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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에 응축한 시대의 아픔…김창열의 삶과 예술
연합뉴스 기사 송고 : 2021년01월05일 20시14분
강종훈기자
추상미술 거장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 별세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5일 별세한 김창열 화백은 50년간 수행하듯 물방울을 그리고 또 그렸다. 작품에 관해 물으면 "나는 한 가지밖에 없다"고 답했다. 한 가지를 끝없이 파고들었고, 그 한 가지로 세계적인 거장이 됐다.
1972년 검푸른 단색 바탕 위에 투명한 물방울이 떠 있는 '밤의 행사'(Event of Night)를 시작으로 구순이 넘어서까지 그린 물방울은 고인의 삶 자체였다.
김창열은 1929년 대동강 상류 작은 마을 맹산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15세, 모친은 20세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34세였던 조부가 그를 보살폈다.
명필가였던 조부는 어린 손자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당시 배운 천자문은 훗날 물방울 작업에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우등생이었던 김창열은 화가가 되겠다고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에 선언했지만, 어른들은 극구 반대했다.
광복 후 1946년 월남해 서울에 온 김창열은 피난수용소에서 1년 가까이 지냈다. 다음 해에야 먼저 월남한 부친과 극적으로 만났다. 부친은 그제야 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더 말리지 않았다. 이쾌대 미술연구소에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김창열은 검정고시를 거쳐 1949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됐지만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김창열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여동생을 잃고 친구들을 잃었다.
초기작에도 전쟁의 상처가 드러난다. 총을 맞아 구멍 뚫린 형상은 '상흔', 사람이 찢긴 듯한 이미지는 '제사'라는 작품 제목으로 그려졌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방울도 전쟁의 고통과 연결된다. 고인은 물방울의 의미에 대해 "시대의 상처를 내포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총 맞은 육체를 연상시키는 전쟁 직후 작업에 대해 "그 상흔 자국 하나하나가 물방울이 됐다"고 했다.
"물방울은 가장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고 무(無)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 상흔 때문에 나온 눈물이에요. 그것보다 진한 액체는 없어요."
김창열은 폐허가 된 조국을 떠나 1965년 미국으로 갔다. 록펠러재단 후원으로 뉴욕에 머문 4년도 어두운 시간이었다. 변변치 않은 일거리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당시 팝아트만 주목받던 그곳에서 그의 작업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69년 뉴욕보다 다양성이 있었던 파리로 가면서 그는 다시 용기를 얻고 작품 활동에 나선다.
지금과 같은 물방울 그림은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 '살롱 드 메'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세계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물방울을 그리게 된 것은 우연 혹은 운명이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했던 김창열은 프랑스 파리 근교의 낡은 마구간에 머물며 작업했다. 어느 날 아침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담다가 캔버스에 물이 튀었다.
김창열은 "크고 작은 물방울이 캔버스 뒷면에 뿌려지니까 햇빛이 비쳐서 아주 찬란한 그림이 되더라"라고 물방울 작업을 시작한 계기를 설명한 바 있다.
물방울 작업은 50년 가까이 이어졌다. 1980년대부터는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렸고 마대에 한자체나 색점, 색면 등을 채워 넣어 동양적 정서를 살렸다. 1980년대 말부터는 인쇄체로 쓴 천자문 일부가 투명한 물방울과 화면에 공존하는 '회귀' 연작이 이어졌다.
김 화백이 소중히 간직하던 대표작 220점을 기증해 지난 2016년 제주도에 김창열미술관이 개관했다.
개관 기자간담회에서 고인은 평생 매달린 물방울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내가 못나서 계속 그리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3년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도 그는 "물방울이 무슨 의미가 있나. 무색무취한 게 아무런 뜻이 없지. 그냥 투명한 물방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욕심은 그런 물방울을 갖고 그림을 만드는 것이었고 한평생 그렇게 살아왔다"라며 "너절하지 않고 있으나 마나 하지 않은 화가로 후대에 남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냥 물방울"이라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였다. '물방울 화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물방울은 오늘도 투명하고 영롱하게 빛난다.
