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인 것이다. 합죽선의 부채살을 펴듯하면 부채 면적이 넓게 퍼질뿐 그실은 점은 한곳에 머물러 있으니 과거 현재 미래를 명분을 지어 부채 면적에 대고 차례로 나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 과거가 어디 있으며 현재가 어디 있으며 미래가 어디있겠는가? 시간을 없는 것으로 치면 무엇이 또한있겠는가? 그 축점인들 있겠는가? 모든 것은 없는 것이니 그 없는 것으로부터 無時無方으로 퍼진것에불과하다.그 미래를 먼저 셈하듯 세면 미래가 먼저 있었던 것으로 되니 과거는 곧 미래인 것이다.과거 미래는 분열과 응집 현상을 시간 개념으로 본것에 불과한 것이니 무엇으로 태어났다. 또 다른 뭐로 태어난다 하는 것은 立長의 翻覆(뒤집히거나 궁글리는 것) 現相 첫번째 부채살과 두번째 부채살 등등으로써 모다 一身의 한 位致가 되어 제위치 제노릇하는 우주속의 하나의 過程事일 뿐인 것이다.(처음이라 하는 것도 없지만 말을 시작하려니까 처음이라 하나) 처음에 공간이 응집됐던 것이 다시 말하면 주름 잡혀 있었던 것이 쫙 퍼진것이 공간이라 한다면 양팔을 헤집고 틈을 벌리는 것같이 한다면 밀려나는 것이 있을게아닌가? 밀려난다는 뜻은 원천에 공간이 있었다는 뜻 아닌가? 그렇치 않다。이는 창자를 뒤집는 듯한허울象의 論理이니 원천에 공간이란 것은 이 공간이 생김으로 인해서 속으로 뒤집혀서 접해 들었다는 것은 서양 宇宙科學의 理論과 흡사할 뿐인 것이다. 이런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내 말씀의 要旨는 源泉에 空間이나 이 공간이나 하는 것들이 하나의 허울상이라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원천의 공간은 없는 것이다。맨―이 공간일 뿐이다. 디딜방아를 찧으면 방아의 곡물은 밀리고 밀려서 자꾸만 제위치로 오면서깨이고 쌓이고 하여서 요구하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간은 자꾸만 뒤집히는 것이다. 뒤집힌다해서 저 큰 하늘이 어떻게 뒤집히는가로 착각하지 말고 바른 깨침이 있을 거니 大小만을 말하는게 아니고 无爲有動을 말하는 것이다. 공간은 시간이 가는 곳까지(즉 유동하는데까지) 공간이다。여러 시간이 혼돈을 일으켜서 공간이 形成되는 것이다。이런 번복현상이 제반모다 허울상(껍데기상 지었다 흩어지는象)이라는 것이다.우리 身體其能感覺具造上 그것이 공간이고 시간이라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공간은 즐거나 늘거나 하는게 없는 것이다.또 공간은 있으대 감각 차원과 같지 않으니 微塵의 界나 无限大界나하는 것으로 나누는 관점이 아닌 것이다. 즉 공간은 있어도 없다에 到達한다。즉 허울상이란 뜻이니 다음 다음 나오는 얘기들 들어보면 그 理治가 自明해진다 할것이다。(※ 왜? 이런 이론에 관심이 있는가? 그것은 그 근본이 불확실하면 그로 비롯된 모든 벌어진 것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年이 輪回歲라 하나 몇만년이면제 位致로 돌아오는 것인가? 제위치로 돌아온다고 해서 그 前回와 똑같다 할것인가? 만약상 돌아온 것이 六個月을 隔(비틀어져 두줄이 나란히 가데 한줄은 半步 앞서 나아가고 한줄은 半步 뒷서거니 해서 나아감 사람의 걸음 걸이와 같다 할것임) 하여 나아가면 이 틀어짐(어긋남)이 아니던가? 똑같이 나아(파도가 쳐 나아가듯) 甲空名分을 適用한 것이 맞는다 할것이다. 대표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圖形) 공간이 限이 없고 시간이 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크게 길게 느끼는 것은 五感六感의 집인 마음에서 파랑이 일듯 생각될 뿐이다. 우주는 호수에 잠긴 잔잔한 물과 같을 뿐이니 우주가 크다거나 넓다거나 오래다거나 하는 우주의 제반변화는 心性에 있는 것이지 그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따라서 아득하다거나 遙遠하다는 것은 머리에서 그리는 생각일 뿐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있어도 환상으로 존재하는 것같아 없는 것같은 것이다。우주는 요원함이 없고 항상 그대로의 器일 뿐이니 森羅事緣이 못에노는 고기와 같을 뿐인 것이다
