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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뭉클하네요.
어렸을 적의 아픔은 성장하면서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힘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어머님이 존경스럽네요.
어떠한 환경에서도 늘 든든한 나무와 같은 어머님의 존재가 모두를 강하게 만드신 힘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 [원본 메세지] ---------------------
전화가 왔다. "언니 ..... 우리 살던 동네 부수고 있어..." 동생에게 전화를 받은 영자의 머리속엔 많은 시간 온통 한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내려 갈까?........... 아니면 돈 10만원 정도 쓸텐데 참을까?......" 저녁을 준비해 놓고 터미널로 향했다. 2시 50분 차를 탈수 있었다. 차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은지는 몇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벌써 고향집에 가 있었다. 서울을 빠져 나가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머리속과 눈 앞엔 많은 옛 추억들이 뒤섞여 지나갔다. 아이 넷을 포함한 6식구가 남의 집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 겪었던 많은 서러움이 있었기에 우리 모두는 벗어나고 싶었다. 비록 6평정도 되는 무너지기 직전인 허름하고 작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방 비워라.."는 주인의 냉대를 더 이상 받지 않을 "내집"이었기에 빚을 내서 엄마는 샀다.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쁨을 갖고 이사를 했건만...... 영자에게 그 집은......... 술과 노는 것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가정에 소홀했기에 반장일을 봤던 엄마의 신용 하나로 동네 철물점과 목재소, 시멘트 대리점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와 집을 지었다. 신고가 들어 갔고, 무허가라고 공무원들이 나와서 집을 부쉈다. 엄마는 "저 어린것들하고 살게끔 해 달라...."울고 메달렸다. 조금씩 벽돌 몇장 올라 가면 와서 부수고, 다시 벽돌 몇개 올리면 이웃에서 신고를 해 다시 부수고.......결국엔 형식적인 건물 형태만으로 허름하지만 보금자리를 지을수 있었다. 6평정도 되는 그 좁은 땅에 방 두개에 2층에 작은 방 하나를 더 지었다. 그리고 안방에서 여섯식구가 살면서 두개의 방은 세를 주고 그 월세를 받아 엄마는 몇년을 빚을 갚아갔다. 그렇게 하여 여관이 두개 있던 좁은 골목집에서 영자네는 살게 되었다. 그때는 그렇게 행복할 줄만 알았었다. 세월이 흘러 빚을 다 갚고 윗층은 남동생 혼자서 쓰고 작은방은 딸 셋이 쓰게 되었다. 얼마나 비좁던지 여름엔 반듯이 누워자면 더워서 자다가도 짜증을 내며 옆으로 잤던 그런 집이었다. 내겐 "한"을 남긴 그런 방이었다. 어릴적 추억이라곤.............. 7시가 되어도 집에 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면 불끄고 자는척을 해야했다. 술 드시고 오셔서 동네가 떠나가라고 골목에서 팬티 차림으로 욕을 하고 살림을 때려 부쉈기에 그 동네에서 영자네는 항상 시끄러운 집이었다. 악몽 그 자체였다. 골목의 한 입구는 시내.시외 버스 터미널이 있었고, 한쪽 입구는 전주에서 꽤 큰 재래시장이 있었기에 좁은 골목이었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중요한 지름길이었다. 22살때던가 ........ 