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2020 겨울
고요한 밤이었다
후암시장 초입이었다
오랫동안 임대되지 않은 빈 가게 앞
진열대의 스테인리스 상판에
사료 봉지니 햇반 그릇이니 물통을 늘어놓고
내가 늦은 건가 이른 건가
아직 오지 않은 고양이 생각을 하면서
고양이 밥을 꾸려 담고 있었다
이름 모를 이여
어쩌면 이름이 필요 없을 이여
나는 당신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으니
얼굴도 없는 이여
인기척에 돌아보니 당신이 비죽이 웃으면서
“좋은 거 담아 선물하세요”하고 했던가
“선물이에요. 좋은 데 쓰세요”라고 했던가
내게 은행 현금봉투 몇장을 내밀었다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한 뒤 더 할 말이 없는 채
얼른 시선을 돌리고 은행 현금봉투를 만지작거렸고
그 짧은 사이 당신은 할 말이 남은 듯 머뭇대다가
시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장을 지나면 쪽방촌이 나올 것이었다
당신은 흐린 구름 같은 잠바를 입고 있었다
당신이 차마 꺼내지 못한 수척한 말을
나는 알아챘어야 했다
당신이 그것밖에 줄 게 없어서
‘WON하는대로
우리WON뱅크’
은행 현금봉투 몇장을 줬을 때
나는 답례를 했어야 했다
우리은행 현금봉투 여섯장
구김 없이 말끔했으니
당신은 그 얼마 전에 우리은행 동자동 지점
ATM 창구에 들렀을 테다
추위를 피해 더위를 피해 간간
사람들을 피해 한밤에난 들렀을 거기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없는 게 많을 당신
통장도 신용카드도 없을 당신
환하게 불 밝혀진
텅 빈 ATM 창구에서
현금봉투를 챙기는 당신을 떠올려본다
뭘 원해야 할지도 모를 것 같은
당신의 슬픈 경제
은행을 나와서 후암시장까지
고깃집횟집장어구이집국수가게만두가게차칸치킨치킨센터
다닥다닥 늘어선 나지막한 건물들
9시가 한참 전에 지났으니
불 꺼져 어두컴컴했을 테다
어떤 식당에서는 당신에게
착한 한끼를 건네기도 했을지 모르는데
그 밤에 당신이 너무 배가 고팠으면
나는 어쩌면 좋은가
우리은행, 이제 내게 예사롭지 않네
외롭고 낮고 쓸쓸한
당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