◎ 다음은 모순은 허울상 앞론을 밝히는 얘기다。여기 우물안의 개구리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개구리는 하늘이 동그랗게 작게 보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물속의 全體가(우물벽등에 의한 에워싸고 있는 듯한 假視現相) 동그란 하늘을 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선 밖에 나와보면 하늘은 넓고 넓어 도리혀 우물을 미진만도 못한 것으로 여길 뿐이다.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볼수있는 現實世界의 世上을 우물밑에 앉아 우물벽을 보고 있는 것이라 여기면 알 수 없는 未知覺의 界나 블랙홀 같은 것은 개구리가 동그란 하늘을 보고 있는 것과 같다 할것이다.그러나 실제에 있어선 그 불랙홀이나 未知의 界로나가보면 지금의 現相界나 現實의 界는 보잘것 없는 界로 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렇더라도 지금 우리의 現相現實界는 그 블랙홀 같은 것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그러니 지금의 界를 또한 깨침의 터로 생각할진데 중요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불랙홀등 未知의 界가 한둘이 아니라 한다면 그것은 여러가지 立長이나 次元으로도 있을 수 있고 그것을 한차원으로도 묶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게 하나라는 것을 실감나게 설명해 보기로하자 비행기에서 낙하선을 타고 내린다 낙하선에 뻥뚫린 공기 흐름구멍이 여러개가 있는 것도 있다 한다。우리가 하늘을 볼때 큰 낙하선이 하강하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 공기 구멍을 블랙홀들이라 여기면 보는 블랙홀들은 여럿이더라도 공기들이 눈이 있어 빠져나가 보면 서로만나게 되서 역시 그 불랙홀들은 하늘이란 허울상 생김때문에 그렇게 보였지 하나(壹) 였던 것이로구나로 깨닫을 것이다. 즉 그 하늘이란 낙하산 역시 하나에 지음(會作) 허울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니 그것을 걷어 접어 치우는 안목이라면 一世界의 삼라만상이 벌려져 있다는 것이다。그 一世界란 空이란 그릇(器)으로써 定數?임엔 틀림없다。허심탄회하더라도 僧 떼어 놓고 절(寺)만 족치는 얘기와 같아 한 法相만 아니라 그안에는 엄연히 모든 法이 존재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석씨 경의 한구절을 이끌어 나름대로 猶推되구마구 풀음이다. 또 그 불랙홀이나 未知界가 충계 층계 싸고 싸고 이곳 저곳 일수도 있으니 굳이 一世界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즉 석씨 주장도 있음。耶蘇씨 主長하심도 있어 백가쟁명의 사상이 있는 것이다. 世界의 事物이 모두가 인연에 의해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순간의 꿈속은 환상의 나래를 함죽선 펴듯 함이니 내가 이미 千年을 지냈다 하나 꿈을 깨고 보면 아직도 저자가 내가 잠들기전 붙였던 담배불을 끄지 않고 피우고 있는거와 같으리라 환상이 실제 하나 역시 환상일 뿐인 것이다. 