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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1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창세기 32,23-33 마태오 9,32-38
추수꾼은 ‘기(氣)’를 살려주는 이들
‘오리지널스’의 저자 애덤 그랜트가 인터넷 안경 사업 공룡이 되어버린 ‘와비파커’ 설립자들에게
투자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왔던 이들이 학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업에 실패하면 취직할 곳들을 이미 마련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오프라 윈프리까지 모두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일에 뛰어든 것에 비해 열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와비파커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인 닐은 애덤 그랜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안을 마련해놓았어요. 잘 안될 경우를 대비해서 졸업 후에 일할 직장을 구해놓았어요.
제프도요. 데이브도 대안으로 여름 동안 인턴십 두 개를 확보해놓았고, 전에 다니던 직장으로 돌아가는 얘기도 진행되고 있어요.”
실패할 것을 예상해서 뒷일까지도 다 준비해 놓은 이들에게 누구도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애덤 그랜트도 열정이 없는 이들에게 투자하지 않았고, 이것이 평생의 가장 큰 후회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재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덤 그랜트는 이때 깡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덤비는 이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氣)’입니다.
“창업할 때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만두는 게 나을까?”
경영 연구자 조지프 라피와 지에 펭은 5,000명을 추적 조사한 결과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던 위험 회피적 사람들, 그러니까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이 직장을 바로 그만두고 창업한 이들보다 실패할 확률이 33%나 낮게 나왔습니다.
와비파커 창립자들과 더불어 ‘패스트컴퍼니’가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기업 목록에 오른 기업들을 운영하는 창업자들은 창업을 한 뒤에도 어느 정도는 계속 직장을 다녔다고 합니다.
나이키 공동 창업자인 필 나이트는 신발을 팔기 시작한 이후에도 5년 동안 회계사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첫 번째 애플 컴퓨터를 발명한 스티브 위즈니악은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창업한 이후에도 본래 다니던 휴렛팩커드에서 일하며 1년간 겹벌이(투잡)를 하였습니다.
구글 창업자들은 사업이 성공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학업에 방해가 될까봐 헐값에 구글을 팔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사실 빌 게이츠도 하버드를 중퇴하고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자신의 프로그램을 팔았고 그 사업으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을 때 휴학을 한 것이었습니다.
“기가 살았네!”라고 말할 때, 이 ‘기’는 열정을 내가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입니다.
이 기가 살아있어야 무엇을 해도 성공할 확률이 큽니다.
워런 버핏은 항상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고 10년 이상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에 투자합니다.
그래야 기가 살기 때문입니다.
백종원씨는 우리나라 소규모 식당을 창업하는 사람이 인구에 비해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상태로 창업하기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창업을 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은 직장을 가진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잃거나 직장이 없어서 생계수단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꼭 성공해야만 하니 사람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용당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태로 장사를 하니 사람들은 좋은 ‘기분’을 느낄 수가 없어서 그 가게에 가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기’가 없이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실패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아야 기가 삽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은 이미 빠져나갈 굴을 파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감옥 생활이 감옥 생활이 아니고 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 사람이 탈출하지 못하게 잡을 정도로 그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빠져나갈 구멍’이 ‘기(氣)’인 것입니다.
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거나 실패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마치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고아처럼 이 일이 실패하면 인생이 끝이라고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기가 꺾이면 불안해지고 그러면 무엇을 해도 안 됩니다.
작은 방에 아기를 혼자 놓아두면 아무리 장난감이 많아도 아기는 엄마를 찾으며 웁니다.
그러나 엄마가 들어가면 아기는 엄마는 본척만척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바쁩니다.
엄마가 있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기가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말하는 ‘수확할 밭의 일꾼들’은 바로 이 기를 살려주는 이들입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하느님께서 우리 등 뒤에서 지켜주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믿음을 주는 이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마태오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분(예수님)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일꾼들은 바로 기가 꺾인 이들에게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게 해줄 수 있는 목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해지면 안 되고, 자녀가 실패하면 안 되고, 가족이 병에 걸리면 안 되니 기도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목자는 좋은 추수꾼이 아닙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면 기가 꺾입니다.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참 추수꾼은 이 세상에서 다 잃어도 괜찮다는 믿음을 주는 목자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목자여야 합니다.