한번은 술 드시고 오신 아버지가 엄마를 폭행하자 그래도 맏딸이라 대가리가 제일 크다고 대 들었다. 아버지는 강제로 옷을 벗을 벗겼고 영자는 겨우 팬티만 입고 그 골목으로 늦은 시간에 쫓겨났었다. 가슴이 어느정도 나온 그 나이에 그 치욕스러움이란...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악에 받쳐 큰 소리로 울고 있을때 삼성여관 아줌마(친구 엄마)가 큰 수건으로 영자의 알몸을 덮어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지낸적이 있던 집이었다. 대학 간다고 직장을 그만 두었을때 12시가 넘은 시간에 자고 있는 영자를 깨워 내 쫓았았고 내 쫓긴 영자가 문 열어 달라고 하자 바가지에 물을 담아 퍼부었던 아버지가 살던 집이었다. 술 드시고 와서 트집을 잡아 엄마를 폭행했고, 오직 자식들 때문에 그런 세월을 사신 엄마를 그냥 볼수가 없었기에 항상 말리든지 대들었기에 영자는 내쫓기는 일이 많았었다. 그럴때면 아침까지 집 근처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들어가든지, 아빠가 잠든 후에 열쇠를 찾아 엄마가 문을 열어주면 들어갈수 있었던 집이었다. 언젠가는 엄마와 영자를 내쫓고 술 취한 아버지는 열쇠로 문을 잠그고 잠이 들었다.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에 포기를 하고 그냥 대문밖에 있었다. 가구집 아저씨가 준 박스를 깔고 엄마와 영자는 누웠다. "엄마..왜 나를 이런집에 낳았어?......" "영자야 미안하다......" 란 말을 모녀는 주고 받지는 않았지만 그때 누워서 봤던 엄마의 옆모습을 영자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가슴 아프기에.... 쓰디 쓴 눈물을 소리없이 흘리고 계셨기에......... 말없이 골목의 박스위에 누운 보금자리에서 엄마의 품에 파고 들었다. 선명하게 반짝였던 별들이 있던 맑은 밤하늘은 두 모녀에게는 아픔이었기에 지금도 그 밤하늘을 잊지 못한다. 살기가 힘들어 바느질 일을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하시던 엄마..... 한푼이라도 싸게 사기 위하여 새벽에 시장에 나가시던 엄마.... 한번은 잠결에 들으니 시장에서 돌아온 엄마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영자가 묻자, " 여편네가 250원만 하자니까 끝내 300원을 달라는거야.....아침에 도시락 싸고 바빠 주겠는데..결국엔 300원주고 사 오느라 이제 왔다....." 그곳엔 끊어지고 꼬부라진 오이가 한 소쿠리 있었다. 한참 먹을때인 4명의 아이들에게 그 오이나 당근은 항상 과일이나 과자를 대신해 주는 우리들의 먹을거리 였었다. 추운 겨울 탁구공만한 귤을 사다가 가위,바위,보를 하여 하나씩 집어 갔었다. 마지막 하나에까지 욕심을 냈지만 마지막 것이 영자의 차지가 되지 않았어도 여유가 있었다. 그건 부모님의 몫으로 남은 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자의 생각처럼 부모님은 귤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셨었다. 귤을 아껴 먹기 위하여 동생들이 감춰 놓은 귤을 훔쳐 먹던 철없던 큰딸 영자였다. 어린 동생들보다 영자는 컸기에 더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자와 비슷하게 분배된 동생들의 몫이 많게만 보였다. 왜 그때는 부모님은 먹지 않고 당연히 자식에게 줄 거란 생각을 했을까? 참외 2개로 동생들과 싸웠던 일. 접대용으로 감추어 놓은 커피믹스를 하나 훔쳐 큰 대접에 색깔만 나게끔 3분의 1정도를 타서 동생들과 대접 들고 나눠 마셨던 일. 국자에 뽑기(띠기)를 해 먹다가 동생들은 젓가락으로 찍어 먹게 하고 욕심을 낸 영자는 숫가락으로 퍼 먹다가 흘려 손에 흉이 생긴 일. 동네 중국집을 하는 애에게 달걀 오라고 하여 연탄불에 삶아 터진 흰자는 애들 주고 노란자는 항상 영자가 먹었던 일. 개천에 목욕 갔다가 슬리퍼 잃어 버려 집에 못 들어 오거나, 없는 살림에 새 신발 사게 되었다고 맞았던 일. 