김창열 Kim Tschang Yeul
출생지 : 평안남도 맹산군(孟山郡)
출생-사망 : 1929년 12월 24일 - 2021년 1월 5일
김창열은 한국 현대 화가로, 1972년부터 제작한 극사실적인 물방울 그림으로 잘 알려졌으며 '물방울 화가'로 불린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앵포르멜 회화와 기하학적 추상화를 제작하던 그는 파리에 정착한 뒤 물방울 그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물방울 그림을 시도했으며, 특히 천자문을 배경으로 한 물방울 그림은 동양의 철학과 정신성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다.
• 활동분야: 유화, 판화
• 시대: 한국 근대~현대
• 주요작품
- 회귀 08010(Recurrence 08010, 2003)
- 회귀 SP 10001(Recurrence SP 10001, 2006)
- 회귀 CPP 060017(Recurrence CPP 060017, 2006)
생애
김창열(金昌烈)은 한국 현대 화가이다. 그는 1929년에 평안남도 맹산군(孟山郡)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부에게 서예를 배웠고 외삼촌에게 데생을 배웠다. 이후에는 경성미술연구소와 이쾌대(李快大)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고, 1949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그는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강제 징용을 피해 월남하여 경찰학교에 지원한 뒤 1955년까지 경찰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고등학교 교사 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미술교사로 일했으며, 1957년부터는 박서보(朴栖甫), 정창섭 등과 한국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한국 화단에서의 앵포르멜(Informel) 미술을 전개했다.
1960년대에 미국으로 간 김창열은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뉴욕(New York)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 League)에서 판화를 배웠다. 그는 1969년에 백남준(白南準)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했는데, 이를 계기로 파리(Paris)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는 1970년에 부인이 될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을 만났다. 김창열은 1972년 파리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 '밤의 행사'(Event of Night, 1972)를 출품하며 유럽 화단에 데뷔했고, 물방울 그림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김창열은 한국, 프랑스, 미국,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전시를 개최했으며,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그는 1996년에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상했고, 2012년에는 한국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17년에는 제62회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부문과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했다. 김창열은 2021년 1월 5일에 향년 92세로 사망했다.
작품활동
김창열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한국 화단의 앵포르멜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두터운 마티에르(matière)를 살려 캔버스에 표현한 추상회화를 제작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그는 미국에서 작업을 하며 당시 미국 화단의 팝아트와 색면회화에 영향을 받아 점차 색면 위에 추상과 구상을 오가는 형태를 표현했다. 그는 이 시기에 옵아트(Optical art) 경향이 드러나는 기하학적 추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제사'(1965)는 물감을 짓이긴 흔적을 통해 전쟁의 상흔을 표현한 앵포르멜 작품이면서도, 점차 색면추상회화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무제'(1969년경)는 입체감이 느껴지는 크고 작은 원 주위로 여러 색상의 곡선들이 겹겹이 둘러싼 형태가 그려져 있어 옵아트와 색면추상의 경향이 확인된다. 김창열이 1970년대 초에 제작한 '현상' 시리즈는 색면 위에 추상과 구상이 오가는 양상을 보여준다고 평가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특히 이 시리즈에서는 색면으로부터 점액질이 밀려나오는 형상이 표현되어서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과 색면추상 및 기하학적 추상 시기를 연결하는 작품으로도 꼽힌다.
김창열은 1972년부터 극사실주의적인 물방울 그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밤에 일어난 일'처럼 하나의 물방울만 그리기도 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물방울'(1978)처럼 자잘한 물방울들이 화면을 채운 모습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물방울이 맺혀 있는 모습은 물론 흘러내리거나 스며드는 상태까지 다양하게 표현해냈다. 마포, 목판, 신문 등 다양한 재질의 화면 지지대를 사용하기 시작한 김창열은 1970년대 중반에 '휘가로'지를 이용한 작업으로써 화면에 문자를 등장시키기 시작했고 작품에 그가 직접 문자를 쓰기에 이르렀다. 그가 1980년대 중반부터 제작한 천자문 배경의 물방울 작품들은 동양의 철학과 정신성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다. 비교적 채도가 낮은 배경을 사용하던 김창열은 2000년대부터 밝은 하늘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의 배경을 시도하기도 했다. 김창열은 회화 외에도 물방울을 주제로 삼아 물방울 모양의 유리주머니에 물을 담고 쇠줄로 매달아 늘어뜨린 '묵상'(2004), 유리구에 물을 담고 쇠로 만든 받침대에 올려놓은 '의식'(1993) 등의 설치미술도 제작했다.
