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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타인의 세계, 일상의 삶에서 찾은 서정적 사유
백애송
하루하루 흘러가는 일상은 누구에게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모두 소중하다. 인간은 각자 현재 놓인 상황 속에서 매 순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함이 오히려 더 귀하다는 것이 더 절실하게 와 닿는 요즘이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사건·사고들.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사이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하고 있다. 전쟁 속에서 국제적 난민이 늘어나고 있으며, 도의를 져버린 학부모, 마약, 칼부림 등 매일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평범한 일상이 주는 소소함은 더욱 귀하다고 할 것이다. 이에 여기에서는 일상이 주는 이야기들의 계보를 따라가 보기로 하겠다.
볕 좋은 날이었고
사월초파일이었던가
무소유 법정 스님께서 법문 끝에
나머진 꽃에게서 들어라 하시니
이 봄날 어떤 꽃이 무슨 말을 하나
꽃 찾아 사방을 둘러보니
일찍이 피고 진 매화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부르고
가을 산 후미진 곳에 피었던 용담꽃은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고
저마다 사연으로 살아가고
살아가는 방식은 다 다르다고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고
봄이니 꽃이 피는
이 당연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누군가 피어날 때 누군가는 져내리는데
돌아보면 꽃은 무슨 말을 했던가
꽃은 그렇게 말하며 수줍게
고개 떨궜던가 환하게 웃었던가
* 이육사
** 복효근
― 고찬규, 「한 소식-꽃말」 전문
고찬규 시인의 「한 소식-꽃말」은 법정 스님의 이야기와 이육사, 복효근 시인의 시를 차용하고 있다. 시 속 계절적 배경은 “볕 좋은 날”들 중 “사월 초파일”이다. 사월 초파일은 매년 음력 4월 8일로 석가모니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불교의 연중행사 중 가장 큰 명절이다. 시인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회상한다. 사월 초파일 법정 스님의 법문을 들었고, 법정 스님은 법문 끝에 “나머진 꽃에게서 들어라” 하셨다. 나머지는 꽃에게서 들으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인은 “이 봄날 어떤 꽃이 무슨 말을 하나” 사방을 둘러본다. “일찍이 피고 진 매화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부르고/ 가을 산 후미진 곳에 피었던 용담꽃은/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고” 말한다. 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욕망하지도 않는다. 도리에 역행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순리대로 흘러간다.
풀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누구도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풀이 지닌 특성과 그 나무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다. 풀과 나무들은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생명의 신비를 꽃피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들의 분수에 맞도록 열어 보인다.
옛 스승(임제 선사)은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피면 된다. 남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이런 도리를 이 봄철에 꽃한테서 배우라.
― 법정, 「꽃에게서 들으라」, 『홀로 사는 즐거움』(샘터사, 2004) 중
위의 글은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에 나와 있는 한 구절이다. 시 속 화자인 시인은 시 속에 등장하는 꽃을 통해 한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꽃은 누구도 닮으려 애쓰지 않고, 저마다 자기다운 꽃을 피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들의 분수에 맞게 펼쳐 보이는 것이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피어난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에게 없는 것에 집착한다. 나에게 부족한 것을 욕망하고, 타인과 비교하며 불행해하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시인은 이 봄날, 다름을 인정하여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받아들여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꽃들에게서 배우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학생은 학생 나름대로, 청년은 청년 나름대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들만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정해져 있는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마다의 사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 역시 모두 다르다. 이들은 각자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 이 때문에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는 것이다.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꽃을 피우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노력하였고, 적당한 햇살과 비와 바람이 충분히 제 역할을 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순간들도 있다.