이 믿음이 신자들에게 기를 북돋아 줍니다.
기가 꺾인 신자들이 없도록 기를 살려주는 목자들이 많이 나오도록 기도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1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마태오 9,32-38
서로서로 잘 좀 봐줍시다!
나이가 들어가면 주로 안 좋은 것들만 많아지는 것 같지만, 나이듦의 은총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혈기왕성할 때의 날카로웠던 비판적 시각이 한풀 꺾입니다.
젊은 시절, 선배들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저렇게 사시나?’ 했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제가 바로 똑같은 이유로 손가락질받는 선배가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했었는데, 이제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늘 아래 별일들이 다 생기지.”하며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봅니다.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집니다.
이웃들의 심각한 허물 앞에서도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며 여유를 지닙니다.
그렇게까지 팍팍하게 살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게까지 아등바등 살 일이 아니었는데, 그렇게까지 까칠하게 대할 필요가 없었는데,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후회가 앞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녕 중요한 일은 이웃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지니는 일입니다.
다들 힘겹게 인생길 걸어가느라고 죽을 고생들인데, 잘 좀 봐주는 일입니다.
결국 이웃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 이웃들을 향한 배려, 이웃들을 향한 동정심, 결국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을 지니는 일이 이웃을 살릴 뿐 아니라 나 자신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목자 없이 살아온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 곧 측은지심을 지니십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심각한 병고나 상처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분의 측은지심을 불러오며, 더 나아가서 그분의 자비와 구원을 불러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됩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는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심, 절절한 측은지심으로 인한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작음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작아지는 우리의 모습에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작음에 감사하고, 가치를 부여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 순간 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처벌하신다면 이 세상에 온전히 남아있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늘을 찌르는 우리의 잘못과 허물과 실수, 방황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넉넉한 웃음으로, 안쓰러운 시선으로, 크나큰 측은지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가 치유되었다면 하느님의 측은지심으로 치유되었음을. 우리가 절망스러운 상황을 딛고 일어섰다면 하느님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일어선 것임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하느님의 측은지심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2023. 7. 11. 화)(마태 9,32-38)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놀라기만 하고 믿지 않는>
“그들이 나간 뒤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마태 9,32-34).”
이 이야기와 많이 비슷한 이야기가 뒤의 12장에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시자, 말을 못하던 그 사람이 말도 하고 보게도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모두 질겁하며, ‘저분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신가?’ 하고 말하였다.
바리사이들은 이 말을 듣고,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2,22-24).”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께서 장애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라는 말은, 실제로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놀라서 한 말입니다.
그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12장에 “너희의 제자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12,27).
당시에 ‘구마자’로 활동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도 실제로 마귀들을 쫓아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만이 마귀를 쫓아내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셨고, 유대교 구마자들은 하느님께 청해서 쫓아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저분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신가?” 라는 말도, 그냥 놀라서 한 말이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두 이야기에 모두 나오는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저것은 속임수다.” 라는 뜻입니다.
<“마귀들이 예수와 한편이 되어서 쫓겨나는 척 했을 뿐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셨다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인정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27장에 바리사이들과 사제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기꾼’이라고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마태 27,63).
바리사이들과 사제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사기꾼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긴 했어도 마귀를 쫓아낸 일 자체는 인정했다고 해석한 이가 있는데,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0,37-38).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일을 부정하면서 속임수라고 말한 것은, 또는 “예수는 마귀들과 한편이다.” 라고 말한 것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들이 바라는 대로 말한 것입니다.
결국 바리사이들 자신들이 마귀들 편에 선 것이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믿는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믿는 이유들을 아주 많이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고,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해서,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 라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5-38)”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활동을 간단하게 요약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짓눌려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억압과 착취가 없을까?>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해서,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40).”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성직자들도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가 다가오는데, 구원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적다.”로 해석됩니다.
<당신을 도와줄 협력자가 적다고 한탄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노력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일꾼으로서 첫 번째로 할 일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다음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일하시는
‘주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