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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3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를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으로,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월13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마르코 2,13-17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면 실질적 무신론자가 탄생한다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한 여자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녀는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얻은 우리나라의 유명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술집 여자와 외도를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견딜 수 없어 뭐 그리 잘난 여자인지 얼굴 한 번 보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꿈에 그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눈이 매우 크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하며 이무석 교수에게 정신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혹시 눈이 작은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무의식적으로 남편이 그 여자가 눈이 크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쌍꺼풀이 없을 뿐 실제로는 눈이 작지도 않고 예쁜 얼굴이었습니다.
눈에 대한 콤플렉스가 생긴 것은 동생 때문이었습니다.
딸 둘인데 자신은 첫째고 둘째가 태어났을 때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아빠가 둘째만 좋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아빠처럼 쌍꺼풀이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녀는 아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동생도 잘 돌보고 공부도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빠는 동생만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아빠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남편에게 강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자존감과 직결됩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얼마짜리라고 가격을 매겨주는 것과 같고 자녀는 그 가격을 믿고 그 가격만큼 살아갑니다.
사랑을 못 받았다고 믿으면 그 떨어진 자존감을 행위로 채우고 극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행위’에 치중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발생합니다.
며칠 째 계속 저의 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드리고 있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인 하느님의 자비를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게 되면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게 되고 그러면 굳이 행동으로 자신을 하느님처럼 높이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지 못하니 이런저런 행동으로 하느님 자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하느님처럼 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에 집중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주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은 무시하시고 죄만 짓는 세리와 죄인들과는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어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되는 것이지 단순한 율법준수에 의해 구원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로마 3,20)
그런데도 자칫 교리를 가르칠 때, 이러저러한 규정들을 잘 지키면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질적인 무신론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 믿음의 공로 외에 더 요구되는 행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바로 죽은 아기들이 선한 행위가 없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또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선행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에서 나오는 이기적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경고합니다.
혹자들은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는 말씀 때문에
믿음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자신이 부모처럼 될 수 있다고 믿으면 곧바로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만약 믿음이 들어왔다면 실천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천은 믿음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지 선행을 해야만 구원받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잘 지킨 것을 주님 앞에서 감사하게 여기며 마치 율법을 잘 지킨 것이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되는 길인 것처럼 믿었습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율법을 잘 지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내가 내 아들을 뭐 하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했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아들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인간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만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릅니다.
그래서 세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라고 말씀하십니다.
행위에 집중하게 만드는 교리교육에서 벗어납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상관없는 구원을 추구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이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로마 11,6) 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옵니다.
행위는 믿음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교리교육의 핵심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3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마르코 2,13-17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
오랜 세월 보육원에서 사목하신 수녀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수녀님이 키우신 한 아이가 주먹 세계의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씩 전화를 준답니다.
“수녀님, 저예요. 힘든 일 없으신가요?
도와드릴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참으로 특별한 상황 앞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답니다.
언젠가 한 건물에 들어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새까만 정장 차림의 어깨들이 입구부터 시작해서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얼굴들도 한결같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사이를 걸어 들어가는데,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조폭 두목쯤 되는 사람 부모님의 축하연 자리였던가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알패오의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데, 그는 세관에서 일하던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들의 삶은 오늘날 조직원들과 유사했습니다.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자릿세 받고, 고리대금업에 손도 대고, 과도한 이자 부과로 사람들 괴롭히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형님’에게 거금을 상납해서 일정 담당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담당구역을 돌며 마음껏 부를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을 그들을 두고 공공연하게 ‘도둑’이라고 칭했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으로 첫손가락을 꼽았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들들 볶아대던지 ‘세리가 다가오면 집의 기둥이 공포에 덜덜 떤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더구나 유다 민족들은 징수된 세금이 식민지 지배자 로마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리들을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로 칭했으며 재판에 증인으로 서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이런 세리의 두목인 레위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어떻게 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가, 하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인선이었습니다.
인간 말종으로 여겨지던 세리, 공공연한 도둑, 매국노 레위에게 당신 구원 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더 놀랄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를 위한 송별식이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조폭들의 파티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당대 내놓으라는 지하 세계 인생들은 다 모였습니다.
참으로 부담스런 자리, 너무나 껄끄러운 자리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완벽하게 그들과 동화되십니다. 한 가족이 되시고, 절친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 때 보여주신 그 지극한 겸손이 예수님 생애 내내 계속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광경입니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격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