이는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주는 마음과 받는 마음이 다른 것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단정 지어 했던 행동들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냥 어쩌다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은,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인 셈이다. 봄이어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오랜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기에, 그 기다림 끝에 꽃을 피운다는 것을 인간은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누군가 피어날 때 누군가는 져내리”기도 한다. 피는 것이 있으면 지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봄이니 모든 꽃이 만개하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르며 힘든 시간을 견뎌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엄마 대신 몸빼만 남았다
항아리 바지 입으면 엄마라 안 부를래
산골 할머니 같아서 창피해
얼룩덜룩 꽃무늬 벽지 입은 것 같아
눈 흘기고 투덜거리면 엄마는 세상을 향해 웃었다
몸빼 입으면 무서운 게 없어
덤빌 테면 덤벼 하듯이
이 몸빼가 네 아버지보다 좋다아
내 마음 편하게 해준 건 이것뿐이야
날 구겨 트리지 않은 것도 몸빼 뿐이야
엄마는 펑퍼짐한 바지에 엉덩이를 넣으며 일갈했다
드라마 보는 몸빼
밭일 하는 몸빼
손주 업은 몸빼
허리춤의 꼬깃꼬깃 고무줄로 감은 지폐와
곶감 몇 개
엄마 세상 떠난 뒤
빨랫줄에 걸려 우는 몸빼
빨래를 걷어 내가 입었다
엄마처럼 구겨지지 않았다
몸빼는 옳다
― 마선숙, 「몸빼는 가고」 전문
몸빼는 일을 할 때 편하게 입는 바지로 주로 할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지만 대부분 자잘한 꽃무늬가 많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자원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남성에게 국방색의 국민복을 입게 하였고, 여성복으로 부인표준복을 입게 하였다. 이 부인표준복 가운데 하나가 몸빼이다. 식민지 시절 일본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사회통제와 군수품 조달 목적으로 몸빼를 입게 하였다. 당시 몸뻬를 입지 않은 여성은 버스나 전차 탑승이 금지되었고, 심지어는 관공서, 극장 출입도 금지되었다. 처음에는 몸빼의 흉한 모습으로 반발이 심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 지금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화자인 시인에게 엄마는 이 몸빼로 남았다. 현재 엄마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몸빼가 엄마의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철없던 시인은 몸빼 입은 엄마가 부끄러워 “눈 흘기고 투덜거”렸다. 바지의 자잘한 꽃무늬가 마치 “얼룩덜룩 꽃무늬 벽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리라. 통이 넓은 “항아리 바지 입으면 엄마라 안 부를래/ 산골 할머니 같아서 창피”하다고 투덜거렸지만, 엄마는 시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향해 웃었다”. 몸빼만 입으면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을 몸빼를 통해서 얻었던 것이다.
당시 엄마에게 아버지보다도 좋고, 자신을 구겨버리지도 않는 것은 몸빼뿐이었다. 시인의 엄마가 살았던 당시는 지금과 같은 남녀평등의 시대가 아니라, 남녀가 해야 하는 일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던 시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일, 그리고 어머니의 일이 나누어져 있었음은 자명하다. 엄마보다 바깥의 일을 더 우선시하였던 아버지의 삶과 이런 아버지에게 서운한 감정을 보여주지 못하였던 엄마.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엄마의 도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엄마에게 이 몸빼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준 고마운 존재이다. 또한 여자라고 무시하고 공격하였던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구겨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도록 유일하게 지켜준 존재이기도 하다.
“드라마 보는 몸빼”, “밭일하는 몸빼”, “손주 업은 몸빼”는 모두 엄마의 모습이다. 허리춤에는 “꼬깃꼬깃 고무줄로 감은 지폐” 몇 장과 “곶감 몇 개”를 넣어두셨던 엄마의 삶은 풍족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자식을 위한 마음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풍족하였을 것이다. 몸빼 입은 엄마의 모습이 싫어서 어릴 적 그렇게 투덜거렸건만, 시인도 엄마의 나이쯤 되어보니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싫어하였던 몸빼를 현재 시인이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인은 “엄마처럼 구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소신껏 자신의 삶의 나래를 펼쳐가고 있음이리라.
