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삼태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자유소통광장 스크랩 안드로를 위한 한국사 강의 4 - 준왕조선과 왕검성
신석재 추천 1 조회 168 16.03.01 13:38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삼일절인디 기념 않을 수가 없잖여?

그래서 부랴부랴 준비했어.

고조선.고려가 사천.섬서.감숙.청해성 등 땅에 있었다는 둥,

산동반도에 신라 묘가 30 기나 있었다는 둥 정신이 가출한 안드로들은 잘 듣길 바래.

몰르는게 있으면 재깍 질문하고.

단, 정신 가출한 머리론 제발 아무 소리 안했으면 조케써.




부.준왕이 마지막으로 통치했던 조선의 왕검성은 어디였을까?

서기전 108 년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어디인가?


반도 평양이라 비정하는 한국역사학계의 주장은 겉으로만 보면 쥐뿔도 모르는 개잡소리이긴 한데 이보다 더 큰 문제가 내재 되어 있다. 즉 그 잡소리를 지 대가리로 생각해 내었다면 정말 다행이겠는데 실상은 왜종 사기꾼.도굴꾼들이 역사학자랍시고 떠벌리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의문들을 스스로 억누르고 이미 구성된 역사체계를 유지하려고 하며 일부 유리한 엉터리 기록들을 억지로 꿰어맞춘다.

신채호 주장을 인용하면 유사역사학,사이비역사학이라 조롱댄다.

21 세기 신판 왜종 부역질에 다름아니다.


게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후조선 선학들 곧 한백겸.정약용 등도 반도 평양이라 했다며 방패로 삼는다. 혈기방장한 나이에 역사에 입문하여 고작 얻어낸 것이 정약용 등도 반도 평양이라 했다 하니 어이가 없다.

한백겸.정약용 등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겠다.


조선.고구려.고려를 거쳐 후조선까지 약 2100 여년 동안 열수.압록강으로 불린 강이나 그 발원지인 백두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후조선 500 여년 동안 연경을 숱하게 오간 사신들이 넘고 밟고 건넌 봉황산.청석령.학야 9000 리라는 요야.요택도 모르는 병신 중의 상병신들이다.


또한 엄밀히 따지면 바다도 아닌 길고 큰 강의 최하류를 어쩔 수 없이 목숨을 내놓고 건너는 정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마치 다리 위를 말잔등에 앉아 쉬엄쉬엄 건넌 듯이 이해한다.


결국은 만리장성 동쪽 끝이 어딘지도 모르게 되었으니 그 동쪽의 지리를 어찌 알 것이며 제 스스로 선조들이 지킨 강역을 줄이고 있다. 그러니 100 억을 쏟아부은 병신재단에서 45 억 더 들여 만들었다는 고대 강역 추정지도가 화국의 동북공정을 비판.저지하기는 커녕 외려 편역든 꼴이 되어 개판소리를 듣고 천만다행으로 환수조치까지 받는 것이다.



참고도 - 재야사학계에서 주장하는 4군과 한국사학계와 중국에서 주장하는 4 군




한편 어찌된 일인지 한국사서에는 왕검성 지역의 지형지세를 설명한 지리지 한 권 남아 있지 않다. 고려의 개경이건 후조선의 한양이건 어느 중심 기준지에서 왕검성.평양성.서경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기록도 당연히 없다. 얼마 되지 않은 기록마저도 손을 탓는지 읽을수록 혼란만 가중된다.


<삼국사기/잡지.지리> 고구려조를 보라. 

평양성을 `산을 따라 구부러지고 돌아서 성곽을 만들었고 남쪽 가로 패수가 흐른다`가 전부다.

대체 평양성이 있는 산은 어디에 있으며 패수는 또 어디있는 강이냐 말이다.

그리곤 <통전> <한/지> <고기> <주례> <당서> <수양제 동정조> 등 화국의 실속없는 기록만 잔뜩 늘어놓았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왕조실록/세종지리지> 등을 보라.