평가
김창열은 물방울을 사실적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이를 소재로 재질, 형태 등에 변화를 주며 다양한 시도를 했고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물방울 작가'로 불린다.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은 회화의 평면성 문제에 도전하고 동양의 정신성을 드러내기도 하며 국내와 해외 미술계에서 다양한 주제의 미학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물방울 그림 외에도 그가 제작한 앵포르멜 회화, 기하학적 추상화 등은 광복 이후 한국 현대 화단의 경향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미술가 김창열
영롱한 물방울을 그리다
김창열만큼 '작품 브랜드'가 파워풀한 화가도 드물다. 김창열은 '물방울의 화가'라 불린다. 김창열이라는 이름보다 물방울 그림을 아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김창열은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의 '물방울 미학'은 국제 화단을 가로 흐르며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약력
1929 평안남도 맹산 출생
1948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수학(~1950)
1957 한국현대작가초대전 출품(~1964)
1961 제2회 파리 비엔날레
1965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브라질
1966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 판화 전공(~1968)
1972 카뉴국제회화제
1972 살롱 드 메 (파리)(~1976)
1976 에콜 드 서울 출품(~1992)
1984 바젤아트페어 출품
1993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1996 프랑스 문화훈장 수훈
2004 프랑스 주드폼 국립미술관 개인전
2005 중국국가박물관 초청 개인전
2009 표갤러리 개인전
2021 별세
캔버스에 뿌려진 물방울의 영롱함에 매료돼 40년간 물방울 그림
“(…)옛날에 달마대사는 중처럼 벽만 쳐다보고 앉아 9년 만에 득도해탈(得道解脫)해서 부처님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미친놈처럼 캔버스를 마주하고 앉아 물방울 그리기로 40년을 보냈어.” 그렇게 해서 탄생한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을 보라! 어쩌면 저렇게도 희한한 물방울이 있을까! 어쩌면 저렇게도 진짜 물방울 같을까! 물방울의 모양새와 표정은 또한 얼마나 다채로운가! 구슬처럼 영롱하게 무리를 지어 방울방울 매달려 있기도 하고, 탁 터지다 만 듯하다가 때로는 터져 흐르다 그대로 멈춰 있다. 곧 사라질 듯한 순간을 붙잡고 있는 그림, 존재와 부재의 아슬아슬한 경계, 그 짜릿한 긴장으로 내모는 그림이다. 그럼에도 그 물방울 하나하나에는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고, 어떤 아련한 추억을 불러내는 따뜻한 정감이 흐른다.
김창열은 물방울 작품을 40년 동안 그려왔다. 물방울이 앉아 있는 표면(물질)은 캔버스에서 신문지로, 다시 모래에서 나무판으로 변화했다. 그 변화에 따라 물방울은 ‘천의 얼굴’을 드러냈다. 물방울 모양의 유리병이나 투명한 입체로 설치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창열은 왜 하필 물방울을 그리고 있는 걸까? 그가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파리에 정착한 지 3년째인 1972년부터다. “어느 날 캔버스에 뿌려본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걸 봤어.” 그것이 물방울 제작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생의 예술 화두가 된 물방울의 탄생은 좀더 근원적인 뿌리가 있을 것이다. 물방울은 [상흔], [제사] 등과 같은 1960년대의 뜨거운 추상, 앵포르멜작품과 1970년대의 [현상] 같은 작품과도 연관이 있다. 구멍이나 날카롭게 갈라진 틈, 그리고 구멍에서 흘러나온 액체 이미지들이 물방울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진짜 물방울이 아니다…한국사의 상처를 담고 있는 '물방울 미학'
“물방울은 유년시절 강가에서 뛰놀던 티 없는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고, 청년시절 6.25 전쟁의 끔찍한 체험이 담겨 있기도 하지. 전쟁이 끝나고 나니 중학교 동기 120명 중에서 60명이 죽었어. 나이가 많아야 스물이야. 앵포르멜 작품에서는 총에 맞은 육체, 탱크에 짓밟힌 육체를 상징적으로 그리려 했던 것이지. 그 상흔이 물방울 그림의 출발이 되었어.”