아스팔트 위에 압착 된 날갯죽지
비둘기의 꿈이 납작하다
몸통은 사라지고
붉은 핏자국만 저승사자의 발자국처럼 찍혀 있다
비둘기에게 아스팔트는 더 이상 날아갈 필요 없는
안식처였을까
든든한 반석, 따뜻한 바위로 보여
날개를 접은 것일까
섬뜩한 위험을 느낄 여지도 없이 나른한 권태처럼
압사당한 주검이
짓눌린 꿈에서 깨어날 듯
부리에 씨앗을 물고 날아오를 것만 같다
아무도 모르는 절벽에 이르러 지상에 떨군 씨앗들은
다시 꽃 피울까
꽃길을 건너온 들짐승들의 발자국에서는 흙냄새 대신
꽃잎 적신 빗물이 흘러
폭포수가 된다
산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메아리가 된다
삼나무 숲의 흔들림이 천둥번개가 된다
그리고
이름 모를 붉은 꽃이 핀다
비둘기가 날아와 앉은 바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건축물이 되었다
한 마리의 비둘기가 달리는 차에 치여
로드킬로 피를 흘리고
그 핏자국이 꽃으로 피어나기까지
비둘기 비둘기 비둘기의 말이 없는 죽음이 서럽도록 황홀한
노을이 되어
저 하늘을 꾸미고 있다
― 려원, 「비둘기 비둘기 비둘기의 꿈」 전문
「비둘기 비둘기 비둘기의 꿈」은 로드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로드킬은 동물이 도로를 건너다 자동차에 치여 발생하는 사고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도로 위에서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하는 동물의 수가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로드킬을 방지하기 위해 동물들이 다닐 수 있는 이동통로를 곳곳에 만들고는 있지만, 멸종위기에 놓은 많은 동물들이 오늘도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그 많은 동물 중 이 시에서는 비둘기의 삶에 대해 형상화하고 있다. 한낱 동물에 불과한 비둘기에게도 꿈이 있을 수 있을까. 비둘기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 시 속 비둘기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날갯죽지가 “아스팔트 위에 압착”되어 있다. 꿈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 이 시점에서 못다 이룬 꿈은 어찌해야 하는가. 바닥에 납작 눌린 꿈을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꿈은 이루고 싶은 희망을 의미한다. 이루고자 하는 꿈에 백 퍼센트 도달하기는 힘들지만 꿈이 있다면 그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하게 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와 매 순간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이 고단하더라도 꿈을 위해 조금씩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매일 같은 하루의 반복이 아닌 조금 더 긴장되고 즐거운 날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시 속 비둘기에게는 이 모든 것이 부질없게 되었다. “몸통은 사라지고/ 붉은 핏자국만 저승사자의 발자국처럼” 차가운 바닥 위에 찍혀 있다. “비둘기에게 아스팔트는 더 이상 날아갈 필요 없는 안식처였을까”, 아스팔트가 “든든한 반석, 따뜻한 바위로 보여/ 날개를 접은 것일까”. 시인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보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어야 할 비둘기는 지상에 없다.
압사당한 비둘기의 주검이 “짓눌린 꿈에서 깨어”나 “부리에 씨앗을 물고 날아오를 것만 같다”. 비둘기에게 이 모든 것이 이루지 못한 꿈이 아니라, 깨고 나면 사라지는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에 시인은 비둘기가 “아무도 모르는 절벽에 이르러 지상에 떨군 씨앗들”이 “다시 꽃 피울”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즉, 바닥에 눌린 비둘기의 꿈을 “이름 모를 붉은 꽃”으로 대신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비둘기가 날아와 앉은 바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건축물이” 되고, “로드킬로 피를 흘리고/ 그 핏자국이 꽃으로 피어나기까지” “비둘기의 말이 없는 죽음이 서럽도록 황홀”하다. 더 이상 날아가지 않아도 되는 비둘기의 서럽도록 황홀한 꿈을 시인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로 포착하여 형상화하였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동물들의 생태적 특성을 무시한 채 무분별한 건설을 자행하였던 것이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멸종 위기의 동물들이 로드킬로 사라지면 생태계가 파괴되고, 먹이사슬의 구조가 위태로워진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놓은 덫에 인간이 걸리고 마는 형국을 ‘로드킬-비둘기의 꿈-폭포수-메아리-천둥번개-붉은 꽃-노을’의 이미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고찬규 시인의 「한 소식-꽃말」, 마선숙 시인의 「몸빼는 가고」, 려원 시인의 「비둘기 비둘기 비둘기의 꿈」을 살펴보았다. 이 세 편의 시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시편들이다. 고찬규 시인의 「한 소식-꽃말」에서는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매 순간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법정 스님의 책 속, 한 구절을 통해 일깨워 주고 있다. 마선숙 시인의 「몸빼는 가고」는 지금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은 엄마의 삶을 몸빼에 비유하여 보여주었고, 려원 시인의 「비둘기 비둘기 비둘기의 꿈」에서는 로드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들 시편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일상이라 치부하여 그냥 지나쳐 버렸던 것들이 세 시인의 깊은 천착과 섬세한 손길을 통해 시적 언어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첨예한 세 시인의 깊은 시선과 그 일상에서 길어 올린 서정적 사유가 한 편의 시가 되는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