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차 96%, 비좁아 CPR도 어려운 ‘소형’
[비좁은 119구급차]
국내 1811대 중 1737대가 소형
환자 싣고나면 앞뒤 공간 꽉 차… 중증환자 차밖으로 빼내 처치도
중형차 주로 쓰는 美-日과 대조
서울 동대문소방서 청량리119구급대 대원들이 소형 구급차(왼쪽 사진)에서 훈련하고 있다.국내 119구급차의 95.9%를 차지하는 소형 구급차는 내부가 좁아 여러 대원이 동시에 환자를 응급처치하기 어렵다. 양회성
올해 4월 경기도의 한 종합운동장. 119구급대가 중증외상을 당한 40대 남성을 가까운 권역외상센터로 옮기기 위해 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헬기가 도착하기 직전, 환자가 심정지에 빠졌다. 구급대는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하기 전에 먼저 환자를 구급차 밖으로 빼내야 했다. 구급차 내부가 좁은 탓이었다. 환자의 가슴을 압박하고, 기도를 확보하고, 출혈 부위를 누르는 등 여러 대원이 동시에 응급처치를 해야 했지만 12인승 승합차에 기반을 둔 국내 소형 구급차 안에서는 불가능했다. 구급대원들은 구급차 밖에서 초속 20m가 넘는 헬기의 하강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위태하게 환자의 심장을 마사지해야 했다.
30일 소방청에 따르면 국내 119구급차 1811대 가운데 1737대(95.9%)는 ‘스타렉스’나 ‘스타리아’ 등 12인승 승합차를 활용한 소형차다. 소형 구급차는 앞뒤 길이(전장)가 5.12∼5.25m로 짧다. 구급차 내 환자실에 들것을 싣고 나면 누워 있는 환자 머리 위로는 공간이 남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기도를 확보할 때 구급대원이 비스듬히 앉은 채 환자의 목 안쪽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튜브를 삽관해야 한다.
환자 옆에 설치된 좌석도 구급대원 2명과 보호자 1명이 앉으면 꽉 차 구급용 가방을 올려둘 공간만 간신히 남는다. 119구급대는 평소 운전자 1명과 구급대원 2명 등 3인 1조로 활동한다. 심정지 등 중증환자가 발생하면 2개 팀(최소 5명)이 한 구급차에 함께 탄다. 운전자를 제외한 구급대원 4명이 정신없이 달리는 소형 구급차에 함께 타면 동선이 부딪쳐 부상 위험도 크다.
반면 경기 김포소방서 등 일부 소방서에 도입된 중형 구급차에선 구급대원이 환자 머리맡에 앉을 수 있어 기도 확보를 포함한 응급처치가 훨씬 수월했다. 김포=조건희 기자 b
소방청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15인승 승합차인 ‘쏠라티’를 활용한 중형 구급차를 현장에 도입했다. 중형 구급차는 전장이 6.19m로 소형 구급차보다 1m가량 길어 환자 머리맡에 구급대원이 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중형 구급차는 전국에 74대(4.1%)뿐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14∼15인승 승합차를 주력으로 쓰는 것과 대조적이다.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가정의학과 교수)은 “구급대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CPR과 기도 확보인데, 국내 소형 구급차는 이에 적합하지 않다”라며 “정부와 한국 자동차 회사가 손을 맞잡고 충분한 내부 공간과 기동성을 겸비한 구급차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 머리맡 공간 없는 소형 구급차, 기도 확보 실패 위험
국내 구급차 96%가 ‘소형’
환자 옆에서 기관 삽관 쉽지 않아
구급대원도 좁은 실내에 부상 위험
日선 도로 사정 맞춰 전용차 제작
20일 오후 2시경 경기 김포시 장기동의 한 아파트 경로당. ‘70대 여성 A 씨가 문턱에 걸려 넘어져 일어서지 못한다’는 119 신고가 접수됐다. 김포소방서 최경훈 반장이 이끄는 119구급대는 올 5월 소방서에 배치된 1대뿐인 중형 구급차(15인승)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A 씨는 오른 다리가 부러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최 반장과 동료 대원들은 능숙하게 A 씨를 들것에 태워 차에 올린 뒤 다리에 부목을 대고 곧장 인근 병원으로 출발했다. A 씨의 머리맡에 앉은 나하늘 대원은 A 씨가 머리를 다쳤을 가능성을 감안해 동공을 확인하고 호흡을 관찰했다.