김창열의 물방울은 20세기 한국사를 관통하는 고통과 상처의 원형이 진화해 온 형태다. 물방울 그림이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방울이 한국인들의 기저에 흐르는 집단적 기억의 어떤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독창적인 발상과 완벽한 회화 방법이 매력이다.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은 진짜 물방울이 아니다. 그가 그린 물방울은 현실의 물방울이 아니라 ‘착시현상’이다. 바탕을 칠하지 않는 캔버스에 그린 물방울에서 우리는 금방 스며들거나 배어 나오는 듯한 착시현상을 본다. 물방울 그림은 캔버스 마대라는 물질적인 현상과 물방울의 착시현상(환상)을 중첩시킨 것이다. 화가이자 비평가인 이우환은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을 ‘물체와 관념의 조화’로 규정한 바 있다. 마대를 무시하고 물방울을 강조하면 그림이 되고, 반대로 그림보다 마대를 강조하면 오브제로 바뀌는 절묘한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마구간 화실'에서 물방울을 맺다
김창열은 일찍이 국제무대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1961년에는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1965년에는 제8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출품했다. 1966년에 김창열은 미국길에 오른다. “한국을 떠나야 한다. 이제 내 작품은 국제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물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런 절박한 생각을 가졌어. 원래 나는 프랑스 유학을 꿈꿨어. 파리 땅만이라도 밟아 봤으면 좋겠다고 꿈을 꿨는데 록펠러재단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던 거였어. 한달 동안 30개의 미술관, 학교를 견학했지. 이 여행이 세계 미술계의 도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 같아. 그 뒤 미국에 계속 체류하면서 넥타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운 좋게 일년간 다시 록펠러재단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어. 장학금을 아끼고,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럽·이집트·그리스·인도 여행을 계획했지. 그런데 결국 유럽에 머물렀어.”
1969년부터 김창열은 파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김창열의 작업실이자 생활공간은 파리 남쪽에 있는 팔레조였다. 여기에서 이른바 ‘마구간 화실’ 생활이 시작된다. 김창열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면 이 마구간 화실에서의 가난과 결핍이 거론된다. “마구간을 작업실로 썼어. 콘크리트 바닥에, 벽은 흰 페인트 그대로고, 문은 있으나마나 바람이 숭숭 들어왔어. 들고양이들이 제 집처럼 뛰어다니던 곳이었어.” 그러나 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김창열에게 새로운 희망이 찾아왔다. 인생의 반려자 마르틴느 질롱(Martine Jillon)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또한 이 마구간에서 김창열의 작품 화면에는 마침내 영롱한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1973년 김창열은 파리에서 물방울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비평가들의 격찬이 이어졌다. “물방울들은 보기 드문 최면의 힘을 지니고 있다.” “정지된 시간과 불변하는 세계의 이미지, 노자의 사상이 담겨 있는 이미지들이 주조를 이룬다.” 2년 뒤 1976년에는 물방울 그림을 처음으로 한국에 선보였다. 그 해 도쿄화랑에 이어 서울의 갤러리현대(당시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은 개막 전에 출품작품이 모두 팔리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국 미술시장에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 물방울 그림의 인기몰이는 이미 이때부터 불이 붙었다.