깨알같은 설명이 빽빽하게 수십 쪽을 넘어가도 그 평양성이 반도 안인지 밖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첨부된 고지도는 손을 탄 것이 분명하다.


후조선 500 여년 동안 한양과 연경을 오간 연행기록이 그나마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것같아 뒤적여 보았더니 대다수 기록이 압록강에서부터 시작하여 요동.연경으로 향하는 명.청 강역의 명승지 묘사 기록뿐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출처불명의 사행로 고지도 등이 대표적이다. 그 압록강까지의 로정이라도 한양에서 어느 방향으로 어디를 지나고 어느 강을 건너고 몇 리를 간다는 기록을 볼 수가 없다.


저런 기록들은 압록강과 평양성 위치를 조작하면 그냥 유야무야되는 기록들인 것이다. 

아! 지랄마저도 풍년이 드는 세상인가 본데 그래서인지 2100 여년 역사 기록물이 어찌 저리 가뭄 풍년만 잔뜩 들었는가?


지리 관련 기록 중에서 사실적인 기록으로 찾은 유일한 것이 1656 년 후조선 효종의 친동생 인평대군이 진주정사로 한양을 떠나 연경을 다녀오면서 전 일정을 매일 기록한 <연도기행>이다. 대군 일행이 한양을 떠난지 8 일차 누적거리 560 리를 걸어 왕검성인 평양성에 도착하였다고 씌여 있다. 한양에서 평양까지 560 리, 확실한 자료를 찾았다 싶어 수 년이 지나도록 금과옥저로 여기며 신뢰하였었는데 어느 순간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조작된 것이 확실하다.

과연 어떤 자료를 믿어야 한단 말인가?


한편 정약용은 <강역고/조선고>에서 연경에서 우리 의주까지 2100 리라 하였는데 현 한국사학계의 노구나 아이들 모두 2100 리가 어느 정도 거리인지 개념 자체도 없다. 또한 모든 연경행 사신로는 육로로 지정되었었지만 1629 년 요동길이 막히어 요동경략 원숭환의 내락 아래 사은사 이흘과 동지사 윤안국이 해로를 이용하여 요동 남쪽 바다를 가로질러 건너려다 윤안국 일행이 풍랑에 휩쓸려 몰살당할 정도로 험한 뱃길을 마치 다리 위를 말 타고 쉬엄쉬엄 건널 수 있는 곳이라고 인식들을 한다.


그러니 그 2100 리 떨어진 우리 의주가 제 위치에 있을 수 있겠는가?


임무 수행이 첫째 목표인 연경행 사신들이 명이 지정하지도 않았으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한 해로를 왜 택하겠는가?  이흘 등은 어쩔 수 없어 해로를 택한 것인데 후조선 500 년 동안 명.청에서 지정한 사신 행로를 따라 말타고 종 부리며 최저 100 여명 안팎되는 사신단을 이끌고 길고 큰 강이 남쪽으로 흘러 바다 해안선과 만나는 최하류 지역에 형성된 만灣을 빙빙 둘러서 돌아다녀야 했다.



고지도- 출처불명의 사행도



붉은 실선으로 표시한 것이 압록강에서 산해관까지의 연경행 사신들의 행로라는데 어찌되었든 저 붉은 실선 육로로 후조선 500 년 동안 1629 년 이흘과 윤안국 등 몇몇을 제외한 모든 사신들이 다니긴 했다.


문제는 산해관 동쪽에 표시된 바다나 압록강 남쪽에 표시된 바다가 현대 지도에 표시된 그 산해관.발해.요동만.황해라고 당연시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글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했듯이 고지도 왼쪽에 표시된 산해관은 북경에서 동쪽으로 650 리 떨어진 한 시기 요서군 임유현이며 산해관 동쪽 바다와  서남쪽으로 삐죽이 나온 반도 동쪽이며 압록강이 흘러드는 바다는 원래 바다가 아니라 큰 강의 최하류이며 바다 해안선에 이르기까지는 수 백리를 더 흘러야 한다.


