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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 8-10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진리를 등뒤로 던져버린 사람은 그 자신 안에서 진리를 억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안에 거하는 바 진리도 억압하게 되는데 가인이 아벨에게 행하는 일이 그런 종류의 일입니다.
1. 본문 8절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입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이 대화를 일반적인 것으로 이해하며 마치 딴 마음을 품고 자기의 화난 것을 감추면서 형제의 우애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롬은 사용된 그 말은 ‘자, 우리 밖으로 나가자’ 하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그 위선자가 품고 있는 악한 딴 마음을 간략하게 책망하였다는 식의 설명에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친숙한 표현으로 말함으로써 무서운 살인을 저지르는 기회가 오기까지는 그래도 형제적인 의견일치의 양상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에서 위선자들은 자기들이 위선적인 우애로 대화를 걸어올 때보다 더 두려운 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대로 거침없는 난폭으로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되면 갑자기 평화스런 표정으로 가면을 뒤집어 쓰고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야수적인 짐승들처럼 처신하고 있는 자들이 사람들과 정직하게 우정의 신뢰를 갖게 되리라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모세가 가인이 비록 하나님에게서 책망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자기의 동생과 은근히 겨루고 있으며 그래서 그가 하는 이 말은 전에 일어났던 일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마음 속에다 그런 악한 감정을 계속 지니고 있지 않았으나 동생에 대하여 비난하면서부터 그런 감정이 폭발하게 된 것이며 동시에 화를 내며 자기의 제사가 인정받지 못한 원인을 그에게 덮어 씌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2)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 라는 말씀은 여기서 우리는 비록 가인이 집에서는 자기 동생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그것을 토로했지만 이제 들에서는 그 자신을 불태우고 있는 분노가 완전히 마귀적인 방법으로 가리워져 있어서 아벨은 전혀 사태가 더 악화되어 가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가인이 복수하는 것을 적당한 시간에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악으로 가득 찬 이 한가지 행동은 사람들이 악으로 마음을 강퍅하게 할 때에 사단이 그들을 재촉하여 결국에 가서는 인간들의 외고집이 최고의 형벌을 받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2. 본문 9절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 아벨에 관하여 묻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자들은 모세가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교훈의 위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 즉 은밀한 영감과 특별한 방법으로 그 존속 살인자를 그분의 법정으로 소환하고 있으니 마치 하늘에서 천둥을 치는 것처럼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죄에 대하여 인증하고 계신다는 교훈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고하게 주장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 오늘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처럼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들에게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성도들 가운데 버림받은 아들들에게도 그분의 심판을 나타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6장 8절에 볼 수 있는 것처럼 천사가 교회에서 떠나와 숲속에 있는 하갈에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양심에 대하여 조용하게 검토하시면서 그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은 했겠지만 사실은 내적으로 애태우며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이 결론을 지어야 될 것입니다. 즉 그가 단순히 외적인 인간의 소리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심문을 받았으며 그래서 그가 직접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흔히 양심의 가책이 우리가 저지른 죄들을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게 하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그런 내적인 감각으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 확증을 받게 되는데 그 내적인 감각이 바로 하나님의 특이한 심판대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재판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은 자들은 가인의 예대로 전철을 밟아서 그들의 외고집에 집착하지 않도록 경성해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발길질하는 격이며 그분의 성령을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상을 추방시켜 버린다면 그런 무서운 대역의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니 그런 사상은 회개에 이르게 하는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전의 죄에다 그런 외곡된 사상이 부가되어 자의건 타의건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느끼도록 강요받고 있는 자라도 아직까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인류의 공통된 잘못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인간의 타락성이 얼마나 막대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확증되고 정죄될 때에도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대심판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조소를 하며 또는 화를 내는 것을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무감각성은 이만저만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큰 죄를 지었으면서도 도리어 지독하게 하나님의 질책을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서는 그가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동일한 일들이 날마다 모든 악한 자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하여 변명하는 일에 아주 재치 있게 갖다 끌어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휘감기는 미궁에서 엉키고 성켜서 악한 자가 그들의 범죄에다 하나님에 대한 고집불통인 경멸성을 추가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외고집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항하여 버티어 낼 수 있을만큼 충분히 견고하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마음 속 은거지인 깊은 곳에 그들 자신을 감추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언제나 마치 뜨거운 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은밀하게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앞 못보는 외고집으로 그들이 자신들을 무정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위력은 분명하게 감지되고 있으니 그 위력이 쇠처럼 단단한 인간의 마음 속까지 뚫고 들어가서 내적으로 그들이 자기 죄들을 심판하는 재판자가 되게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력은 그것이 강요하고 있는 죄의식을 말살시키려고 그렇게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며 그 상처의 흔적이나 흉터를 남기지 않으려고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지독하게 반항심을 가지고 자기의 동생의 생명을 지키는 자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추방시키려는 강력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와 같은 트집으로 빠져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즉 그가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은 자기는 죽임을 당할 동생에 대하여 설명할 하등의 의무도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고 빠져 나가려 합니다. 