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정 김정회(普亭 金正會) 고가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9호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151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형태인 이 집은 김정회(金正會, 1903~1970)가 고조 때부터 살아온 집이다. 조선 숙종 8년(1682)에 지어졌다고 하며 안채·사랑채·행랑채·문간채·사당과 두 동의 곡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나중에 동·서쪽에 각각 1칸씩을 덧붙였다.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며 기둥은 방형과 두리기둥이 섞여 있다. 안채의 뒤에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서 축대의 높이는 약 250cm 정도이다. 대문에는 “연정교육문화연구소” 간판이 걸려 있다.
김정회(金正會)는 호를 보정(普亭)·연연당(淵淵堂)이라하고, 본관은 안동, 조선 개국공신 익원공 좌정승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으로 증조는 김영철(金榮喆), 아버지는 회천 김재종(金在鐘)이다. 전라남도 장성의 유학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한학을 배우고,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기관의 하나인 경학원, 즉 성균관대학교 전신인 명륜전문학원에서 경학을 가르친 학자이자,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에게서 서화를 배운 서예가였다.
보통 때 매화·난초·국화를 즐겨 그렸지만 특히 대나무 그림은 아주 유명하다. 보정 김정회 선생은 상류 사회 출신이지만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덕행으로 많은 주위 사람들을 계도하였다. 선생이 타계한 후에도 두터운 덕망은 많은 향리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기리어 지고 있다.
도산마을은 1539년 김원복(金元復, 청풍인)이 정주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산마을이 형성된 이후 배출된 인물은 청풍김씨 가문에서 무과에 오른 김담(金湛, 훈련봉사), 김진(金津, 태안군수), 김엄(金淹, 종성부사) 등 김원복의 아들 삼형제와 손(孫) 중현(重鉉, 훈련주부)과 증손 익화(益華, 훈련판관) 등이 있고, 진주정씨 가문에서 1741년 문과에 등과하여 예조참판을 역임한 정택신(鄭宅臣), 1765년 문과에 등과하여 예조참의를 역임한 정중록(鄭重祿), 18161년 문과에 등과하여 병조참판을 역임한 정성일(鄭誠一), 1822년 문과에 등과하여 사간원헌납을 역임한 정재감(鄭在鑑), 1888년 문과에 등과하여 대간원정언을 역임한 정규삼(鄭奎三) 등이 있으며, 안동김씨 가문에서는 진사 김양대와 그 아들로서 1894년 생원으로 등과한 후 1896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의병을 일으킬 때 고창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김영철(金榮喆), 그리고 송사의 문인으로서 학문에 힘썼고 도산초등학교 설립과 고창고보 설립에 많은 재산을 출연하고 고창고보 초대 설립이사를 역임한 김재종(金在鐘, 김영철의 손자), 명륜전문을 졸업하고, 경학원 강사를 역임하였고, 시(詩)·서(書)·화(畵) 특히 풍죽에 능했던 김재종의 자 김정회(金正會) 등이 있다.
<보정 김정회 고가 앞 연못>
<보정 김정회 고가에 이르는 골목길 '대문'>
<김정회 고가 사랑채>
본래 초가를 와가로 고쳐 지었고, 문틀 위에는 '보정서실' 편액이 결려 있다.
<안채 : 종부님이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곡간채 : 안채 양옆에 있음>
<대문에서 사당에 이르는 길, 안채와 곡간채 사이>
<보정 김정회 고가 사당>
<도산재>
<보정선생 경모비 건립기>
<보정 김정회선생 경모비>
<진사 김공(양대) 행의비 역문>
<진사 안동김공(양대) 행의비>
<항재 김선생 강학비>
<도산정 : 마을 쉼터>
첫댓글 고향에 내려가면 꼭 들려보고 싶네요~~
삼단체 초대작가 로 구성된 고창 출신 작가들 전시회를 하는데 저는 연락이 안되어 이번에는 빠져있는데
서울 인사동인사아트센타 전시 5월 4일 오픈합니다 고창 문화의전당 그 다음주에 전시하게 됩니다 많이 구경하세요 ~~~
리플렛에 고창을 빛낸 선배님들로 보정선생님을 비롯한 몇분이 소개되어 있더군요 ㅎㅎㅎ
좋은 정보 감사하구여,,,도산고택 찾으실때,,,저랑 같이 가셔도 좋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高敞翰墨會 회장님께서 직접 연락을 주셔서 작품을 부랴부랴 출품하여 같이 전시하기로 되어있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사진을 볼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