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음성을 듣기 위해 본 문 : 삼상 3 : 1 - 10
교회에서 많이 듣는 말 중에 헌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풀면 몸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충성하고 봉사한다는 것이죠. 헌신이 많은 교회일수록 성장하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르게 알고 바르게 헌신해야 합니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교회에서 교회 건축을 하다가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헌신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청년 중에서는 안구를 돈 받고 팔아서 교회 건축에 썼다는 청년도 몇 명 있고, 심지어는 장기를 매매해서 헌금을 했다고도 합니다. 저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 각 사람의 몸도 주님의 몸입니다. 그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바른 헌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의 자세를 보면 바른 헌신이 무엇인지, 또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지를 잘 알려주는 본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 당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어떻게 사무엘이 그처럼 패역하고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까?
첫째, 모든 일에 공명정대해야 합니다. 당시에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까? 가장 큰 원인은 당시 최고의 지도자였던 엘리제사장의 잘못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엘리는 자녀 관리를 잘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고, 제단에서 수종을 드는 여자들을 희롱 했습니다. 자녀들이 그러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혼을 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듣고도 엘리는 강하게 야단치지 않고 아주 부드럽게 상투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들아 왜 그랬니? 소문이 좋지 않구나. 백성들이 보니까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라”(삼상 2:22-25절) 그런 식으로 지도자가 가족과 친인척 관리를 못하면 누가 그를 신뢰합니까? 지도자는 매사에 공정해야 하고, 특별히 자신의 가족에게는 더 엄격해야 합니다. 공명정대함은 지도자의 필수조건입니다. 하지만, 엘리제사장에게는 그러한 공명정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지도력의 상실을 가져 왔고, 결국 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막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도자가 바로 설 때 그 공동체에 은혜를 주십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공명정대한 삶을 소망해야 합니다. 작은 일일지라도 공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하고, 가족을 사랑함에 있어 지혜를 갖아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지도자는 교회의 모든 자녀들을 자신의 자녀와 동등하게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써야 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가족에 대한 동물적인 애착이 있기 때문에, 부단히 애를 쓰지 않으면 공평해질 수 없어요.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에서는 손이 안으로만 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또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 아프지만 손을 밖으로 틀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명정대함이란 내 것을 버리고, 내 이기심을 버리고, 내 인간적인 사랑과 자랑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러한 희생과 아픔을 감수할 만한 지도자들이 많아질 때 주님은 그곳에 말씀을 주시고, 은혜도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윗사람에게 헌신하는 사람이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당시 엘리 제사장은 영성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사무엘상 1장 12-14절을 보면 아기가 없어 한 맺힌 한나가 작은 목소리로 간절히 기도하니까 술에 취한 줄 알고 술을 끊으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기도하는 것을 술에 취해 주정하는 것으로 알 정도로 그는 영성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또한 자녀 교육도 제대로 못하면서 제사장이라는 화려한 타이틀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타이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어떤 영화를 보면 볼거리는 많이 있는데 별 내용이 없습니다. 그처럼 볼거리는 있지만 내용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엘리가 그랬습니다. 엘리는 영성이 떨어진 게으르고 나태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이 구절을 보면 자기 처소에 누운 엘리의 안일한 모습과 하나님의 전에 누운 사무엘의 헌신된 모습이 대비가 됩니다. 또한 사무엘이 얼마나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적인 사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사무엘은 자신이 기도하고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엘리제사장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헌신하는 사람 중에 가끔 자기를 높이고, 교회의 어른들을 우습게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신은 자기를 높이는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헌신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바로 헌신 콤플렉스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실 엘리도 젊었을 적에는 사무엘처럼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점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현재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윗사람을 멸시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닙니다.