그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도 꿈속에 일과요 환상이니(그림자와 같은 상) 시간은 뒤바뀌기도 하고 어그러지기도 해서 어떻게 잴수 없어 없는 것이다。世界가 많은 것 같으나 이 한그릇 속의 물이요 물에 얼비치는 것이니 별이 빛친다면 별빛도 있고 해가 빛친다면 햇빛도 있고 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면 그 모습도 그에 나타날 것이니 모다 한그릇에 있어 저마다의 界라 하나니라(※ 또 그 아닐수도 있다고 마음에서 내질르는 의문 반박이 일고자 한다) 시간이란 것을 초월하였으니 그자가 담배 피우고 있는 영상이 그릇에 얼비치는 동안 나는 평생의 꿈을 그 같은 그릇일수도 있는 곳에 얼비쳐 담고 있다는 뜻이니 내 꿈속에 그 담배 피우는 이의 잠깐의 시간도 할애될 수 있는 것으로써 뒤죽박죽 시간을 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이끌어 엮는 표현이 허울상이란 뜻이다.그것을 걷어 치우면 삼라만상이 자미문호에 君臣이 벌려 선것처럼 벌려져 있다는 뜻이다. @ 삼라諸生이 나라는 생각에만 집착하면 벗어나지 못한다。諸生이 억겁에 들어 허덕이거늘 제 혼자만 이라도 脫破하겠다 하니 어디 될 법한 말인가? 그런 利己主義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는 벗어 버리겠다는 고(罟)에 執着되었으니 얽기설기 얽혀드는 칡덩굴 속에서 困함을 당하는 거와 같게 될것이니 무슨 벗어버리는 門을 찾을 수 있겠는가? 본디 벗어 남은 없는 것이다。本來도 없지만 말을 꺼내려 하니까 本來라 하지 本來 벗어 남은 없다。本來 脫破란 것이 없는데 그 門은 어디 있으며 그 길인들 어디 따로 있겠는가? 우리 네살 먹은 딸더러 어떤 할아버지가 뻐스에서 내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옷을 더 입으라 하니 내 듣기엔 그 次元이 어떻든간 醒者의 法文처럼 들리니 아직 어리니 옷 벗기엔 이르니 道를 더 닦으라는 가르침이겠다。즉 더 자라라는 法文이다。내 생각이 그렇치 道를 더 닦고 그 길에서 行하되 그 길에서 얻은 것을 갖고 놀다 그길의 제자리로 돌려 놓는다면야 무슨 걸림이 있을까? 하리로다 했다. 삼라諸生이 立體 時空 事物界에 空手來 했다가 空手去 함이라 싸짊어지고 어디로 갈것인가? 하리로다 하는 생각이 퍼뜩이 지나갔다. ○ 옷을 벗으라는 건 (해탈하라는 것은) 무리다. 남에 속사정도 모르면서 제보는 눈 관점, 관념에 맞춰(마치 제 안목이 세상 모든 보는 이의 안목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또 이 말씀에 반박하길 양고기국이 비록 맛이 있으나 여러 입에 대하여 다 맛있다 하기엔 어렵다고 그렇기 때문에 길잡이와 같은 그 대표자를 뽑던가할제에 누구 아니면 어렵다 하여 사양함을 무릅쓰고 한사람의 덕있는 사람(그 방면에 정통하다하는 사람)을 추대하던가? 自願해 나서는 이들 있어 대표자들 선정해서 이끌고 나가게 함이 아니던가? 할지 모른다。또 大衆의 公論을 重要視해 따른다하나 만장일치는 얻기 힘들고 다수결 원칙이 최대 대중 뜻의 반영이라 벗어 남의 正道이며 지름길이라하나 또한 반드시 그것이 긴 안목을 갖고 내다보는 자 있어 (先見之明) 볼제에 굳이 脫破에 正道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公論化를 조성도 한 사람이나 몇사람의 뜻에 의해 그럴듯한 活術이나 宣動에 휘말려 大衆이 널뛰듯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찌 全體나 大多數의 대중論의 뜻을 반영한다 할것인가? 