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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사연은 편지내용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서울시민(꺾은 붓)이 박원순 서울시장님께 보낸 편지를 그대로 싣습니다.
지난 6월 27일에 있었던 일을 28일 아침 일찍써서 박시장님게 등기우편으로보내고 오후 2시부터 있을 예정인 서울시청앞 광장의 민노총 경고파업출정식현장엘 가느라고 급하게 쓰다보니 글이 매끄럽게 다듬어 지질 않았고, 역사적 사실이 틀리부분도 있었습니다.
참작하시면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서울시장님!
진부하게 존경한다는 표현은 안 하겠습니다
시장님께서 시장님으로 재임하신지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지금까지 서울시장을 거쳐 간 역대 그 어느 시장보다도 알뜰하게 시정을 꾸려나가시려고 애쓰고 계시고, 특히 힘없고 가난한 최하층 서민들의 삶을 걱정하며 가슴 따듯한 시정을 펼치시는 시장님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시장님께서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시민들을 걱정하고 사랑하시듯이 시민들 또한 시장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지는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노들섬(중지도)의 활용방안에 대한 시민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물론 서울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자유게시판이나 시민 제안을 하는(상상제안)코너가 있기는 하나 너무나 많은 제안들이 올라오고, 그 제안을 서울시에서 다 읽어 보는지도 의문이고, 간혹 서울시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제안에 대하여는 해당부서의 담당자가 간략한 답변을 달아놓기는 하였으나, 본 제안은 시장님께서 직접 읽으셔야 할 내용 같아 부득이 시장님께 직접 서면으로 제안서를 우송함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명박시장에 이어 오세훈시장이 지금까지 시장직에 머물러 있었거나, 지난 번 보궐선거에서 나경원후보가 당선이 되었다면 노들섬은 재임 중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화려한 치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명박-오세훈 시장에 이어 그들과 사고방식과 정치적 성향이 대동소이한 나경원시장에 의해 오세훈시장의 복안이었던 오페라하우슨지 뭔지를 건설하는 공사판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랬더라면 땅콩 밭과 경비행기 활주로 하나가 달랑 있었던 여의도가 마천루의 숲이 되었듯이, 서울시장직을 자신의 정치적 도약판으로 삼으려는 정상배와 재벌의 잇속이 맞아 떨어져 대자본의 돈벌이 판이 되어 노들섬은 여의도와 마찬가지로 시민들 특히, 서민들 곁을 떠나갔을 것입니다.
지난 6월 27일 노들섬의 남쪽 아치교 다리 아래 둔치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 국민이 알고는 있으나 세월이 지나다 보니 잊고 있지만 그 한강다리는 6.25한국전쟁 발발 후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한 밤중에 차량과 다리를 꽉 메운 시민들이 피난길에 올라 당장 밥을 끓여 먹을 솥단지와 이부자리를 머리에 이고 남부여대하여 다리를 건너고 있는 중에 우리 국군에 의해 폭파가 되어 수많은 서울시민들이 아군에 의해 살해된 비극의 현장입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당시 500여명, 또는 800여명, 많은 경우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폭파와 함께 살해되거나 수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전사에 자국 군에 의해 피난민을 이렇게 의도적으로 집단 학살한 경우가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각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해야 할 책임자인 이승만은 자신은 몰래 수원-천안을 거쳐 대전으로 도망가서 미리 녹음된 방송을 통하여 서울에 머물고 있는 듯이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정부와 군 그리고 시민이 합심하여 서울을 사수하자는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한강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서울시민을 직접 죽였고,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해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수십만의 서울시민은 포기를 하였습니다.
그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수십만의 서울시민은 또 어땠습니까?
인민군에 죽고, 젊은 사람들은 철사 줄에 묶여 인민군이 퇴각할 때 북으로 글려갔고, 인민군에게 물 한 바가지라도 건넨 사람은 9.28서울 수복 후 진주한 국군에 의해 부역자로 처단되고, 납북자 가족들은 역시 빨갱이 가족으로 또 죽임을 당하거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서울시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나라 정부가 그들을 버렸으니, 하늘마저 그들을 버렸던 것입니다.
한강다리가 폭파된 그 참상을 잊을 수가 없어 6년 전부터 아주 힘없고 재정인 빈약한 <평화재향군인회>주관으로 6회째 비극의 현장이었던 노들섬의 남쪽 아치교 다리아래에서 6월 28일을 전후로 추모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올해가 6회째이고,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알음알음으로 이번에 처음으로 그 추모제에 참석을 하였다가 이것을 이렇게 아주 적은 시민들만의 추모제로 할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관하는 추모제로 격상을 시켜야 된다고 생각되어 본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추모제에는 평화재향군인회 간부 4-5명과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시민 10명 등 20명 안팎의 시미들이 참례하였고, 수박 한 덩이 사과 세알 배 한 알 북어포 하나에 막걸리 두 병이 제물의 전부였습니다.
희생자들이 돌아가실 때 한없이 슬프고 불쌍했듯이 추모제 역시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쓸쓸한 추모제를 지내야 한단 말입니까?
그 자리에서 느꼈던 감상과 오랜만에 걸어서 들러본 노들섬에 대한 몇 가지 활용방안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1. 추모공원 건립
노들섬은 한강 아치 복교의 동서 양편으로 2구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섬의 동편(상류측)은 무슨 군사시설인지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는 팻말이 붙여진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었고, 그 옥상에는 상업용선전판이 하나 있으나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것 같았고, 버드나무가 제멋대로 어울려져 자라고 있는 잡초 밭이고, 면적은 서편(하류 측)에 비하여 좁고 지대는 약간 높았습니다.
이곳에 한강다리 폭파당시 희생된 시민들을 추모하는 추모공원을 조성하자는 것입니다.