자기를 돌보라고 하는 어떤 명령도 받지 않았다고 그는 발뺌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0절은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가인이 그렇게 발뺌으로 전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분은 이번에는 보다 다그쳐서 재촉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그의 죄책에 대하여 그의 내키지 않는 고백을 억지로 끌어내려는 것입니다. 어떤 류의 고문이나 고통을 주어도 죄악을 행하는 자에게 그처럼 압박을 가하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음성의 벼락이 효력을 발휘하여 가인이 혼동되어 어리둥절한 가운데 땅에 거꾸러지게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선언하고 계시는데 그 일을 바로 그가 했다는 사실이며 그가 범죄의 잔악성을 더욱 가증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사람의 인격에서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내기를 원하고 있는 자들에게 내려질 결과가 얼마나 불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들을 감찰하시는 그분은 그들의 범죄를 시간을 들여서 조사하는 것을 오랫동안 반복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한마디 말씀으로 그분이 입건하시는 자들을 호되게 호통치시며 그것으로 만족한 효과를 거두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정죄하시는 면에도 넘치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변호인들은 먼저 그 사실을 부인하면서 변호를 전개하고 나섭니다. 그리고 사실이 부인될 수가 없는 처지에서는 그 사건의 정상 참작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인은 이 두 가지 변호에서 모두 축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 가지를 선언하고 계시니 사람을 죽인 그의 죄에 대하여 그리고 동시에 그 범죄의 잔악성을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사건의 예로 경고를 받고 있으니 곧 핑계들이나 다른 데로 피하려 하는 다른 구실들은 일단 죄인이 하나님의 법정에 소환되면 그것들이 아무리 산더미같이 많이 쌓인다고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한갓 무가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4. 본문 10절 하반절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들의 모든 행동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비록 사람들은 사람들이 범죄 했을 때 아무도 보지 못하고 고발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그분은 다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너무 아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혐의가 없는 무죄한 자가 피를 흘리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분은 경건한 자가 살고 있는 동안과 또한 죽은 후에까지도 그들을 돌봐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판자들은 자기들에게 고발하는 자가 없으면 잠이나 자고 있는 것이 상례이지 않는가.
그러나 피해를 입은 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라도 가해자에게 형벌을 내리시도록 하나님께 호소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사람에게 얼마나 놀라운 그리고 달콤한 위로가 되는 일입니까? 선한 자들은 정말로 부당하게 괴롬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묵묵히 견디어 내는 그들의 고통들이 저절로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견디어 내며 괴롬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는 하나님께서 그 복수를 해주신다는 것을 듣고 그렇게 참아 가는 것입니다. 아벨은 목이 잘려서 죽었거나 그밖에 어떤 죽음을 당했든지 간에 그 죽음을 당할 때에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그의 핏소리가 웅변가의 웅변보다 더 열렬하게 하나님께 호소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어떤 사건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묻혀서 은밀히 감추어지고 말았다고 안심하는 사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억압과 침묵이 언젠가는 나타나 기어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야 맙니다. 이 위로는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가장 충분한 이유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 만약 우리가 온건하고 침착함으로 그런 피해를 받고 참고 있으면 절대로 우리의 권리를 조금도 상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며 이 사실은 우리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욱 더 자신을 겸손하게 모든 일에 견디며 인내하는 생활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은 그만큼 더 많이 우리를 정당하다고 변호해 주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동일한 인내의 이유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차분한 침묵이 효과적인 호소를 울리며 그 호소는 하늘과 땅을 채우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는 단지 현재 생활에만 적응되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수없이 많은 위험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받으면서 안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생활에 소망을 가지고 우리를 승화시켜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자들은 죽음 후에도 계속 존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결과들이 악한 자들과 난폭한 자들의 마음에 공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색으로 그것이 외세의 충동의 결과이든지 그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한 것이든지 버려진 대의명분들을 수행하시겠다고 선언하고 계시며 그리고 피해자들이 전혀 불평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범죄자들을 복수하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살인자들은 흔히 자기들이야말로 형벌을 교묘하게 피했다고 생각하면서 희열에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피가 끝내 그렇게 침묵을 지키며 벙어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죽음이 그분이 보시기에 고귀하다”(시116:15)는 그 말씀이 결코 헛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가 신실한 성도들에게 안도를 가져다 주어 하나님께서 계속 감찰해 주셔서 그들의 생명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게 하신 것과 같이 그 반대편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사실이 격렬한 벼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존하고 계시는 자들을 상하게 하고 죽이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있는 악한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