● “환자 머리맡 공간, 기도 확보 성패 좌우”
5월 4일 서울 청량리119구급대 소속 대원들이 비좁은 소형 구급차 내에서 기도 삽관 훈련을 하고 있다. 기도 확보는 환자의 정수리 위에서 목 안쪽을 보면서 실시하는 게 '정석'이지만, 국내 119구급차의 95.9%인 소형 구급차에선 그런 방식이 불가능하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현장 응급처치와 이송 장면이지만, 만약 A 씨를 태운 구급차가 중형이 아닌 소형(12인승)이었다면 일련의 과정은 사뭇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소형 구급차는 내부가 좁은 탓에 차량 밖에서 응급처치를 마친 뒤 환자를 태워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환자 이송은 늦어진다. 소형 구급차는 환자 머리맡에 공간이 없어 환자 상태를 관찰하기도 더 어렵다. 최 반장은 “10년간 소형 구급차만 타다가 중형 구급차로 환자를 이송해 보니 확실히 응급처치를 할 때 여유가 있고 안전하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 74대(4.1%)뿐인 중형 구급차와 기존 소형 구급차의 가장 큰 차이점은 ‘환자 머리맡 공간’이다. 이 공간이 기도 확보의 속도와 안정성을 좌우한다.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하는 환자의 기관지에 튜브를 정확히 끼우고 이를 유지하려면 환자 정수리 위에 앉아 목 안쪽을 봐야 한다. 전국 응급구조과와 간호학과에서 그렇게 가르친다.
그런데 국내 119구급차 가운데 95.9%(1737대)를 차지하는 소형 구급차에는 이런 공간이 없다. 대다수의 구급대원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리 환자의 머리 옆에 앉은 채 비스듬히 튜브를 끼워야 한다. 1급 응급구조사인 윤상은 대원은 “기관삽관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장비가 도입되긴 했지만, 환자 머리맡에서 보는 것과 아닌 것은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 좁은 실내서 응급처치… 부상도 잦아
소형 구급차의 좁고 낮은 환자실은 구급대원과 환자에게도 위험할 때가 많다. 올 1월 말 경기의 한 119구급대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12세 아이를 이송할 때가 그랬다. 뇌출혈일 가능성이 있어 속력을 높였는데, 아이가 멀미로 누운 채 구토를 하려 했다. 토사물이 기도를 막을 수 있는 상황. 구급대원이 아이를 세워 앉힌 뒤 엉거주춤 서서 봉투를 받쳐야 했다. 그러나 구급차가 퇴근길 정체된 도로를 지그재그로 빠르게 달리는 통에 구급대원이 차 내부에 부딪혔다.
구급대원들은 출동 중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기 일쑤다. 허리 디스크는 ‘직업병’일 정도로 흔하다. 심정지나 중증외상 등 중증 응급환자를 여러 구급대원이 동시에 응급처치를 할 땐 특히 동선이 복잡해 부상 위험이 높다. 지난해 전국 119구급대가 실어 나른 중증외상 환자는 1만3573명, 심정지 환자는 3만5073명, 기도가 막힌 환자는 36만2032명이었다.
소방청이 2021년 1월 29개 소방서에서 소형과 중형 구급차를 모두 타 본 구급대원들을 설문한 결과에서도 중형의 응급 처치 공간이 좋다는 응답률이 81%로 소형(11%)에 비해 선호도가 7.4배로 높았다.
● “내부 넓고 기동성도 갖춘 기종으로 바꿔야”
상황이 이런데도 소형 구급차를 주력으로 운행하는 이유는 대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국내 자동차 회사들은 구급차 전용 차량을 만들지 않는다. 소방당국은 일반 승합차를 산 후 전문업체를 통해 개조한다. 2004년경까진 국내 119구급차도 ‘토픽’과 ‘이스타나’ ‘그레이스’ 등 15인승 승합차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국내 자동차 회사들이 승합차 주력 판매 모델을 12인승으로 바꾸면서 15인승 모델 대다수는 단종됐다. 이후 출시된 15인승 승합차는 전폭(차량 너비)이 2m 이상으로 넓어 골목길 운행이 어렵다. 구급대원 사이에서도 현행 중형 구급차가 응급처치에는 도움이 되지만 전폭이 넓어 꽉 막힌 도로에서 다른 차를 피해 달리기엔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많다.
한국과 도로 사정이 비슷한 일본의 경우 자동차 회사들이 구급차 전용 차량을 만들어 소방 당국에 공급하고 있다. 모두 14∼15인승으로, 환자 머리맡에 공간을 갖춘 구급차들이다. 미국은 구급차를 크기에 따라 세 종류로 구분하는데, 그중 가장 작은 종류도 환자 머리맡에 공간이 있다.
이에 따라 내부 공간이 넓으면서도 기동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차세대 국산 구급차 도입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8년 소방청(당시 소방방재청)은 224억 원을 들여 환자실이 넓고 첨단장비를 탑재한 벤츠 구급차 142대를 소방서에 배치했지만, 전폭이 넓어 골목길 운행이 어려웠고 수입차인 탓에 유지와 개량이 힘들어 폐기했다.
김포=조건희 기자, 이문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