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눈을 떴어
방안에 온통 네 생각만 떠다녀
생각을 내보내려고 창문을 열었어
그런데
창문 밖 있던 네 생각들이
오히려 밀고 들어오는 거야
어쩌면 좋지
- 어쩌면 좋지/ 윤보영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 분수 / 김춘수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中/ 백영옥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 나만 남았다 / 이생진
기다림이란 만남이다
기다림이란 이쪽과 저쪽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의 틈새다
만나기 위해 나는 기다리고
당신은 가까이, 좀더 가까이 다가온다
만나기 전에 마음을 바꾸거나
이미 다른 길로 몸을 돌려 발을 떼었다면
십 년이고 백 년이고 기다린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기다림도 만남도 없다
목마른 시간만 공허를 꿈꿀 뿐이다
기다림이란 만나기 위해 참는 아픔이다
아픔이 없는 화살은 순간을 못 참아
순간을 뚫고 날아간다
가서 뉘 가슴 한복판에 꽂힌다, 하지만
부활의 시간은 영원을 참는다
당신을 기다린다
새로 만날 영원을 기다린다
나는 얼마나 많은 들숨을 더 소화해야 할까
죽어서 만날 동행의 그림자가
머지않아 숨을 멎게 한다, 해도
나의 기다림은 썩지 않는 빛이 되리니
당신을 기다린다
새로 만날 목숨의 후일까지
- 기다리다 떠난 것은 기다림이 아니다 / 이운룡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청청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이는 바람결에도
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 나희덕
난 그 아픔 알지 못했다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떨어지는 낙엽의 사유를
난 바람의 마음 읽지 못했다
푸른 나뭇잎 가을 볕에
어여삐 물들이며 슬픔을 노래해도
그 서러움 미처 알지 못했다
한 잎 마지막 잎새 떨어지던 날
뒹구는 낙엽 보면서도
난 나무의 아픔 느끼지 못했다
가을 간다고 서걱거리는 마지막 인사도
느끼지 못한 채
어스름 저녁 내려앉기 전
헐떡이는 바람 소리 듣지 못했다
하여 그렇게 보내 버렸다
소중한 사람 잘 가란 인사도 없이
들리지 않는 바람결에 실어 보냈다
- 낙엽의 사유 / 이명분
당신이 놓고 간 그리움은
세월 뒤에서 웅크린 채
미움으로 탈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철부지 같은 마음속에
타버린 그리움 그려내지 못한 것은
말라버린 애정의 색채 때문인가요
혼자 달래보는 안타까운 마음은
핑크색으로 물들인
당신의 사랑을 기다립니다
- 놓고 간 그리움 / 이병주
사랑하는 이여
그리움에 물들거든
잔잔하게 출렁이는 호수를 보아라
사랑하는 이의 눈빛을 닮은
깊고 그윽함이 느껴지리라
사랑하는 이여
그리움에 물들거든
숲에 부는 바람소리를 들어라
그대와 부르던 사랑의 노래들이
감미롭게 들리리라
사랑하는 이여
그리움에 물들거든
예쁜 편지지에 마음을 담아라
쏟아낼 수 없는 많은 사랑의 밀어들이
그대 앞에 나타나리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소리를 듣게 되리니
아름다운 사랑의 언약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 그리움에 물들거든 / 김수미
너와 나 마주앉아
나누던 커피에 매료되어
너의 향취인지
커피 향인지 모를
아늑함에 빠져들 던 그 밤
별도 달도 숨어버린
저편 기억 속으로
바람처럼 휘돌고 나가는
고독의 몸부림에
갈색 추억이 내려앉는다
- 갈색 추억 / 이명분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바람이 못내 서러움 한 자락 떨어뜨려
그 슬픔에 나뭇잎이 슬피 흐느낀다는 것을
밤하늘에 달무리가 지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태양을 앞에 두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사모하다 흐려지는 달님의 눈물이라는 것을
비가 오는 날 천둥이 슬피 울어대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가슴속에 가두어두고 참아내던 아픈 속내가
터질 듯 차 올라 마침내 소리내서 통곡한다는 것을
서글픈 바람처럼, 달무리 지는 달처럼, 통곡하는 천둥처럼
내가 슬퍼지는 이유도 알겠습니다
- 이유를 알겠습니다 / 김수미
소나무라 하고 싶었다
네 마음 가지 끝에 푸르게 익어가는
메마른 낙엽의 몸짓으로
소리없이 지는 약속이 아닌
개여울 졸졸 끊임없이 흐르는 노랫 소리로
맹세라 말하던 그 목소리
네 마음 세월 따라 가버렸는지
약속은 깨어지고
애정 결핍의 증세로 누렇게 퇴색해 버린
부질없는 기다림
- 약속 / 이명분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 기억하는가/ 최승자
그냥 지나 칠 수도 있었는데
잠시
일상을 놓아 버린 게 잘못 이었어
지독한 열꽃
아침이면 움츠리던 새벽
목숨만큼이나 질긴 밤을
놓아 버린 게 잘못 이었어
맨살로 부대끼던 치열한 열기를
넝쿨로만 견디기엔 힘이 들었겠지
하지만 눈물 같은 하늘을 바라보아선 안 되는 거였어
그 싱그런 잎사귀로 태양을 가리는 게 아니었어
햇살에 타들어가는 가슴을
꼬옥 안고 있어야 했었어
이제 눈을 뜨고
잎이 지는 것을 견뎌내야 해
초록빛 위로 번져오는
붉은 슬픔을 견뎌내야 해
그리움이 물들기 시작한거야
- 백일홍 / 김명우
찍을 수 없는 마침표 이길래
세월만 보내었나 봅니다
보낸 세월은 말없이 흘러 만 가고
비록 채워지지 않는 여백이 있어도
이제는 잊어야할 때인가 하여
그래서 하나 찍어 봅니다
이제 혹 있을지 모른
너와 나의 재회의 그림은
마침표 위에 덧칠로 그리려고
남은 여백 그대로 둔 채
마음 쌓여 놓은 서랍에다
고이 간직하여 놓으렵니다
- 마침표 위에 / 이병주
먼지 털어 내듯
툭툭 마음 비워내기를 합니다
내 기억 속의 상처를
내 기억 속의 추억들을
참 많이 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아파서
너무 슬퍼서
너무 그리워서
살아 숨쉬는 동안
내가 앓아야 했던 많은 것들
이젠
비워야 합니다
아마도
잠 못 이룰 날이 많을 것 같습니다
슬픈 나를 기억하지 않으려면
내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도록
내 마음을 비워냅니다
- 비워내기 / 김수미
어느 날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언젠가의 그 시간을 되돌아볼 때
내가 그에게 후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아픔이거나 슬픔이거나 갈증이거나,
그러한 아름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 눈을 감으면/ 황경신
첫댓글 잘봤어!좋다ㅠㅠ
글 너무좋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