저 바다는 지도를 그린 화사의 추상적 상상력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며 만약 지리지를 읽었다면 저 바다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라는 것은 충분히 알았을 것이며 최소한 아래와 같이 묘사해야 한다.


고지도 - 후조선 영조 26 년(1751) <해동지도>에 실린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후조선 화사들이 묘사한 요동 지역의 반도가 보이는가?

지금의 요동반도 모습과 같은가?

출처불명일 정도로 자신없다는 뜻이겠지만 사행로를 그린 화사는 무식하거나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재 화국의 공식입장이나 한국사학계에서는 위 고지도에 표시된 산해관.요하.반도.압록강 등을 현대지도에 표시된 지금의 산해관.요하.요동반도.압록강으로 인식하라고 강요.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1911 년 신해혁명으로 청국이 멸망하고 1932 년 지금의 란하 중류 지역인 요동 지역을 점령하여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왜종아이들이 지명과 지도를 가지고 작란질을 친 것이 바로 저위 사행로가 묘사하는 지역을 지금의 란하 최하류에서 지금의 요하 최하류로 인식시키도록 지명을 이동시키고 지도를 조작하였다.


조작지도 - 1928 년 왜종아이들이 반죽중인 봉천도



측량과 경위도법을 적용한 것으로 보이는 위 봉천도의 요동반도 모습을 보라.

지금의 요동반도보다는 1751 년 서북도에 묘사된 삐죽 나온 땅과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맛있는 국수 만들려고 밀가루 반죽 중인 것이다.


그러면 정약용이 말한 2100 리는 어찌 되겠나?

후조선 시기 모든 사신들은 지금의 란하 최하류를 자동차를 타고 가로질러 건넌 듯이 간주되어 결국은 2100 리 거리가 동쪽으로 한없이 늘어나 지금의 압록강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면 준왕조선의 왕검성이나 고구려의 평양성.고려의 서경은 어찌 되겠는가?

당연히 동쪽으로 밀려나 소위 한반도라는 북조선.남한 땅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왕검성 위치를 지리적으로 묘사한 기록은 있는가?


왕검성 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저술되었고 그 위치를 명확하고 지리적으로 표현하면서 신뢰할 만한 설명으로는 <후한서/군국지>에 기록된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졌다`라는 구절이 유일하다. 이후 <신당서/지리지>에 인용된 가탐의 사이지로 중 기준지 영주로부터 안동도호부.압록강.평양성까지의 거리 기록이 있고 비슷한 시기의 <통전/변방문.동이.고구려>의 갈석.장성.대요수.압록수.평양성에 대한 일관적인 지리적 설명을 하였고 다음으로는 <명사/지리지>의 개주위까지의 거리 기록과 <청사고/지리지>의 봉황직예구에 소속된 안동현 곧 우리의 압록강 의주 대안까지의 거리 기록이 있다. 이처럼 이설이 있을 수 없는 확실한 위치의 기준지와 이곳으로부터의 방향과 떨어진 거리가 기록되어 있는 사서는 한국엔 찾아보기 어렵다. 


어쨋든 <후한서> <신당서> <명사> <청사고> 등의 지리지 기록을 교차 검증하여 준왕조선,왕검성,낙랑군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은 지금 화국의 요녕성과 하북성 경계를 흐르는 지금의 란하와 지금의 대릉하 사이 지역이다.  

그러면 그렇게 비정하는 논거는 어떤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2200 여년 전인 서기전 195 년 경,

연인 만이란 놈이 한나라 요새를 동쪽으로 넘고 국경선인 패수를 건너 옛 진나라 땅이였던 곳에서 준왕의 조선 제후국이였을 진번후에게 부역질하다가 연.제 망명자와 그곳의 조선백성들을 꼬드겨 조선의 왕검성을 사기.기만으로 차지하였다. 그로부터 80 여년 만에 한나라 무제 유철이란 놈이 조선 땅을 차지하여 4 군을 두었고 이후 30 여년 만에 조선 백성들의 공격에 지쳐 이리저리 옮겨 결국 현토.낙랑 2 개 군으로 축소 개편되는데 이 시기의 지리를 설명한 것이 <한서/지리지> 현토.낙랑군 기록이다. 


