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
조선 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으로 문종 때 전옥서로 개칭하였다.
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다.
형조 예하에는 전옥서(典獄署) · 장예원(掌隸院)의 두 관서가 있었는데, 전옥서는 중부 서린방에 있었으며,
그 업무는 옥수(獄囚)를 관장하는 것이었으며, 장예원(掌隸院)은 공조 남쪽 서부 적선방에 있었으며,
그 업무는 노예의 장부 · 소송관계 등이다.
전옥서(典獄署)는 개국 초부터 영 · 승 · 사리 등의 관원을 두고, 죄인의 옥수(獄囚)를 맡아하던 관서로서 전옥과 함께
중부 서린방 즉 지금 서린동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그 부근에는 전옥동 · 전옥계 · 전옥전동 · 전옥후동 등의 동(洞) · 계명(契名)이 생겨 전하였다.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지만 때에 따라 의금부나 육조,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인 왕족이나 양반, 관리들도 수감되었다.
전옥(감옥)과 함께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라는 중부 서린방(서린동)에 설치하였다. 당시의 전옥은 기결수(旣決囚, 이미 재판을 통해 형이 결정된 죄수)를
감금하는 경우가 사형 죄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고, 우선 피의자를 수감하여 공판이 있을 때 압송하고,
판결이 나면 유형(流刑) · 도형(徒刑) · 장형(杖刑) · 태형(笞刑) 등으로 구분하여 처벌하였다.
전옥서의 옥사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남옥과 여옥은 각각 담장이 둘러져 있고
각 담장에 출입문이 있었다.
또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분리 수용하도록 하였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관검 등이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강완숙 골롬바, 최필제 베드로, 김현우 마태오 등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기해박해 때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형조에서 심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4개월 동안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다.
병인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장운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 등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전옥서 터 표지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에 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중에는 전옥서에서 강완숙 순교자의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같은 날 9명의 순교자가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망나니의 칼 아래 쓰러졌다.
이 영광스러운 무리의 선두에는 이미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적이 있는 강 골룸바가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옥 안에서 그녀의 사도직을 계속하였고, 재판관들 앞에서까지 공자와 이 나라의 다른 철학자들의 글을 근거로
천주교의 신성함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증명해 보였다.
관리들도 감탄하여 그녀를 '유식한 여인', '유일무이의 여인'이라고 불렀으며, 기가 막힌다고 말하곤 했는데....."
◆ 리델의 <옥중기>에 기록된 서린옥(瑞麟獄)
종로 네거리 종각 앞에 있던 의금옥이 양반 감옥이라면, 서린동의 전옥서는 상민 감옥이었다.
서린옥으로 불렸던 이 전옥서의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형무소장실이라 할 사령청(使令廳), 그리고 서리방(書吏房),
주부방(主簿房)이 잇따라 있고 서리방 맞은편에 죄수용 주방이 있었다.
그 안쪽으로 펼쳐진 감옥 구역은 높은 돌담으로 둘러쌓은 원옥(圓獄)과 그 뒤켠에 부군신(府君神)을 모시는 신당,
그리고 옥졸들의 숙직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전통 감옥이 원옥인 것은 소수의 옥지기로 감시가 가능하다는 장점과 좁은 감방을 옥외로 확대시키는 공간 이용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을 게다.
원옥의 판자문을 열고 들어서면 장방형의 동서 두 옥사가 나오는데, 동쪽 것은 남옥(男獄), 서쪽 것은 여옥(女獄)이었다.
옥사의 하반(下半)은 두꺼운 판벽이고, 상반(上半)은 빙지목(憑支木)을 촘촘히 질러 통기가 되게 했다.
물론 감방에 누워 해가 가고 달이 가는 것도 그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죄수들은 목에 칼을 쓰거나 발에 차꼬(足枷)를 찬채 옥방을 나와 원옥 안쪽에서 볕을 쬘 수가 있었다.
죄질에 따라 세 칸에 갈라 넣는데, 하나는 강도 등 흉악범이요, 다른 하나는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빚쟁이, 좀도둑 들이고,
다른 하나는 천주교도 같은 사상범이나 삼강오륜을 어긴 윤상범(倫常犯)이었다.
“강도, 절도 감방은 주야 없이 차꼬를 차고 있어야 하며, 매 맞은 장독으로 살이 썩은데다가 굶주림이 겹쳐 살아있는 시체들 같다.
기동을 하지 못하면 살아 있는데도 병사했다 보고하고, 시체방에 유기하고 죽으면 야밤에 쓰레기터에서 소각시켜 버린다.”
한말 이 감옥에 갇혔던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옥중기>의 한 대목이다.
부패 관리나 빚쟁이 감방은 사식이나 돈이 들어오고 가족과의 면회도 허락되나,
천주교도나 윤상범은 차꼬만 채우지 않았을 뿐, 모든 측면에서 강력범의 감방과 다를 것이 없었다.
기해박해(1839) 때 순교자인 김효임, 김혜주 자매는 갖은 혹독한 고문에도 배교를 하지 않자,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굶주린 늑대들이 우글대는 강도뢰(强盜牢)에 이감시키는 고문을 가하고 있다.
감방이 만원일 경우는 복판에 새끼줄을 쳐놓고 양쪽에 나란히 누워 발을 새끼줄에 얹어 입체적 잠을 자게 했다.
그럼 발을 뻗는 공간이 절약되기 때문이다.
갇혀 있으면서도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육신을 구속받는 옥구(獄具)도 다양했다.
그 옥구에는 목에 거는 칼(枷)과, 나무 수갑이라고 할 수 있는 추(木+丑), 그리고 나무 족갑이랄 차꼬(足枷),
그리고 목을 매어 두는 수쇄(首鎖), 손을 매어 두는 수쇄(手鎖), 발을 매어 두는 족쇄(足鎖)가 있고,
그 쇠사슬 끝에 매어 두는 쇳덩이를 요라고 했다. (중략)
서린옥 감방의 동쪽 끝에 사형 집행실인 교수방이 맞붙어 있었는데, 대들보에 걸려있는 목조임 끈이 교수방의 판문(板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
교수방에서 죄수의 목을 걸어 놓고 판문 밖에서 그 끈을 끌어당김으로써 처형했던 것이다.
‘4명의 옥졸이 교수 끈을 마치 뱃사람들이 돛을 감아올리는 시늉으로 시시덕거리며 잡아끈다.
처형이 끝 난지 두어 시간쯤 후에 옥졸이 판문 틈으로 속을 들여다보고 아직 발끝이 꿈틀거린다하고 비죽비죽 웃으며 말한다.
이 처형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진행되었다.
밤이 되면 이 교수방의 문이 열리게 마련인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감방의 죄수들은 모두가 침을 세 번씩 뱉는 것이었다.
처형당한 원귀(怨鬼)가 붙지 않게 하기 위한 주술적 예방 행위라 했다.
특히 교수 방 가까이에 앉아 있던 죄수는 3분 가까이 침을 계속 뱉고 있었다.’
(리델의 <옥중기>에서) [자료 : 600년 서울, 조선일보 1991. 6. 25]
■ 순교자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