷 카페 (cafe.daum.net/pkm357)도 만들어졌다. 이들은 다가오는 6월 29일 대전 현충원을 찾아 전사자 고인의 명복을 빌고, 전우애를 다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