한사람이나 몇사람이나 사람의 안목에 놀아나는 것이지 이런 말씀임)옷을 벗으라는건 덜떨어진 미치광이지 참으로 깨트려 버린 자는 아니라 이는 마치 점잖은 양반을 오욕에 허물을 뒤집어 씌우고 저자 거리에서 종아리치겠다는 거와 같음이다。그 속사정을 알아보는 자나 그런걸 모르는 자라도 어진 마음이 있는 자라면 도리혀 그 봄이 민망할 것 아닌가? 남에 속사정을 알아주는 것이 어떤 면으론 自己 .고(罟)를 깨트리는 一片이 될 수도 있다. 왜? 궁극이라 할것까진 없지만 自他의 허울상이 없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 고(罟)를 깨트린 곳이기 때문이다。이글들이 번뇌를 떨어 놓는 글이기 때문에 의문과 反論이 계속 제기되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남에 사정을 봐주다가 저만 항상 뒤떨어 지게되고 짓이긴 먹이처럼 되어 제가 먹어 보는 뜻을 펴는 고(罟)를 허무는 길은 점점 요원해지기 때문이다. 혹 그런 속에 제 고(罟)를 허문다 하면 될것이나 흡족한 풀이는 못된다 할것이다. 그 삼라만상이 남이 아니라 나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굴린다 하더라도 어디 나라는 존재가 직접 체험하는 것만 하겠느냐? 이 말씀이다. 나라는 존재를 없앨렴 같은 느낌이와 닿아야 할것 아닌가? 같은 느낌이 와닿지 않는다고 탈(脫=過)이 잡히고 또 感度가 같은 느낌이 와닿는다 하더라도 금새 앞에 하던 걸 잊고 왜 같아야만 되는가 하는 의문과 반론이 제기되고 실증 환멸이 올것 아닌가? 이것 저것 재는(尺度) 것을 갖고 相이라 한다. 그 相을 벗으라는 것이다. 이것저것 걸릴까를 재지 않으면 亂念에 들지 않고 亂念에 들지 않으면 이 결백한 마음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未知 處地가 하등에 부끄러울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눈을 의심치 않고 赤身(허울을 벗었다는 표현의 裸身像 諸般게 담긴다는 一世界의 象 空虛器의 象을 상징하겠다는 뜻)으로 나되어도 제마음엔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그릇된(非) 가르침(價値觀)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이는 聖人의 가르침을 임의대로 해석하여 편의만 도모하려는 그런 의도일뿐 고(罟)를 깨트리는 것이라곤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속고쟁이가 타개졌는지 무슨 혐오스럽고 부끄러운게 있어 내보이기가 보는 자로 하여금 민망하게 여길게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자식내외 거처하는 방에는 어버이도 꺼리는데 피차간 결례가 되고 실례가 된다면 자나깨나 해명치 못할 마음에 찌꺼기가 틈새에 박혀 있듯하여 개운치 못할것이니 그러고선 무슨 벗어치움이라 할것인가? 이제 그 덥더라도 모두 옷을 두둑히 입어 땀흘려 열심히 노력하여 그 이뤄논 功果를 갖고 脫破를 왈가왈부해야 할것이다。이제 모든 生이 오욕을 뒤집어 쓰고 같은 억겁에서 전투를 하는 것같이 덕이거늘 동참하여 싸움을 독려하고 거들고자 아니할 것인가? 비겁하게시리 갖은 빙자되어 도망가고자만하고 야비하게시리 他人에게 전가시키고 몰아 붙이고 추접하고 치사하게 시리 利속만 차리고 생색만 내려든다면 도리혀 이 막대먹게 행동하는 술주정꾼에게도 주정을 받아 망신을 당하는 것도 싸다 할것이고 충고와 질책을 하는 것을 둔 것 같으리니 무슨 낫으로 얼굴을 들어 독탈한 醒者라 自處할 것인가? 자기만의 모자른 생각과 그에 의한 행동이지.. 저는 일하기 싫어하고 점잖빼고 멋내기 즐기면서 다른 사람에겐 일하라고 주제 넘게 나된다면 상대방이「내가 왜 일을 안해」하고 도리혀 화를 낼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