그러나 <한서/지리지> 현토군에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 낙랑군에는 820 리 길이의 열수가 흐른다는 기록 외에는 현토.낙랑군 위치를 비정할 만한 단서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400 여년 후에 범엽이란 자가 <후한서/군국지>를 저술하면서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현토군은 4000 리, 낙랑군은 5000 리 떨어졌다고 한 것이 전부이지만 저 거리 기록만으로 현토.낙랑군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토.낙랑군과 같이 기록된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의 지리적 정황을 깊이 검토하면 거의 찾을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암흑 중에 마침 범엽과 동시기 인물인 력도원이 <수경>에 주석을 달아 <수경주>를 저술했는데 이 <수경주>에는 <한/지>와 <후/지>에 기록된 유주 소속의 상곡군에서부터 동쪽으로 현토.낙랑군까지의 지형지세를 실질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북경 동쪽 지역에 설치된 어양.우북평.요서.요동.현토 등 5 개 군의 설치 위치를 꿰어맞출 수 있는 정황이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저 기록들과 5 개 군 지역을 묘사한 고지도 및 현대 축척지도를 대사.검토하면 100 % 완벽하게 낙랑군 위치와 820 리 열수를 콕 ?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을 앞글에서 논증한 것이고 그 결과가 한 시기의 임유관 곧 명.청 시기의 산해관 위치는 지금의 란하 동쪽이 아니라 서쪽 강안이라 결론낸 부분이다.


이렇게 핵심적인 기록들과 고지도들을 도외시하고 또한 왜종아이들의 속셈은 짐작도 못하며 반도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흙.나무.돌.쇠붙이 쪼각들에 새겨진 글들을 보고 한 시기의 낙랑군 지역 맞다고 왜종 도굴범.사기꾼 학자들의 개잡소리에 호들갑 떨며 대가리 탱탱 빈 한국사학계 역사학자들이 자라나는 한국 학생들을 70 여년간 가르쳐 왔다.

나라 망하지 않은게 용하고 왜종.화국아이들의 조롱.빈정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쯤에서 복습.예습용으로 고지도와 시원한 약도를 제시한다.


고지도- 1621 년 명인 모원의의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에 표시된 심양.압록강.서경.송도(후조선 1년)


 


참고도- 단군부여와 준왕조선 그리고 낙랑군





그러면 임유.산해관 앞 바다 동쪽에 있었으며 요동군 동쪽 패수 동쪽에 있었을 준왕조선과 왕검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또한 <한서/지리지> 낙랑군 기록에 유일하게 길이가 기록된 820 리 길이의 열수는 과연 지금의 어느 물길일까?


<통전/변방문/동이.고구려>에는 고구려 평양성 곧 준왕조선의 왕검성에 대한 지리적 설명이 비록 짧지만 정확한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 즉 <사기/하본기>에 주석을 인용된 <태강지리지> 기록인 `碣石山在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을 언급하고 <상서>에 기록된 `夾右碣石入於河` 구절에 이어 평양성 주위의 시덥잖은 산세와 패수를 언급한 후 곧바로 대요수.말갈 서남산.소요수.요산.압록수.말갈 백산.국내성.안평성.평양성 등을 짧게 설명하였다.


