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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참고말씀: 출14:1-3,24,25,37,38; 민13:32,33; 수11:21,22; 삼상21:12,13; 삼하8:1; 왕상19:3; 시24:8; 46:10; 50:15; 77:19; 사43:16
읽을말씀: 출14:9-22
주제말씀: 출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첫째, 꼼짝없이 갇혔으면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출14:9,10)
지금 어딘가에 꼼짝없이 갇혀버렸습니까? 앞을 보아도 길이 안 보이고, 좌우를 둘러봐도 뾰족한 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자니 참담하기 그지없습니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도무지 길이 안 보입니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엔가 꼼짝 없이 갇혀버렸으면 무슨 수로 방법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본문을 통해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지금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홍해 앞 광야’에 꼼짝 없이 갇혀버린 상황입니다. 즉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또 뒤에는 파라오가 이끄는 애굽의 막강한 전차부대가 맹렬히 추격하고 있었으니,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상황에 갇힌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출14:9,10)
지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어딘가에 꼼짝없이 갇혀버리고 말았습니까? 지금까지 잘해 오다가 갑자기 나타난 크나큰 난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상황이 너무도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서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하고, 어깨는 축 늘어졌으며 눈동자는 허공을 헤매며, 기도시간은 그만 그 초점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까?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이것은 인생의 중대국면에 찾아오는 불청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개 어느 때에 찾아옵니까? 큰 승리 직후에나 중요한 일들을 앞둔 시점입니다.
이럴 때는 오히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에 두 번씩이 강조된 것처럼,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가만히 서서...”(13절 중) /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절 하) 참고로, 여기서 ‘가만히 있을지니라’는 ‘혀를 물다’, ‘침묵을 지키다’는 뜻으로, 더 이상 불평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며...”(10절 중)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하게 되며,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2절)
기도시간도 온통 원망이나 불안, 비관 일색(一色)이 되고 맙니다.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10,11절)
‘가만히 있는 동안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의 시선(視線)을 옮겨야 합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변경해야 합니까? 직면 중인 문제로부터 하나님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가 문제를 만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시선을 옮긴 뒤에는 또 어찌 해야 합니까? 아예 고정시켜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지금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타이밍으로써, 하나님을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어떻게 풀어 가실지를 지켜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14절)
그러므로 우리도 어찌 해야 합니까? 갑자기 만난 문제들 때문에 꼼짝없이 갇혀버리고 말았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가만히 있기를 원합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 결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둘째, 두려움에 사로잡혔어도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출14:10)
사람은 누구라도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반적인 두려움을 넘어서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전차부대를 보고서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10절)
이와 같은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어떻게 됩니까? 털썩 주저앉아 제자리만 맴돌고 앞으로 한 발작도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우리의 정상적인 판단 능력과 그 기능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건설적인 대안을 찾는 것도, 장기적인 플랜을 세우는 것도 어렵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심한 두려움이 우리의 모든 눈을 닫아버려서 가까운 것만 보는 근시안(近視眼)이 되게 하고 원시치(멀리 있는 것은 보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10절 하) 모두들 주저앉아 죽는다고 우는 소리만 할뿐,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11절 중) /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2절 하) 그 누구도 건설적인 대안이나 현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제시하지를 못했습니다.
혹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불쑥 우리를 찾아온 두려움에 순식간에 사로잡혀버렸습니까? 옆에서 훅 치고 들어온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서 ‘여기서 다 끝장날 것 같고 이대로 망할 것 같은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습니까?
이럴 때에도, 본문이 강조한 바와 같이,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절 하) 즉 현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13절 상)
어째서입니까?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목도할 수 있고,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절 하) 또 두려움의 날이 변하여 기쁨과 평안의 날이 되는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무기력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말지만, 일단 두려움을 극복하기만 하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거인족을 보고 두려워서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고, 골리앗 등을 죽인 다윗이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살기 위해 실성한 사람인척 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2,33) /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삼상21:12,13)
두려움을 극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등과 함께 능히 가나안의 거인족들을 멸절시킬 수 있었고, 다윗 역시 블레셋 족속을 그 발 아래에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수11:21,22) / “그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모성의 굴레)를 빼앗으니라.”(삼하8:1)
셋째, 방법을 알 수 없을 때에도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4)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이리저리 펜대를 굴려 봐도 방법이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흔히 어떻게 됩니까? 이른바 멘탈(mental)이 붕괴됩니다. 즉 자괴감(自愧感)에 빠지고, 비관적(悲觀的)이 되며,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11절 중) 현실도피적(現實逃避的)이 되고 맙니다. 문제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왕상19:3)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진퇴양란의 상황 속에서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넓은 홍해를 헤엄쳐서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추격해오는 바로의 전차부대에 맞서서 싸울 용기조차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물론 그 역시 방법을 알 수 없지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방법을 알 수 없을 땐 가만히 서서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절) 어째서입니까? 우리에게는 방법이 없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는 항상 있으며,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까? 홍해 가운데로 길을 만들어서 인도하신 점입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21,22절) /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77:19)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사43:16)
바다 가운데로 길을 만들어 인도하시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방법으로 이 상황을 멋지게 해결해주셨습니다. 그 때에만 그리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또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우리도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세처럼,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성실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15,16절)
참고로, 하나님은 왜 가만히 있으라고 하십니까? 방법을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도와드리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방법을 가르쳐주시면 그대로 하면 되고,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싸울 줄 모를 때에도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4)
싸울 대상이 분명하고 또 싸워야 하는데, 싸울 줄 모르거나 싸울 힘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도 싸워야 합니까? 아닙니다. 이럴 땐 오히려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로 선수교체를 해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로써,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24:8)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패배할 줄 모르시는 백전의 용사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홍해를 건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스라엘을 추격해오는 바로의 막강한 전차부대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열심히 창과 화살을 날리고 물맷돌로 연신 쳐서 무찔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화살하나 돌 하나 던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대신 싸워주심으로써 모두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즉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도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다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싸우셨습니까?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구름 기둥을 뒤로 옮겨서 애굽의 전차부대가 이스라엘에게 못 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19,20절)
그들의 군대를 홍해 한 가운데서 혼돈에 빠지게 하셨으며,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출14:24,25)
마침내 바다 한 가운데서 그들을 모두 수장시킴으로써 이 전쟁을 끝내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출14:37,38)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싸울 줄 모를 때에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시46:10 상) 즉 가만히 서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절)
어째서입니까? 이때야말로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시간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높임을 받으실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46:10 하)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어딘가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도,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도,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에도, 싸울 줄 모를 때에도 가만히 있습니까? 즉 가만히 서서 오늘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또 싸우시는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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