거장 이쾌대 화백의 수제자로 그림 수업"그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
김창열의 고향 맹산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300리 떨어진 곳으로 1천 미터의 고산지대다. 대동강 상류여서 물이 깊고 맑은 지역이다. “할아버지하고 정이 깊었지. 천자문을 배우면서 붓글씨를 쓰게 되었어. 할아버지께서는 명필이어서 인근 지역의 비석 글씨를 쓰던 분이었지. 글씨를 배우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동그라미를 그렇게 잘 그리느냐’고 칭찬해 주시니까, 나는 신이 나서 신문지가 새까맣게 될 때까지 글씨를 써 나갔어.” 김창열이 1980년대부터 그리기 시작한 한문과 물방울의 조합 [회귀] 시리즈는 바로 붓글씨를 즐겁게 써 내려가던 이 유년시절로의 동경,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붓글씨라는 게 사실은 그림이야.” 김창열은 서화이명동체(書畵異名同體-글씨와 그림은 하나)라는 동양의 예술론을 작품으로 구현했다.
김창열은 평양의 광성고보를 다니면서 외삼촌의 영향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고보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새 나라, 새 시대에 걸었던 벅찬 기대와 달리 세상은 이미 격동과 혼란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창열은 반공주의자로 유치장 신세를 지는 등 이데올로기의 사슬에 시달리다 1946년에 월남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시작한다.
김창열은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 이쾌대(1913~1965)가 운영했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나는 그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 이쾌대 선생은 나의 유일한 스승이야.” 이쾌대는 6.25 때 북으로 건너간 이후 정치적 금기의 대상으로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월북작가들의 해금조치 이후 1991년 신세계미술관 회고전에서 극적으로 부활했다. 김창열은 이쾌대의 수제자였다. 김창열은 검정고시를 거쳐 1948년 서울미대에 입학했다. “나는 학교에서 성분이 나쁘다고 낙인이 찍혔어.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이쾌대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어.”
김창열은 대학 2학년 때 6.25전쟁을 맞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민의용군에 강제 입대한 김창열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 경찰학교를 졸업했다. 휴전이 되자 김창열은 서울의 경찰전문학교에서 근무했다. 이 때 김창열은 도서주임을 맡아 일본에서 화집이나 미술잡지를 구입해 볼 수 있어, 당시 세계미술을 풍미했던 앵포르멜의 흐름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또 학교 교실에 아틀리에를 마련해 작품 제작을 병행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김창열은 앵포르멜 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그는 1961년 경찰 생활을 그만 두고 서울예고 교사로 근무했다.
팔순 노화가의 예술 여정"스님이 염불을 외듯 물방울을 그린다"
현재 김창열의 파리 작업실은 몽파르나스에 있다. 몽파르나스는 예로부터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이방인 예술가들의 집결처였다. 김창열의 파리 체류 40년은 뛰어난 예술 영혼들과의 만남이었고 그들과의 불꽃 튀기는 대결이었다. 그는 2004년 프랑스 국립주드폼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한국작가로는 1997년의 이우환에 이어 두 번째다. 주드폼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연 작가는 곧 세계적인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라 평가해도 좋다. 또한 김창열은 남불 드라기냥 작업실에서는 주로 대작을 제작한다. 번잡한 파리 도심과는 환경이 다른, 절간 같은 곳이다. 최근 김창열은 서울 평창동으로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
팔순 노(老)화가의 예술 여정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절에 가면 스님들이 마당을 쓸고 물을 뿌려요. 그게 일종의 정화행위지. 마치 스님이 염불을 외듯 나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이야. 농부가 밭에서 씨 뿌리고 수확하며 일하다가 죽듯이, 그렇게 그림 그리다 죽는 거잖아. 여한이 없어요.” 이미 여러 논자들은 김창열의 작품을 선 불교나 도가사상 등 동양사상과 결부시킨 바 있다. 그래서 김창열에게 따라붙는 수사가 구도자다. 화가 김창열은 바야흐로 달마대사의 득도나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일까?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킨 공(空)의 세계, 무(無)의 세계!
[물방울 ABS N°2], 1973,
캔버스에 유화 물감, 195×130cm,
샘터화랑 소장
[회귀 SNM93001], 1991,
마에 먹, 유화 물감, 300×195×(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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