성도가 결코 자랑해서는 안 될 것은 신앙과 영성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윗사람도 옛날 신화적으로 헌신했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영성과 헌신의 정도는 때에 따라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과 열심이 높아졌을 때, 영적 교만함에 빠지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자기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는 이렇게 성전에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엘리제사장님은 잠만 자!”라고 생각하거나, 영적 우월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훈련 받는 입장에 있으니까 여호와의 전 안에서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더라도 엘리제사장님은 연세도 많으신데 침소에서 편히 쉬셔야지. 제사장님도 젊었을 때는 엄청 헌신했을 거야.”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충성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의 그런 충성스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간밤에 사무엘은 누가 자기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이런 야밤에 왜 불러! 노망 드셨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즉시 엘리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십니까? 왜 그러십니까?”라며 따지듯이 말하지 않고, 겸손하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해서 세 번이나 계속됩니다. 본문 6절과 8절 말씀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나오죠. 그처럼 세 번이나 똑같은 일이 벌어지니까 엘리제사장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사무엘에게 지침을 내렸습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그러자 10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시킨 말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이런 모습들이 사무엘의 충성심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장면을 보면 성도가 어떤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마귀의 음성인지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하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음성을 듣고 자랑에 빠지고, 교만하게 되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우습게 알면 마귀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음성을 듣고 더욱 겸손하게 되고, 더욱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바로 진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이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무엘은 윗사람에 대한 헌신도 잘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윗사람에 대한 헌신은 절대 요소가 아니지만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절대 요소입니다. 결국 누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이면에는 신앙이 훌륭한 어머니 한나의 역할도 컸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헌신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화려한 타이틀이나 과거의 체험이나 전통이 아닙니다. 신앙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헌신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고 헌신하는 성도에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번째 들렸을 때 사무엘은 엘리제사장이 가르쳐준 대로 10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응답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음성을 들려주시고,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울러서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말씀도 귀를 기울여 열심히 들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설교자와 눈과 눈을 마주치고, 지금 설교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알고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설교를 받아 적는 분들이 있습니다. 설교를 받아 적어서 다음에 반복해서 묵상하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받아 적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느 교회에서 한 집사님이 설교 중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설교 시간에 눈을 반짝이면서 밝은 표정으로 목사님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열심히 적고, 다시 목사님을 쳐다보고 또 다시 열심히 적었습니다. 목사님이 신이 났습니다. ‘이제야 저 집사님의 가슴에도 성령의 바람이 불었구나!’ 생각하고, 예배 후에 목사님이 그 집사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오늘 아주 은혜가 충만해 보입니다. 말씀도 열심히 받아 적으시고, 참 훌륭하십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쑥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예? 오늘 종이에 적은 거요? 죄송해요. 목사님, 요새 곗돈 붓고 있는데, 곗돈 받을 날이 다가와서, 곗돈 타면 어디에 쓸 것인가 잠깐 계산하고 있었어요.”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전에 글을 알지 못하시는 시골 할머니들께서는 눈으로 보고 찬송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찬송을 부르다보니 가사를 엉뚱하게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찬송가 502장을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그런데 시골 할머니들은 ‘험곡’이란 말이 뭔지, ‘영광’이란 말이 뭔지 잘 모르니까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태산을 넘어 홍콩에 가도 비가 온 데로 걸어가면....하늘에 영감 하늘의 영감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그렇게 하늘에 먼저 가신 영감님을 생각하면서 찬송을 하니까 얼마나 은혜가 되었겠습니까? 전혀 다른 가사로 은혜를 받은 것이죠.
여러분, 말씀을 바르게 듣지 않고 오해하게 되면, 영적으로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했습니다(호 4:6) 그러므로 성도는 열심히 사모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잘 들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항상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기분 좋게만 들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때로 내게 희생을 요구하고, 때로는 자존심을 철저히 버리라고 하고, 때로는 우리의 소중한 것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무겁고 부담스럽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엄존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오늘 사무엘의 고백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하는 심정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한나가 어렵게 얻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무엘상 2장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사무엘을 드린 한나에게 다섯 명의 자녀를 주셨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결코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냉수 한 그릇의 헌신도 반드시 보상해주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0:42)
사랑하는 ㅇㅇ교회 성도 여러분, 순종과 헌신이 없으면 진정한 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순종하고 헌신하되 바르게 순종하고 바르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어야 합니다. 진실 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공명정대한 삶을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를 존중하고 교회 지도자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는 길을 친히 보여주시고,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의 잔잔한 위로의 음성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