국가가 자국민을 학살한 행위를 반성을 하는 의미에서 국가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 합당하나 국가가 그것을 하기 전에 서울시에서 먼저 그것을 추진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선, 한강다리 폭파당시 그 작전명령이 지시-보류-번복-재 지시 되는 명령계통을 포함 폭파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밝히는 안내판을 게시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추모탑이나 위령탑을 건립하고, 당시의 유품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추모건물을 지어 동편은 추모공원을 조성하자는 것입니다.
한강다리 폭파와 관련된 모든 것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역사 교육관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충북 영동에 있는 미군에 의해 양민이 집단 학살된 노근리 현장에는 추모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노근리 추모공원을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역사적 과오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망각하면 그런 불행한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게 자라나는 후세들을 교육하기 위해 조상들이 저질렀던 역사적 과오를 가감 없이 밝혀 놓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모제 역시 국가행사로 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전에 서울시에서 추모제를 주관하다가 뒷날 국가행사로 격상을 시켰으면 합니다.
이것을 국가가 되었던 서울시가 되었던 반드시 해야 할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2. 섬 서편(하류 측)의 활용
섬 동편에 비하여 상당히 넓고 지대가 약간 낮고, 평평한 들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시장님의 아이디어에 따라 주말농장이 조성되어 있으나 기록적인 가뭄으로 작물이 잘 자라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대표적인 농사가 논농사와 밭농사입니다.
논농사의 대표적 작물이 “쌀”이고, 밭농사의 대표적 작물이 “보리”입니다.
<쌀>과 <보리>는 우리민족을 수 만년 먹여 살린 우리겨레의 생명줄입니다.
조금씩 쪼개서 주말농장으로 하는 것도 의미는 있지만, 이 섬 서편 평야에 큰 논 하나와 밭 하나를 조성하여, 우리 재래식 영농방법에 의한 유기농 농사를 지어보자는 것입니다.
코뚜레를 꿴 한우가 끄는 쟁기로 논과 밭을 갈고, 소가 끄는 써래로 갈아 엎은 논의 흙을 고르고, 줄을 띠고 사람의 손으로 직접 모를 심고, 가을에 추수는 낫으로 하고 하는 등의 재래식 농사를 그대로 재현해 보자는 것입니다.
농촌지역에서도 산간 다락 논을 제외하고는 재래식 농사기법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것을 서울 한 복판에 재현해서 학생들에게 조상들의 영농방법을 견학하는 교육장으로 만들고 희망하는 학생은 모심기, 벼 베기, 탈곡, 보리밭 밟기, 보리타작 등에 직접 참여할 기회도 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사일을 하는 한우 한두 마리와 돼지 몇 마리 기르는 초가집도 한 채 지었으면 합니다.
서울한복판에 조선시대 이전의 영농방법을 그대로 재현해서 계승시키자는 것입니다.
재래식 영농기법을 보유한 일가족을 선발하여 서울시가 저가의 상징적인 임대료를 받고 임대형식으로 논밭농사를 맡겨 생활을 하게하고, 동편의 추모공원 관리까지 맡긴다면 이상적일 것 같습니다.
서편의 땅 면적으로 보아 농사만 지어도 1가족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좀 부족하다면 추모공원 관리비 형식으로 일정 급료를 지불하여 생계를 보조하여 주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엄격하게 유기농을 짓도록 관리하여 유기농의 시범학습장으로도 활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할 제안은 아니고 시장님께서 한 번 검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3. 역사적 사실 기록
한강대교는 6.25전쟁 시 폭파라는 아픈 기억 외에 또 하나 우리 헌정사에 잊으면 안 될 사실이 또 하나 있는 곳입니다.
1961. 5. 16. 새벽
왜군장교 출신의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반란군은 이 다리 중간 노들섬에서 총성을 울리며 고요히 잠든 서울로 진주하여 학생들의 피로 이룩한 민주정부를 들러 엎고 소름끼치는 군사독재를 18년간 펼쳤던 것입니다.
국정을 책임졌던 총리는 도망쳐 수도원에 숨었고, 명목상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혼란 수습 후 민정이양”이라는 속임수에 속아 군사반란을 추인해주어 “반역”을 “혁명”으로 미화시켜 주었습니다.
이렇게 총리와 대통령이 군사반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지만, 당시 한강다리 중간에서 군의 동태를 살피며 보초를 서던 헌병은 반란군의 앞을 막고 검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단 1초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던 반란군은 불문곡직하고 이 헌병을 사살하고 유유히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던 것입니다.
그때 사살된 헌병이 1명인지, 2명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사살된 헌병은 군사반란군을 한 몸으로 막으려다 비명에 간 순국을 한 것입니다.
그 헌병이 박정희 반란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아를 막아 선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헌병의 순국 의미가 달라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 그 헌병, 살아있었다면 지금 75세 전후의 노년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 헌병이 순국한 자리에 그 헌병의 동상까지는 몰라도 그 역사적 사실을 기리는 표지석과 안내판 하나쯤은 세웠으면 합니다.
시장님께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위 3개의 제안 중 추모공원 건립만은 반드시 관철되었으면 합니다.
2012. 6. 28.
서울시민 000 올림
(참고) 역사적 사실이 틀린 부분이란 5.16쿠테타 당시 반란군수괴 박정희와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간에는 반란군이 한강 중간 노들섬(당시는 중지도로 불렀음)에 도착하여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을 교감한것 같으며 장도영은 즉시 헌병으로 하여금 반란군을 저지할 것을 명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한강다리 중간과 한강다리를 건너 용산에서 반란군과 진압군 간에 소규모 전투가 2차례 있었고 희생자도 2명보다는 많았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