동네 돌아다니며 쇠붙이 주워다 팔아 과자 사먹었던 일. 손님만 오면 엄마에게 "과자 사 줘..." 라고 말했었다. 엄마는 영자에게 손님이 눈치채지 못하게 인상을 쓰며 눈짓을 했다. 그래도 계속 조르면 엄마의 주머니에서 동전 한닢이 나온다 물론 영자는 알고 있었다. 손님이 간 후에 맞는다는 걸....... 그래도 그렇게라도 먹고 싶었다. 그건 맛있는 과자나 사탕을 사 먹을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기에......... 어쩌다 손님이 오셔서 돈을 주면 그대로 나가서 동생들과 다 사 먹고 들어 왔었다. 왜냐면 손님이 가신후에 그 돈을 빼앗기므로... 먹을수 있었기에 혼나고 맞아도 좋았었다. 늦은 밤 술 취한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 위하여 동전을 꺼내다가 동전을 흘리는 소리를 들으면 살며시 골목의 가로등을 껐다가 그 사람이 간 후에 불 켜고 나가서 돈을 주워다가 과자를 사 먹었던 일.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쭈그러진 노란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 오던 일. 술 드시고 늦게 오신 아버지는 가끔 다음 날 아침에 영자를 불렀다. 아버지는 전날 입은 구겨진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주시며 두손으로 받으라고 하셨다. 양손을 모으고 벌리고 있으면 술집에서 먹고 남았던 볶은콩을 가득 영자에게 주셨었다. 그 때문에 성인이 된 영자도 가끔 땅콩이나 마른안주 거리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와서 아이들을 불러 꺼내주곤 하지만 영자의 아이들은 모른다. 그 진가를........ 통행량이 많았기에 대문앞 전봇대에 항상 소변을 보는 사람들과 옥신각신 했던 일. 오줌이 흘러 영자의 대문앞으로 흘렀기에 냄새와 더러움으로 엄마는 오줌싸는 이들과 많이도 싸웠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가던 젊은 엄마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큰 사과를 먹고 있었다. 골목에서 놀던 영자는 무척 먹고 싶었다. 그때 "하느님 고맙습니다" 라고 말할수 있는 일이 생겼었다. 아이가 사과를 흙으로 된 골목길에 떨어 뜨렸기에........ 영자는 그걸 주워 수도물로 사과에 묻은 흙을 씻었다. 그리고 양쪽 꼭지와 사과씨만 빼고 먹을수 있는데까지 다 먹었었다. 지금도 가끔 그렇게 먹어 본다. 어느날은 아이가 알사탕을 흘렸다. 아이는 엄마와 사탕을 번갈아 가며 울었지만 영자는 빨리 그냥 지나가 버리길 기다렸다가 사탕을 주웠다. 더운 여름날이었기에 녹아 내린 사탕엔 흙이 많이 묻어 있었다. 집에 가지고 가면 동생들에게 빼앗길까봐 사탕을 벽에 대충 문질렀다. 그리고 입에 넣고 침과 혀의 도움으로 요리조리 굴렸다. 그리고 사탕에서 떨어져 나온 흙을 뱉고 다시 요리조리........ 결국엔 때마침 나온 동생이 "언니 뭐 먹어?" 라고 했기에 조금 깨물어 나누어 줬던 일이 있던 그런 집이었다. 풍남문(문화제)에 밤 늦게 남동생과 올라가 동생이 이소룡 흉내를 내는 동안에 영자가 내려다 봤던 그 한밤의 동네를 잊지 못한다. 골목에 큰 쇠가위로 보자기 두르고 양옆이 다른 짧은 머리를 깍은 후 수없이 많이 울었던 일. 골목에서 머스마들이랑 딱지치기, 구슬치기 하던 일. 고무줄하고 놀고 싶은데 막둥이 엎어서 재우라고 하여 놀지 못하는 화남에 엎은 막둥이 엉덩이를 때리며 "빨리 자.."라고 했던 일. 수산시장에 가서 얼음 주워오던 일. 연탄불위에 조개 얹어 놓고 구워 먹던 아저씨들 앞을 기웃거리면 하나씩 주길래 받아 먹던 그 조개의 맛을 알기에 수없이 찾아가 기웃거렸던 수산시장이 있던 집 앞. 골목과 마주한 넓고 의리의리한 집을 부러워했던 일. 그 집에 사는 어린아이와 놀아주면 그 집 엄마는 먹을 것을 줬기에 항상 그집 대문이 열려 있길 기다렸었다. 아빠에게 맞고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 엄마 대신 수금을 다녔던 일. 