곧 위 참고도에 표시한 갈석과 태백산.백산 지역에 대한 설명인데 대요수는 말갈국 서남산에 발원한 후 소요수.대량수를 받아들이고 요동군 안시현에 이르고 압록수는 동북쪽 말갈 백산에서 발원하여 국내성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합쳐진 후 안평성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 압록수는 평양성에서는 서북쪽으로 450 리 떨어져 있고 대요수에서는 동남쪽으로 480 리 떨어진 곳을 흐른다고 하며 이곳이 한 시기의 현토.낙랑군 지역이라고 하니 결국 압록수가 <한서/지리지> 낙랑군 탄열현에 기록된 820 리 길이의 열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도 - <통전/변방문/동이.고구려>조에 설명된 갈석.요하.압록수와 말갈 서남산.백산





또한 이 압록강의 발원지인 백산은 후조선 시기 모든 지관들의 풍수 좌향론에 의하면 해좌사향이였기 때문에 지금의 백두산 위치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고지도 - 송.요 시기 제도된 것으로 알려진 <지리도> 우상귀




결국 송.요 시기 제도된 위 지리도에서와 같이 산동반도 정북에 요하가 있어야 하며 그 요하는 동쪽의 장백산 곧 정약용이 <강역고/백산고>에서 설명하고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에 백산대맥이라 명기되었고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해룡부에 있는 고열눌와집의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짧게 서북류하다가 곧장 남쪽으로 1000 여리를 흘러내려야 한다.


결국 당인 두우가 <통전>에서 압록수가 동북쪽 말갈 백산에서 발원하여 국내성 남쪽을 지나고 서쪽에서 염난수와 만난 후 바다로 든다고 한 바와 같이,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고대의 요수는 란하라 한 것이나 패수를 해성의 헌우락이라 한 바와 같이,

요하.패수.압록강 모두가 지금의 란하 지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명인 모원의가 제시한 조선도에서와 같이 심양을 경유하는 혼하가 요하로 흘러들고 심양 동쪽에 압록강이 표시된 바와 같이,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기록과 같이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400 여리까지가 평양성이 있는 평안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지역에 준왕조선과 왕검성 그리고 고구려 평양성, 고려의 서경.송도가 있어야 한다.


그곳은 지금의 대릉하 서쪽 상류의 남쪽 지역인 건창 부근이다.



참고도 - 1910 년 대한제국 북쪽 강역 추정도




다음엔 뭘 쓸까?

욕지거리나 조롱질을 조금 자제했더니 스트레스가 스테레오로 차자오네.


안드로들의 우상인 것 같은 심백강.성헌식 주장을 깔까?

오!

저런 피라미들은 그냥 베이스로 깔고 <태강지리지>를 잘못 해석하여 공석구에게 까인 이덕일과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대요수가 지금의 요하라는 윤내현이를 지목하여 까야되겠네.


한 시기 유주 현토군을 북경 부근이라는 비정하는 이덕일 이야기 듣고 까무러쳤다.

얜, 요하.백산.압록수 등 지형지세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어.

심백강이는 뭐라 했더라, 고구려 평양성이 평주라고, 요하가 백하라고 했던가?


에이 스불 잡것들.

그리 공부해가지고 누굴 설복시킬 수 있단 말이냐?

강단계 아이들은 차치하고 화국아이들이 더 쳐웃겠다.

 



 


 
다음검색
댓글
  • 16.03.01 16:07

    첫댓글 결국 수경과 수경주를 사관의 근본으로 삼는 자의 심각한 아전인수를 보고있음! 자기논에만 물대고 다른 논은 햋볓에 타죽든가 말든가.. 극이기적 사관자임^^ 국정화찬성론자의 논리와 다를 바 없음^^

    내가 보기에 이덕일이나 그대나 오십보 백보인데 누가 누구한테...

    글을 길게 썼지만 대부분 관념론, 혹은 수경 수경주의 찬양론에 그침..

    백산: 산이희다:흰돌이나 백토로 된 산
    백두산:머리가 흰산:장백산(불암산을 포함 7~8가지의 명칭으로 불리우는...)등처럼 산이 높아 눈이녹지 않는산~ 즉 이런산들을 아우르는 일반명사

  • 16.03.01 16:01

    설마 낙양을 상곡군으로 옮긴거임???
    낙랑과 갈석을 비정하기 위해서????

  • 16.03.01 16:06

    조조 시 <갈석보출하문행>의 낙양, 갈석, 창해를 그대의 사관으로 비정 혹은 풀이해 보시게나~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