그때는 찰밥 해 먹는 날이 영자는 싫었었다. 노점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엄마에게 돈 쓰시는 분들) 고생한다고 찰밥을 많이 해서 밥과 콩나물국, 나물등을 7~8번 날라야 했기에.... 미싱일 하면서 모은 천조각으로 예쁘게 베게로 만들어 명절날 인사를 대신 했던 엄마... 중.고교땐 영자도 의상실에 가서 줄자로 몸 재고 교복을 맞춰 입고 싶었다. 하지만 항상 엄마는 의상실에 가서 헝겊조각을 주워다가 시장에 가서 비슷한 천을 사다가 교복을 만들어 주셨다. 아침 조회를 할때 줄을 서면 영자의 교복만 색깔이 조금 달랐었다. 커 나가는 자식들을 위하여 집을 사고자 하셨을때 모든 돈을 긁어 모아도 3천만원이 모자라 포기해야 할때 10년을 거래해 온 친구같은 식당 아줌마에게 푸념을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아저씨가 그 자리에서 3천만원을 빌려주어 집을 사게 되었었다. 신용있고 틀림없던 이런 엄마를 영자는 세상에서 제일 존경한다. 엄마에게 들었던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자에게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보는 많은 지식과 지혜를 줬으며 여관이 있는 골목에서 살았던 20년의 세월은 영자에게 많은 것을 알고 보게 해 줬다. 눈물과 그리움으로 옛일을 회상하면서 전주에 도착했다. 영자는 택시를 타고 전동으로 갔다. 집에서 조금 멀리서 내렸다. 걸어가면서 옛일을 생각했다. 여고때 처음으로 남자의 성기를 봤던 그 공중전화 박스는 그대로였다. 전화를 하는데 이상하게 뭔가가 움직였다. 내려다 보니 옆 공중전화 박스에서 변태남자가.... 그땐 충격이었었는데....... 점점 가까워진다. 골목 입구의 집은 허물어져 있었다. 상이용사 아저씨가 하던 그 구둣방이 있었던 자리..... 영자는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주저 앉을수밖에 없었다. 그 20년을 넘게 살면서 겪었던 우여곡절이 많았던 6평도 안되는 그 허름한 집이 무너져 있었다. 계속 흐르는 눈물로 얼굴은 범벅이 되었다. 웬지모를 설움이 복받쳐 올라 소리내어 통곡을 했다. 좀 더 일찍 올걸....... 영자는 바보........병신........ 흔적이 없었다. 한시간을 넘게 그 골목에서 떠날수가 없었다. 낯익은 부부가 무너진 집을 구경하기 위하여 왔다. 인사를 했다. 아줌마는 알아봤지만 아저씨는 몰라봤다. 아줌마는 "반장 집 큰딸.."이라고 했지만 아저씨는 기억이 나지 않는듯 했기에 영자는 "맨날 시끄러웠던 집요.."라고 했다. 하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왜냐면, 지금 그 자식들 다 잘 되어 잘 살고 있으므로..... 그런 환경에서 하나도 삐뚤어지지 않고 곱게 잘 컸으므로.... 다시 밀려 오는 옛 추억들 ! 울고 있는 내 앞으로 할머니 한분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영자를 더욱 더 가슴 아프게 하고야 말았다. "이 구닥다리 집들 이제야 다 없어지는구나......" 영자가 겨우 가져온 흔적은 술 취한 사람들이 소변을 보던 전봇대와 그 위에 있는 가로등, 그리고 골목의 한쪽인 시장쪽 입구에 조금 남아 있는 "216"이란 글이 써 있는 무너진 벽뿐이었다. 이제 이 모습만이 몇장의 사진속에 남을것이다.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갔다. 영자의 부모님은 지금 300평이 넘는 집에 사신다. 전동집 보고 왔다며 눈물이 글썽하자 아버지는 말씀이 없었다. 몸이 불편한 엄마를 대신하여 이것저것 싸주신 보따리를 들고 서울의 보금자리로 돌아오기 위하여 집을 나왔다. 아버지........... 엄마............. 영자가 그 좁은 집이 너무나 그립듯이 두분도 그러하리라........ 그땐 엄마가 건강했으므로............. 그땐 엄마가 젊었으므로............... 사라진 내 향수인, 전주시 전동 1가 216번지.......................